여기에 적는 모든 건 감상문의 취지입니다.
두서없이 적어도 용서해 주세요. 아 그리고 제가 러셀을 싫어한다고 그분의 모든 업적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이유면 몰라도 <서양철학사>로 노벨상 받았다는 말이 좀 우스워서 그런 거지 딱히 악감정 없습니다.
그만할까 생각했는데 차근차근 따라 읽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는 거 같아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어서 끄적여본다.
시론을 따라 읽고 있는 사람은 느낌이 올 것이다.
어? 생각보다 철학 1차 문헌 안 어렵네?
이건 베르그송이 유난히 글을 읽기 쉽게 잘 썼기 때문이다. 읽을만하네요.라고 생각한 사람은 깜짝 놀라겠지만 베르그송 책 중에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시론>이 가장 어렵다.
아닌데 <물질과 기억>이 젤 어렵지 않음? 그건 차근차근 읽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막 가져다가 쓴 원뿔 도형 때문에 굳어진 편견이 아닐까. 어쩌면 2장에 인용된 수많은 사례들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들뢰즈 때문에 베르그송을 어려운 아저씨로 떠올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참 어렵게 말하는데 정작 그건 베르그송이 아니다. 당연히 베르그송이 아니니까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베르그송은 딱히 어렵게 말할 구석이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말도 아니고, 명료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다만 그 말을 깊게 파고들면 신세계가 열리는 데 이건 글의 난이도를 아예 벗어난 또 다른 이야기다. 들뢰즈가 쓴 글도 자기 나름대로 그런 세계를 펼쳐낸 것이다.
이건 들뢰즈(1925~1995)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소은 박홍규(1919~1995)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다만 박홍규 선생님은 좀 더 베르그송 본연에 가까운 철학 속에서 깊이를 이끌어내셨다는 점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베르그송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건 부분 부분 독립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언급하지만 베르그송의 작품은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두 원천>로 이어진 4챕터로 이루어지고 뒤에 부록으로 <정신적 에너지>, <사유와 운동>이 들어간 단권으로 봐야 한다.
97p~102p (56-59)
이제 양과 질이 다른 것을 알았으니 좀 더 복잡한 논의로 수를 설명하려는 것
97p
-수는 일반적으로 단위들의 집합,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와 여럿의 종합으로 정의된다.-
역주 2번에서 나온 대로 단위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진다. 이해를 위해 미리 앞당겨서 설명을 가져오겠다.
103p
-하나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스스로에 보태짐으로써 수를 형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잠정적인 것으로서 단위들이 보태져 이루어진 수의 단일성인 바, 그 수는 그 자체로서는 여럿이지만 지성이 그것을 파악하는 단순한 행위로부터 그 단일성을 빌려온다.
이때 '잠정적인 것'은 다수성을 포함하는 단일성이고, '결정적인 것'은 말 그대로 단일한 하나다. 그러니까 예컨대 4라고 할 때 4는 1+1+1+1로 다수성을 가지면서 '4'의 단일성이다.
98p 하단에 양을 가지고 예시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다른 예를 가지고 살펴보자.
우린 방금 두 명의 여자를 봤다.
이때 각각 다른 여자(이하 빨간 팬티와 검은 팬티)라 둘이라는 말은 서로 구별되는 것의 합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개별적인 차이는 잠시 멀리하고 둘이라고 말하는 것을 단위로 사용하고 있다.
두 명의 여자를 '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해서 두 여자가 반쯤 합쳐진 이상한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즉 단위는 구성하는 것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하나가 되지 않는 개별적인 차이(빨간 팬티, 검은 팬티)를 지니고 있다. 만약 동질적인 것이(교환 가능하며, 잘라도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셈을 할 수 있는 것) 없으면 묶어서 셀 수 있는 단위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차이가 없다면 역주에서 말한 대로 기초적인 사칙연산조차 쓰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 이제 단위의 속성을 알았는데 여기서 잠깐 우리가 지금 떠들고 있는 두 명의 여자. 얼굴이 기억나는가? 한눈에 꽂힌 사람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다. 평소에 알던 배우였다면 이런 거 저런 거 은밀한 곳까지 기억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완벽하게 기억이 난다고 장담할 수 있나? 말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우리가 봤던 두 여자의 세밀한 이미지가 하나씩 걷어지면서 대충 금발 여자. 백인 여자. 더더욱 흐릿해져서. 그냥 여자 두 명 사진. 여자 사진 두 장. 그렇게 점차 추상적인 숫자 2가 되어 간다.
100p 하단
-우리는 가령 한 줄의 공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그 공이 점으로 되었으며, 결국에는 그 상 자체마저 사라지고 우리가 말했듯이 추상적 수 이외의 아무것도 그 배후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음을 볼 것이다.-
우리는 계산에 필요한 기호만이 보존되었으며, 그 기호로 수를 표시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여자 두 명이요.
102p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세는 순간들 각각을 공간의 점으로 고정시키며, 오직 그런 조건 아래에서만 추상적 단위들이 합계를 이룬다.-
-수에 대한 분명한 관념은 모두 공간 속에서 본다는 것을 내포한다.-
<시론> 1장에서 양과 질을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는가. 여기서 우리가 숫자를 세는데 질적인 것을 삭삭 빼버리고 양만을 남겨 단위의 합계를 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공간에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아니죠. 시간이 지나서 질을 기억 못 해 양만 이야기하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여기서는 기억을 못 했기 때문이라는 논의는 빼야 된다. <시론> 공간적 이해를 습관처럼 하기 때문에 양적인 결과만 가지고 셈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한 것이니까. 기억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너무 앞서있다. 지금은 지속을 설명하는 단계를 밟고 있으니 거기에 초점을 맞추자. 다만 그런 의문은 당연한 의문이다. 그걸 밝히는 게 <물질과 기억>
103p~106p 상단까지 위의 설명을 다시 한번 상세하게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
106p 중단
-단위들은 그 수를 형성하는 데에 사용되는 한 계속해서 잠정적으로 불가분적인 요소들을 이룰 것이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것은 항상, 이를테면 끊어지듯 그리고 급작스러운 도약에 의해서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길게 이어진 직선에서 일정 부분에 표시를 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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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끊어서 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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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좀 길게 끊어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에서 0.5 정도 혹은 0.7 정도 아무렇게나 끊어서 표시를 해놓아도 숫자 1이라는 단위는 여전히 잠정적으로 불가분적인 요소를 이룬다. 앞서 설명한 것을 다시 기억해 보자. '잠정적인 것'은 다수성을 포함하는 단일성이다. 1이라는 직선에서 내가 아무리 끊어내고, 또 끊어내서 여럿으로 나누어도 이 다수성은 1이라는 단위의 단일성 안에서 포섭된다. 그런데 0.5에서 0.6이나 0.7 혹은 0.61도 상관없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각각 '끊어지듯' 급작스러운 도약이 이루어진다. 하나의 1에서 이리저리 끊어낸 것이니 당연하다.
106p~107p
-우리가 수를 그 완성 상태에서 생각할 때, 그러한 접합은 기왕의 사실이 되어 버린다. 점들은 선이 되어 버렸고, 분할은 지워져 버렸고, 전체는 연속성의 모든 성격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법칙에 따라 합성된 수가 어떠한 법칙에 따라서건 분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끊고 별 지랄 다해도 우리는 1이라는 완성 상태를 생각하면서 수없이 끊어냈던 점과 분할들은 지워지고 전체는 연속성을 지녀 단일한 단위로 셈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반복하지만 이런 성격 덕분에 1+1=2가 가능하고 2-1=1도 가능해진다.
107p
-그것은 형성 중인 수와 일단 형성된 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형성 중인 수는 1에서 마구잡이로 쪼개면서 놀던 그 생각이고, 형성된 수는 그럼에도 1의 단일성이라고 생각했을 때를 말한다.
-단일성은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없애 버릴 수 없으며, 수도 그것을 구성하는 동안에는 불연속적이다.-
쪼개서 놀아도 단일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단일성을 쪼개려고 보면 급작스러운 도약이 무분별하게 일어나 불연속적이다. 계속 앞에 설명한 걸 다시 말해주고 있는 것.
-수는 완성된 상태에서 생각하자마자 객관화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때 그것이 무한히 분할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는 완전히 충족하게 알려진 것을 주관적이라 부르며, 항상 증가하는 수의 새로운 인상들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관념을 대체할 수 있을 방식으로 알려진 것을 객관적이라 부른다.-
여기서 주관과 객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쉬운 내용이다.
앞서 우리가 언급했던 빨간 팬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갑자기 빨간 팬티를 정신없이 떠올린다. 금발 백인, 엉덩이...
이런 건 전부 사물의 외부를 돌면서 밖에서 아는 것이다. 이때 if 객관적이라는 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객관, 물체, 물건, 목적으로도 번역되지만 '대상'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반대하다의 의미가 있다. 이는 독일어의 gegenstand도 마찬가지. '대상'의 의미에 부정하다 반대하다 저항하다 등 '반대'의 의미가 함께 있다. 즉 객관이란 바깥에서 맞서는 대상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깥'이다. 빨간 팬티의 엉덩이가 그렇고 그런 것은 객관적인 것일 뿐이다. 바깥의 것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인상이 추가될 수 있다. 엉덩이를 때려서 빨갛게 만들면 내가 본 그녀의 바깥 엉덩이는 빨갛게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빨갛지 않던 엉덩이를 떠올리며 빨갛게 된 피부를 그녀의 엉덩이에서 걷어낼 수도 있다. 그렇게 사진의 엉덩이를 오일 발라서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고, 때려보기도 하고, 핥아대도 대상은 내게 저항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외관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앞의 인용문을 다시 보자.
-수는 생각하자마자 객관화되며~-
-현재 가지고 있는 관념을 대체할 수 있을 방식으로 알려진 것을 객관적이라 부른다.-
즉 객관이란 이렇게 수처럼 넣었다 빼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바깥'에 있으니까.
108p 추가 설명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물체의 전체적인 모습은 사유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분할하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다양한 분할이 다른 무한한 분할과 마찬가지로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미리 심상 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대로 주관이란 '바깥'이 아니라 ' 속'일 텐데 과연 ' 속'이란 무엇일까?
역주 18번을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편의상 그대로 옮겨본다.
-의식의 상태, 즉 주관적 상태는 그 구성 성분을 구별하자마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변질된다. 그 상태 자체가 바로 우리 자신에 속하며, 우리 자신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체는 우리 밖에 있기 때문에, 즉 객관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우리 속에서 아무리 쪼개 보아도 그것의 외관은 변하지 않는다. 즉 객관성이라는 특성 자체는 우리 마음대로 분해할 수 있으며, 그러한 분해를 현재에 그리고 있을지라도 그 자신의 외관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 상태들은 분할 가능성을 단지 잠정적으로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실재로 분할하면 이미 다른 의식 상태가 되어 버리지만, 외부 물체는 현실적으로 분할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외관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즉 현실적으로 분할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빨간 팬티의 엉덩이를 터질 듯이 주물럭댄 내 의식은 어떤가. 그녀의 엉덩이를 보기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아주아주아주 확실히 달라졌다. 아예 비포 애프터로 돌이킬 수 없는 엉덩이의 탐닉이었다. 그리고 이런'비포'와 '애프터' 의식을 따로 떼어볼 수야 있겠지만 이미 또 다른 의식 상태가 되어버리니 떡 주무르듯이 움켜쥐어도 온전했던 객관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주의할 점= 바깥이니 속이니 하는 것은 비록 쉬운 설명을 하려고 엉덩이를 예로 들어서 진짜 물리적인 바깥/속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이 "나무 잘라서 속을 봐라 똑같이 나무지 뭐가 있냐 이건 형이상학적 용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다. 놀랍게도 박홍규 선생님이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베르그송 강의록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 30p -'안'이니 '밖'이니 하는 표현들은 형이상학적인 표현들이지요. 이 표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자세한 건 다른 독회 시간에 ~)
109p
-공간이란 정신이 수를 구성하는 질료이며, 정신이 그것을 위치시키는 장소이다.-
111p
-이념적 공간에 도열시키고는 그것을 이제 순수 지속 속에서 샌다고 생각한다.
111~116p
불가입성 설명이 나오는데 각주의 설명이 자세하니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118p
-의식이 시간과 심지어 계기에 대해 가지는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하는 상들을 반드시 공간에서 빌려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지속은 다른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감각은 물체의 질을 그리고 그와 함께 공간을 지각한다. 그러한 질들은 본질적으로 비연장적이며(1장의 내용) 공간은 거기에 덧붙여지는 것이지만~ -
119p에는 칸트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칸트에게 공간과 시간은 감성적 직관이 일어나기 위한 선험적인 형식이다. 이때 공간은 외적 직관의 형식이고, 시간은 내적 직관의 형식인데 자세한 건 독회에 참여하는 분들이 각자 칸트 책을 살펴보면 될 일이므로 여기서는 공간만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근저에 있는 필연적인 선험적 표상이다. 공간 안에 대상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공간이 없다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 공간은 외적 현상에 의존하는 규정이 아니라 현상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여겨진다. 즉 그것은 외적 현상의 근저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선험적 표상이다.'
119p
-공간에 대한 칸트적인 견해는 생각하는 것만큼 일반인들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122p
-정신의 능동적 개입 없이 어떻게 그와 같은 발생을 설명할 것인가?-
역주 47번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다. 중요해서 좀 길지만 그대로 복붙해본다.
-일반적으로 베르그송은 칸트 철학에 대립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칸트와 자신의 입장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동질적 공간의 개념은 지성의 종합하는 능동적 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며,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형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슷한 것이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에게 공간은 선험적 직관 형식으로서 주관이 이 세계에 적용해야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은 우리의 직관 형식과는 상관없이 우리 기능을 넘어 뻗어 있는 <실재>이다. 그것은 우리 기능과 대립해 있는 유동(flux)의 어떤 측면이다. 단, 그러한 측면을 얼마나 동질적으로 파악하느냐는 각 종의 기능에 종속된다. 결국, 아예 아무 공간성도 없는 곳에 인간이 비로소 공간성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측면과 질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동 flux 속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기능이 질적인 측면과 공간적인 측면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질적 공간을 추출해 내는가는 지성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외부에 있는 것을 빼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유동 flux 이란 무엇인가? 이건 <물질과 기억>을 보고 돌아오면 알 수 있으니 넘어가자.
칸트와 베르그송의 가장 큰 차이는 '물자체'에 있다. 이것도 역시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에서 또 언급할 테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겠지만 칸트를 읽은 사람들은 위의 역주를 보거나 베르그송 시론을 이 정도만 읽었어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칸트에 대한 내용은 베르그송이 <시론> 결론에서 다시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그때 가서 읽으면 더 쉽게 이해된다.
125p
-연장성의 지각과 공간의 개념화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역주를 다시 보면 알 수 있다.
127p에서 좀 길었던 논의의 결론을 적어놓는다.
-우리가 다른 질서의 두 실재를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감각적 질들의 실재이며, 다른 하나는 동질적인 것으로서 공간이다. 후자는 인간의 지성에 의해 명료하게 개념화된 것으로서 확연히 나누는 구분을 행하고, 세며, 추상하고 그리고 아마도 또한 말할 수 있게도 해준다.-
그 아래의 설명은 좀 헷갈릴 수 있는데
역주에서 나온 대로 사실 양 속에는 질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사유와 운동> 246p
-수학이 크기의 과학에 불과하고 수학적 과정이 오직 양적인 것에만 적용된다면, 그 양이란 언제나 발생하고 있는 상태가 지닌 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양이란 질의 극한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아니 뭐야 양과 질은 다르다면서 왜 또 갑자기 섞여 있다고 하는 거야? 설명을 위해 따로 떼어 분석했다고 말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앞으로도 헷갈릴 수 있으니 미리 정리를 해놓고 가야겠다. 이하 내용은 좀 기니 단락을 나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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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130p
-지속에는 가능한 두 견해, 즉 모든 혼합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지속과 공간의 관념이 몰래 개입한 지속이 있기 때문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져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이렇게 정리된다.
(아직 아래 내용이 전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선 결론부터 적어두는 것)
1.순수한 지속(시간) <순수한 이질성>
2.공간이 개입한 지속.혼합물, 동질적인 것과 연속성이 섞인, 삼투압으로 공간화된 동질적 시간
3.공간.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성으로 있는 공간
먼저 <시론>에서 설명은 여기까지가 끝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시론>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게 목적인 작품이므로 본격적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후 내가 적고 있는 내용은 모든 작품을 끌어와서 짧게 쓰는 것임을 알아두자.
보면 <시론>은 아래부터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는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순수한 공간에는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적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이미 앞서 설명했으니 반복할 필요 없겠다. 그다음 공간이 개입한 지속, 즉 혼합물이 있다. 여기까지는 양(<사유와 운동>과 역주에서 설명하고 있는 질이 섞인 양)들이 있지만 더 올라가면 순수지속이 나온다.
순수지속을 말하기 전에 자 그러면 앞서의 의문점. 사실 양에 질이 섞여있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건 <물질과 기억>에서 쓸 내용의 떡밥을 던져준 거라 보면 된다.
베르그송 사유의 구조는 우선 양/질, 연장적/비연장적, 동질/이질, 정지/운동 등을 구별한다. 구별하는 이유는 당연히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왜 다르다고 설명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공간과 시간 때문이다. 지속에서 공간을 개입해 수많은 양/질, 연장적/비연장적, 동질/이질, 정지/운동을 나누어 낸다. 공간이 이루어낸 사고를 1장부터 차근차근 짚어낸 것이다. 사실상 그렇지 않고 온전한 실재인 시간으로 보면 <물질과 기억>에서 쓰이는 용어로 표현해서 '펼쳐짐'이다. 순수한 지속은 순수한 이질성을 가지고 있어서 쪼갤 수 없는 것이다. 즉 양과 질, 연장, 비연장, 동질, 이질은 지속에서 만나는 것이고, 공간이 개입해 나누어 댄 내용이 양이고 질이고, 연장이고 비연장이다.
그래도 우리는 훗날 쉬운 독서를 위해 조금만 더 정리하고 넘어가자.
1, 2, 3.에서 2, 3은 여기까지다. 공간은 <시론>에서 베르그송이 이미 처리했지 않은가. 그리고 2, 3번은 과학이 열심히 실재의 근본에 이르려 노력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형이상학과 과학 모두 실재의 근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성은? <창조적 진화>, <사유와 운동>을 보면 알겠지만 지성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차피 나중에 또 보겠지만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몇가지 적어두고 가겠다. 우선 지금은 읽고 넘기기를
<사유와 운동> 45p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양자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한다.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실재의 근본에 이를 수 있다.-
<사유와 운동> 54p~55p
-직관은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전달된다. 직관은 관념 이상의 것이다. 그런데도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 전달체로서 관념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직관은 아직도 심상의 외부 장식을 보유한 관념보다는 가장 구체적인 관념들에 의존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비유와 은유가 암시해준다.-
-과학이 현재 실재의 일부만을 포착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부분의 근저에 이를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실재 부분에 무한히 접근해 갈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재래의 형이상학이 구상했던 계획의 절반을 이미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길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형이상학이라 불리웠을 것이다. 계획의 나머지 절반이 남아있다. 이 절반의 계획은 내가 보기에 역시 경험에서 출발하고 스스로 절대를 획득할 수 있는 형이상학으로 정당하게 되돌아가고 있다. 만일 과학이 자신의 한게를 실재의 다른 부분으로 한정짓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 형이상학을 과학이라 부를 것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실증과학보다 우월하지 않다. 형이상학은 과학의 업무가 끝난 후에 더 고위의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과학이 다루었던 동일한 대상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소신은 양자는 똑같이 정확하고 확실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양자 모두 실재와 관련을 갖고 있다.-
베르그송 전공한 사람들(특히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과학공부를 중요시 한 이유가 있다. 베르그송의 과학철학, 엄밀하게 말하면 학문을 하는 방법도 나중에 다뤄볼 주제다.
애초에 당시 있는 과학 없는 과학 다 뒤져서 쓴 게 <물질과 기억>이랑 <창조적 진화>인데 러셀 이 미친새끼.
남은 건 1번. 순수지속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시론 135p
-순수한 지속은 분명 명확한 윤곽도 없고, 서로의 밖에 있으려는 어떠한 경향도 없으며(즉 속으로!), 수와는 어떠한 유사성도 없이 서로에 녹아들고 서로 침투하는 질적 변화의 연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수한' 이질성일 것이다.-
순수 지속은 공간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라 셀 수 없다. 서로 침투하는 질적 변화의 연속성을 지닌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자면 우선
시론 131p에서 지금까지 읽은 시론 분량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가 나오는데 이것부터 시작해야 된다.
-동일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변화하는 존재자가 스스로의 지속에 대해 가질 표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런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빗대어 베르그송을 비판한 적이 있는 듀이가 책 대충 읽었다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서 나온다. 우리가 지속 속에서 직관(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을 하고 지성으로 별 지랄 다하면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베르그송 철학이 뛰어난 이유이자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이다. 하지만 여기 <시론>에서는 <시론>만큼만 맛보기로 살펴보고 넘어가자. 제대로 보려면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설명도 빠짐없이 채워 넣어야 된다. 우선 여기서는 그분의 제자인 역자의 주석 64번을 그대로 옮긴다.
-<동시에 동일하면서도 변화하는 존재자>는 자기모순적 개념이다. 변화하면 이미 동일하지 않을 것이요 동일한 채로 남아 있으면 아직 변화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존재자가 지속하는 존재자이다. 다시 말해 지속한다는 것은 그 자체 모순적 사건이다.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어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을 해석하면서 지적한 대로 이러한 존재 방식은 바로 자발적으로 운동하는 것, 자기운동자, 즉 생명체 일반의 존재 방식이다. 생명체는 항상 변화하면서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그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이 책에서는 아직 기억이 중심적인 주제로 떠오르지 않았으나 지속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는 이미 거기로 나아가는 길을 미리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베르그송이 이 모순을 처음부터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이 구절이 보여주고 있다.-
베르그송은 실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주가 돌아가는 삼라만상의 원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우주 안에 있는 내 의식은 무엇에 접해 있는가 (몸에 대한 이야기의 확장은 물질과 기억에서)
공간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지속으로 질적인 변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자기동일성이 필요하다. 모든 운동에는 필연적으로 타자화, 즉 내가 아닌 것으로 달라지는 것을 수반한다. 운동을 했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지금도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방금 전의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고 있지 않은가. 글을 쓰기 전의 나와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분명 운동으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한 번에, 단번에 주어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런 질적인 변화가 연속적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는 나로서 숨을 쉬고 살아간다고 말하는 자기동일성을 가져야만 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그런 자기동일성이 없이 매 순간 계속해서 변화, 변화, 변화로 이어진다면 세상, 우주가 있을 수 있겠는지. 자기동일성이 없어서 다른지 아닌지도 모르면 변화라는 말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1번의 순수 지속은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에서 사유가 확장된다.(말이 확장이지 나머지 책을 다 읽고 시론을 다시 읽어보면 이미 다 나와있었다.)
<시론>의 주된 목적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 앞에 적은 1,2,3번만 기억하고 이어간다.
편의상 다시 적어두겠다.
1.순수한 지속(시간) <'순수한' 이질성>
2.공간이 개입한 지속.혼합물 동질적인 것과 연속성이 섞인, 삼투압으로 공간화된 동질적 시간
3.공간.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성으로 있는 공간
참고로 여기서 2번 혼합물을 순수한 지속으로 보고 분석한 책이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다. 읽어보면 경험 그 자체는 혼합물, 마치 비실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 혼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베르그송에게 경험 그 자체는 혼합물이 아니라 순수한 지속인 1번이다. 혼합물은 141p(다음 독회 범위지만)에서 말하는 삼투압 현상의 경향성의 구별일 뿐이다.
들뢰즈가 이렇게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본 이유는 본인의 철학을 위해서였는데 그건 베르그송 52주 독회가 끝나고 들뢰즈 52주 독회 때 할 이야기.
베르그송이 말하는 건 항상 양과 질이 다르다는 것이지, 양이란 없고 질만 있다는 게 아니다. 달리 말해서 공간과 시간은 다르다는 것이지, 공간이 없고 시간만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유명한 일화를 생각해 보라. '부인 저는 시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 이러면 또 엥 현대물리학은 시공간인데~~ 븅신~~~ 칸트랑 베르그송 같은 거 왜 처보고 있음 과학 책 한 권이라도 더 보지 시간 낭비 오지게 하네~~~~.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과 베르그송이 쓰는 말이 뭔가 '단어'가 엇갈려서 그런지 말이 많은데 마치 ' 속'과 '바깥'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무속 파보니까 나이테만 나오던데요? 하는 꼴이다. 러셀이 그런 인간이었지. 러셀 <티마이오스> 해설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아 그리고 또 오해하지 말기를 2,3번에서 공간이라고 베르그송이 배척하는 건...손가락 아프니 이 이야기는 반복하지 않겠다.
128p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간을, 공간과 다르지만 공간처럼 동질적인 어떤 한정되지 않은 장소로 생각하는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 중략 ) 사실 시간을 의식의 상태들이 전개되는 것으로 보이는 동질적 장소로 만들 때,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시간은 단번에 주어지며, 그것은 곧 시간을 지속으로부터 빼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유와 운동>에서 나오는 대로 시간은 단번에 주어지지 않게 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앞서 빨간 팬티를 입은 여자를 보고 검은 팬티를 입은 여자를 차례대로 보았다. 시간이 단번에 펼쳐진 공간이라면 왜 우리는 이미 그걸 보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태어나자마자 알지 못했는가.
-따라서 동질적 장소라는 형태로 생각된 시간은 순수 의식의 영역에 공간의 관념이 침입한 데 기인한 사생아적 개념이 아닌지를 자문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의식의 사실들은 비록 계기적이라 할지라도 상호 침투하며, 그들 중 가장 단순한 것에도 영혼 전체가 반영된다.-
여기서부터 베르그송이 기억을 은연중에 말하고자 밑밥을 슬슬 깔고 있다. 역주 60번 참고.
133p
-따라서 지속 속에서의 가역적 연쇄라는 관념, 또는 단순히 시간 속에서의 어떤 계기적 순서라는 관념조차도 그 자체 공간의 표상을 내포하며, 그것은 시간을 정의하는 데에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혼합물에 대한 설명이다.
135p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고.
이번 주 독회는 이렇게 끝.
다음 독회는 <시론> 2장 마무리까지.
추가로 오늘 독회에서 단위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단위를 말한 베르그송의 의도를 아래 소은 박홍규의 글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 452p
-우리가 있기 위해서는 전체 우주가 다 있어야 돼. 그러니까 실존이란 것은 무슨 얘기야?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데, 특히 베르그송 철학은 실존의 철학이야. 왜냐? 한 사물을 독자적으로 딱 규정지을 수 없고 다른 모든 우주에 있는 사물과 연관해서만 규정이 돼. 어떤 기능의 어떤 관계 속에서만 무엇이 주어져. 어떤 단위가 성립할 때 플라톤 같은 에이도스 학설은 그것만으로 되지만, 베르그송은 안돼. 전체의 기능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만 어떤 단위가 딱 나와. 이것은 에이도스하고 완전히 다른, 정반대되는 학설이야.-
우리가 봤던 두 여자가 기억나는가
이게 다 관계를 맺어야 된다는 이야기다.
빨간 팬티... 검은 팬티...
이번 독회 3주차는 확실히 1주차와 2주차 다르게 베르그송 철학의 윤곽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음. 전 주차는 철학의 전개를 위한 기초적인 개념 설명이 조금 지루했는데, 확실히 이번 독해에서 왜 개념 한 장(章)을 할애하며 개념 정의를 해놓았는지 알 수 있었음. 특히 계기(successifs)란 개념이 나왔을 때,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개념과 맞닿는 지점이기도 해서 흥미로움.
더군다나 학부 시절에 대충 읽다 만 부분을 다시 읽어보니, 우리가 수량적 사고를 진행할 때 공간부터 전제한다는 점은 참 명철한 지적임. 물리학 같은 경우 시간과 공간은 의미 자체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수량적인 변수 정도로 취급하지만(특히 민코프스키 다이어그램), 베르그송은 철학적으로 원초적인 개념 설계부터 고찰한 점에서 비롯된 결론이니, 지적인 매력인 돋보임. 괜한 엘리트가 아니구나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