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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들으면 어떤 사람은 당황하겠지만, 이미 알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길티 플레져와 함께 나름대로 한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라고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판타지 요소가 들어가는 시점에서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의 영역이 너무나 작가 마음대로 조정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라도 그렇고, 굳이 판타지 스릴러 소설이 아니라 판타지 추리소설이어야 하느냐는 점 때문에라도 그렇다. SF 추리 소설도 비슷한 지적을 당하곤 하지만, 최근 읽은 <엘리펀트 헤드>처럼 딱 하나의 SF 장치만을 도입한 상태에서 글을 풀어나가면 충분히 추리 소설의 매력을 줄 수 있다. 기념비적인 랜달 개릿의 <마법사가 너무 많다>부터 일본의 다양한 이세계 추리소설을 보면, 판타지 추리소설은 어쩔 수 없이 독자의 현실과 너무 다른 세계 속에서 흥미로우면서도 나름대로 정합성 있는 탐구를 보여줘야 한다. 다만 판타지 독자에게 이미 익숙한 세계관과 설정을 쓴다면 이 중간다리를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는데, 이 독자들에게 있어 추리소설 속 세계는 현실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익숙한, 정합성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게 꼭 추리소설에서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어서, 헌터물이라는 정형화된 세계가 구축된 시장에서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같이 이 세계관의 내부 구조를 깊게 파고드는 글이 나올 수 있는 이치와 같다. 펄프 퇴적물이 가득 쌓인 땅에는 뿌리 깊은 나무가 자랄 수 있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도 그런 글이리라 생각했다.


아니다. <어스탐>은 추리소설이 전혀 아니다. 물론 임사전언이라는 글이 추리소설이라는 점과, 작중 인물들이 서사 속에서 점차 과거 사건의 진상을 알아가고 비밀로 감춰져 있던 사실들이 드러나는 과정이 추리소설 작법과 흡사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해리포터> 시리즈가 추리소설 작법을 활용하고 있었다고 <해리포터>를 추리소설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어스탐> 역시 추리소설은 아니다. <어스탐>은, 글쓰기에 대한 글이다. 아마 이 시점에서 탄식을 내지르는 사람도 있으리라 믿는다. 메타문학은 약간 퇴행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잘하고 가장 관심 있는 분야인 글쓰기에 대해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지만, 작가가 아닌 독자에게 가장 흥미롭지 않은 부분도 바로 그곳이다. 심지어 지금 작성되고 있는 바로 그 글에 대한 메타적인 글쓰기까지 들어간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스탐>은 그 점에서도 메타소설이기도 하다. 어쨌든,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속에서 작성되고 있는 임사전언은 완성 후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이라는 이름을 가지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스탐>을 읽고 느낀 점을 제대로 공유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아마 이 호감은 편향되어 있을 테니까.


덕분에 <어스탐>과 가장 비슷한 글을 꼽자면, 상술한 판타지 추리소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봐야 한다. 미치너의 <소설>은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네 사람이 각각 한 장씩을 맡아 그들의 시각에서 책이 저술되고 출판되며 평가받고 실질적으로 읽히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어스탐> 역시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스탐 경이 저술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임사전언은 범인을 밝힌다는 실용적 의도와 죽기 전 최후의 걸작을 남기고 싶다는 예술적 의도가 섞여 있다. 매일 밤마다 어스탐 경이 써내린 글을 탈고하고 필사하는 유레솔은 작가와 가장 맞닿은 자리에서, 글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장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문화 역사의 의미에서 이 글을 반드시 확보하고자 하는 여러 도서관 사서들은 모든 현실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약간은 어리숙한 방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리고 이 글의 재미에 푹 빠진 독자들은 그 안에서 어스탐 경이 제시하는 인물 이해의 얕고 깊음을 느끼며, 글의 완결을 보기 위해서라도 임사전언의 완성을 기다린다. 여기에 이영도 식의 아포리즘 가득한 귀족 문화와 유머 감각이 덧붙여졌고, 세속을 초월한 절대적인 기관으로서 크툴루 신화가 덧붙여졌다. 


이 틀 안에서 글쓰기에 대한 온갖 문제가 뒤섞인다. 현실의 사건을 추리소설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창작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거짓 정보를 준다고도 말할 수 있는 창작물에 윤리적 문제를 따질 수 있는지, 자원을 써서 탈고하고 출판까지 이어지는 현실적 사슬에서 검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글과 작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가 글에서는 어느 정도로, 작가에게는 어느 정도로 이어지는지 등. 글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는 크툴루 신화스러운 도서관의 존재가 특히 인상적인데, 여기에는 여러 층위의 상징이 깃들어 있다. 전제군주 혹은 일종의 대중독재 치하 밖에서 책을 출판하는 암스테르담, 소련의 검열을 피해 굴라그의 실상을 알1리고자 하는 솔제니친의 서방 출판과 이를 비판하는 샬라모프, 유색인 남성으로부터 유색인 여성을 구하는 백인 남성. 이질적인 공포스러운 존재의 친밀성, 단칼에 끊어내기 힘든 인간 사회의 비틀린 인과 관계와 그 위에서 부유하는 행정적 어휘. 단요의 <제발!>은 이 주제를 짧고 강렬하게 다루고 있는데, 버려진 메마른 땅과 엘리트 사회의 소명을 받은 개인 사이의 관계가 남아 있는 이들의 비장함과 소명받은 이의 기술적인 통속성이 대비되며 고소를 머금게 만든다.


그리고 윤리와 정치에서 벗어나자면, <어스탐>에서 계속 중요한 방점이 찍히는 것은 '무엇이 좋은 글이냐?'는 단순한 질문이다. 어스탐 경의 애독자이던 눌드 경의 지적은 처음부터 무거운 한방을 날리는데, 현실의 무작위성과 불규칙성 덕분에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는 글은 순수한 창작물보다 안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스탐 경과 마찬가지로 작가인 동생 세티카 경은 글이 곧 작가이며 작가가 곧 글이라는 의견을 늘 강하게 피력하며, 임사전언이 기본적으로 어스탐 경의 시선에서 그려내는 주변 인물의 삶과 심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일종의 상징적 오토픽션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세티카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기는 힘들다. 또한 그 '글'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냐는 질문도 이어지는데, 임사전언은 작성되던 중 기존의 작성분을 내버리고 중간에서 다시 시작하기도 하며, 모든 글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는 유와르 사서는-크툴루 신화의 신비스럽고 저주 담긴 글쓰기의 맥락에서-임사전언의 사본 뿐 아니라 임사전언을 읽은 이가 다시 작성하는 임사전언 및 그 읽은 이의 기억 자체가 임사전언이라는 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 않냐는 주장을 펼친다.


허나 <어스탐>이 이런 주제의 다발로 끝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이, <어스탐>의 매력이라는 게 문제다. 이 틀 안에서 더스번과 사란디테, 눌드와 그 부인, 스벤터, 유와르 사서, 세티카 등의 인물들이 기상천외한 하이판타지를 벌이는 서사는 그 자체로 재밌으며, 이 부분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만신전의 기사가 혹여 자신이 남긴 글이 일종의 성유물로 취급받을까 모든 전언을 사람의 목소리로만 전달하거나, 발도술을 연습하던 무적경이 사흘 전의 상대를 벨 수 있게 되거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것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어스시 연대기>와 크툴루 신화의 기묘한 조합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다분히 장르적인 것이며, 사실 글쓰기에 대한 글의 매력만큼이나 협소한 독자를 위한 매력이다. 이 매력은 판타지 및 호러 소설을 잔뜩 읽은 사람이 포착할 수 있는 미묘한 매력이며, 애석하게도 나는 그 점에도 어느 정도 부합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로 인해 이 매력을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추천하기도 힘들다. <어스탐>은 분명 내용으로도 형식으로도 매력적인 글이며, 누군가에게는 내용으로도 형식으로도 매력적이지 않은 글이다.


아마 여기서 잠시 형식, 더 정확하게는 필체의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브릿G에서 한때 포스트-이영도라는 호칭으로 밀어주던 판타지 소설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있는데, 당시에 나는 이 글이 이영도의 서사적 재미 대신 필체라는 껍데기만을 너무 모방한 듯한 글이라고 생각해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사실, 그 필체도 장점보다는 눈에 띄는 단점이 더 비슷한 필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단순한 말을 괴상하게 행정적 수식어로 꼬아서 장황하게 말하는 대화문이 나름의 매력이 될 수는 있지만, 장점이라고 어필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법이다. <어스탐>을 펼치고 몇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그 평가가 이중으로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건 잘만 쓰이면 확실히 읽는 재미를 주는 농담이고, 또 반대로 이영도의 글쓰기가 이미 <피어클리벤의 금화>에서 보여준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그러니까, "하?" 같은 대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커뮤니티에 익숙해졌다는 것기에 그 둘이 확실히 유사하다는 것. 서사 역시 더 이상 <드래곤라자>나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같은 거대서사가 아니며, 그 주제 역시 순수한 철학이라기보다는 윤리처럼 일종의 응용철학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서, <어스탐>의 내용과 형식에서 둘 다 매력을 느끼지 못한 이는 <어스탐>을 <피어클리벤의 금화>처럼 읽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둘 사이에 있는,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좋지 않지만 <어스탐>은 좋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경계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