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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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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G. 제발트의 <이민자들> 속에 등장하는 이민자들은 화자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어떤 눈(目)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에 둘러싸인 인물들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종종 안개 너머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실루엣과 같은, 도리어 안개 속의 인물들이 화자에게 일부러 건넨 듯한 흔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진이다.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관하여,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텍스트 안에서 사진이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이자 명백한 목적은 증명이지요. 우리 모두 문자보다 사진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진을 무언가의 증거로 내놓으면 사람들은 보통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음, 확실히 그랬겠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진의 또 다른 기능은 시간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픽션은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예술이고…(중략)…그러한 서사 형태에서 시간의 흐름을 붙들어 두는 것은 아주, 아주 어렵습니다.”

 증명과 포착. 그것이 작가가 활용하는 사진들의 목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진은 ‘증명’이라는 ‘현재’와 ‘포착’이라는 ‘과거’라는 시간을 품고 있는 매체이다. 이 중에서 ‘포착’이라는 기능에 좀 더 주목을 해보고자 한다.

 어느 대상의 사진을 한 장 찍는다고 가정해보자. 사진 속의 모든 피사체는 사진을 보정하거나 모종의 이유로 사진 자체가 손상 및 소멸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작가가 말한 ‘포착’의 순간이다. 하지만 현실도 그러하고, 픽션에서도 그러하듯이 시간은 움직인다. 시간의 움직임과 과거의 정지된 한 시점이 맞물리면서 사진 예술 특유의 멜랑꼴리한 상념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런 상념을 활용하여 자신이 주로 다루는 주제(죽음, 폐허, 애도 등등)에서 발현하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런 희미함 속에서 각각의 이민자들의 등장하는 방식들을 살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명의 인물들은 각각 어떤 방식으로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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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헨리 쎌윈 박사>
: 정원의 남서쪽에 넓게 드리운 그늘 아래 어떤 사람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장<파울 베라이터>
: ‘…파울이 말하는 소리가 먼 데서 전해져 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내가 때맞춰 왔다고 했다.’

3장<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던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다.

4장<막스 페르버>
: 그리고 1940년대 말부터 매일 열시간씩, 일요일도 거르지 않고 작업하는 화가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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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누군가를 망연하게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영영 잊혀버린 것 같기도 하다. 세상(고향)에서 ‘제외’된 상태로 제시된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상태에 너무 익숙해진 듯도 보인다.

 그들의 상태를 다시 바라보자. 고향을 떠나온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시차’를 분실해버린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고향의 가족들과 다른 시차에서 살아가는 그들, 가족들이 잠을 자며 꿈을 꾸는 동안 반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종종 그들 자체가 누군가의 환상이 되어버린다.

‘<97> 이상하게도 나는 암브로스 외삼촌이 린다우에서 증기선을 타고 달빛이 비추는 보덴 호수를 건너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본 것만 같구나.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이민자들, 그들 자신은 그들의 ‘과거’라고 할 수 있는 고향에서 잊혀지고(혹은 고향이 이미 너무 개발되어 그들 자신이 잊어버리고), 그들이 찍힌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조차도 포착이라는 기능의 수행을 통해 ‘미래’에서도  ‘과거’에 머물러버리는 한없이 고독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몇 개의 기억만을 가지며 살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그 기억은 구.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파괴이기도 하다.

‘<185>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은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이민자들의 삶을 글과 사진을 통해 그려낸다. 어떤 메시지나 교훈을 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기린다는 표현도 어쩐지 애매하다. 그저 기록할 뿐이다. 나는 여기까지가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기록된 글과 사진을 따라서, 죽은 자들은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것이 사자(死者)의 방식이다. 제발트라는 작가는 이미 그 방식을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34>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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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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