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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이에게 보내는 하나의 문자 메세지다.


사실적이지도, 그렇다고 현실과 동 떨어지지도 않은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성은 고독이다. 본래 인간이란 생명의 갯 수는 하나이며, 즉 하나의 인간은 고독만을 들어내기 일수다. 그런 인간이, 아님 그런 생명이 구조를 만들고 사회를 이룬다는 사실은 어쩌면 외롭다는 감정과 좀 더 발전해야 한다는 기초적인 이성으로 부터 나온 하나의 정답이다. 때문에 인간의 고독은 사회로부터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무리에 살아감으로써 그 고독을 확실하게 느낀다. 마치 모든 인간이 똑같은 성질을 가진 개체가 아니기에, 그 차별점이 심장에 꽂힌다면 인간은 심히 무리에 환멸을 느끼고 고독이란 것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본성의 정답은 무리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본성에 다가가면 외롭다는 감정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란 것은 <아무나>의 한 사람이거나, <누구나>의 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이, 우리의 경향이다. 아무런, 나, 누구도, 나. P. 230 ~ 231, <대왕오징어의 기습>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게 아니란 사실을 -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P. 286 ~ 287, <갑을고시원 채류기>


허나 그런 고독은 또한 오랜 시간 삼키고 있으면 그건 독이 된다. 때문에 그리워하던 고독을 삼켜 독으로 변한 그 악랄한 모습을 본 인간은 다시 사회로 돌아간다. 그러다 다시 고독을 그리워 해 그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신의 성질에 곧 자신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정체성의 고민을 하게 만든다. 고독에 머물 수 없고, 무리에 머물 수 없는 나약한 생각은, 보통 고통이라는 느낌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기초적인 시스템이었다. 물리적인 고통이나 심리적인 고통을 입는다고 생명에게 들어오는 이득은 없다. 고통은 손해뿐이라는 간단한 산수에서 인간은 어떻게 고통을 맞자라는 정답을 알게 된 것일까? 사실 우리는 살면서 고통 자체를 영원히 피할 순 없다.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방법은 바로 고통 자체를 부정하고 성장으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말한 유명한 명언 중,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처럼, 우리는 이 상처를 훈장으로, 그리고 앞으로 나간다는 지양의 거름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처럼 합리화란 것은 때론 살아가는데 기발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석현아, 누군가는 말이다.

지양해서, 지양해야 하는 것 아니겠니. P. 197, <코리언 스텐더즈>


안 돼, 다시 내가 소리를 질렀다. 원반들이 물러선 그곳은 바로 옥수수밭이었다. 누가 먼자랄 것도 없이 우리는 옥수수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달리면서 알 수 있었다. P. 207, <코리언 스텐더즈>


하지만 부정이야 말로 한 인간에겐 말이 안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느낀다는 것을 다른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행동은 그 자체로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 인간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고, 우리는 그런 생각을 사방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 벌기도 바쁜 현대인들은 그런 소리를 믿지 않는다. 물질만이 고통을 만들고 행복을 만든다고,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결국 물질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고독해진다. 그래서 사회가 싫어진다. 하지만 고독이 물질에게 가장 취약한 것을 알기에 다시 사회로 뛰어든다. 이러한 방황은 20세기든 21세기든 자본주의라는 사상이 머무는 만큼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그들은 전에 말했던 합리화를 대신 다른 단어로 바꾸어 말한다. 그건 바로 계산이다. 무엇이 나에게 더 이득을 주는가?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인생을 나아가지만, 때론 불안정한 인간은 쉽게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느새 거울에 비친 오류 투성이인 한 인간을 보게 되면, 자신은 전과는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외롭다고 느껴진다.


실은 그 동안 그나마 아주 잘 걸어왔다는, 아니 달려온 거라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사라질 엄마의 봉급, 여전한 할머니의 약값, 발생될 엄마의 치료비… 아버지의 눈동자가 그토록 잿빛이었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뭐랄까,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깨진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다. 이제, 계산이 안나온다. 나도 게산이 서질 않았다. P. 84,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그렇게 다시 고독으로 변했다는 자신을 보다 보면, 꽤나 복잡한 세상의 자신을 볼 것이다. 나라는 것 자체가 이리도 복잡한 것이었는데, 세상을 쉽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이게 다 사회와 사장, 그리고 정부의 거짓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문뜩 외롭다는 감정은 더욱 심해지고 이제 그 쌓인 불순물을 닦아내고 싶은 것, 위로가 원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사람의 말은, 힘내라 같은 말이나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들 그것은 너무 보편적이고 간단하다. 사람의 말이란 즉 형식은 그럴듯 해도 속은 완전 딴판이다. 외로움은 야생의 짐승처럼 예민해 그런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바로 위로를 찾아낼려는 긴박함이다. 우리는 남들의 진심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스스로 합리화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해야한다. 그것이야 말로 상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가장 좋을 방법일지 모른다. 그 안에서 오해를 굳이 찾는 방법 보단 사랑이란 해답을 찾는게 이 차가운 나날에선 가장 인상깊은 경험일지라.


분명, 지금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을거야.

냉장고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충분한 공감이었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P. 22,<카스테라>


죽은 인간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우주로 올라가겠지. 무엇보다 영혼은

성층권이라는 이름의 냉장고에서 신선하게 보존되는 것이니까.

그러다 때가 되면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거야.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추웠을 테니까.

많이 추웠을 테니까 말이다. P. 32 ~ 33, <카스테라>


박민규 작가는 표절 문제부터 해서 특유의 환상성과 글의 문체로 많은 독자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다. 나도 작가의 표절과 <지구영웅전설>의 겉면만을 보고 이 작가는 안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편집 <<카스테라>>만큼은 다르다. 만일 박민규 작가가 내놓은 작품이 오직 이것이었다면, 난 박민규 작가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무겁지 않은 문자 메세지 같은 소설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잘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문뜩 이 소설에게 발송된 스팸같은 문자를 받고 하루를 다시 살고 싶다는 용기를 얻는다. 무척 아이러니 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