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한다는 것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사실 차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사물의 실제적인 측면이다. 즉 사물들에는 가장 고유한 동시에 가장 공통된 것이다.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동일성을 포함한 모든 것은 이 차이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 차이를 동일성에서 출발해 잘못 설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 동일성은 차이의 최소치에 불과하며, 결국 일종의 차이, 그것도 극히 드문 종류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휴식이 운동의 한 경우에 불과하며, 원이 타원의 특이한 한 변종에 지나지 않은 것과 같다.
원초적인 동일성에서 출발하는 것, 이것은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없는 단일성, 서로 다른 동시에 유사한 다수의 존재들 간의 있을 수 없는 우연한 일치, 또는 단 하나의 단순한 존재가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분할되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처음부터 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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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식, 혼,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영원한 요소의 일시적인 승리를 가리킨다. 이 영원한 요소가 이례적인 은총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소에서 생겨나 동료들을 지배해 자기 신하로 만든 다음, 이들을 자신의 법(선인들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자신이 약간 수정하거나 자신의 왕 인감sceau royal이 찍힌 법)에 얼마 동안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정신적인 정복자의 점차적인 또는 갑작스런 폐위, 자발적인 또는 강제적인 양위를 가리킨다.
아르벨라Arbelles 전투 후 다리우스 Darius처럼, 워털루Waterloo 전투 후 나폴레옹처럼, 또는 유스테Yuste 수도원에 은거한 카를 5세나 데살로니키Thessalonique에서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en처럼 그 정신적인 정복자는 자신의 모든 국가를 잃고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자신이 나왔던 무한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리워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태어난 무한소, 확실히 불변적이지도 않으며 또(누가 알겠는가?)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무한소로 말이다.
그러므로 내세도 무無도 말하지 말자. 속단하지 말고 비非생non-vie을 말하자. 비-생도 비非자아non-mo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비非존재non-etre는 아니다. 죽음 이후의 존재 가능성에 반대하는 몇몇 철학자의 주장이 외부세계의 실재성에 반대하는 관념론적 회의주의자들의 주장보다 더 유효한 것은 아니다.
생生이란 모나드들에게 부과된 고통스러운 학교 시험이나 훈련 시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힘들고 신비한 학교를 떠나면, 모나드들은 예전의 보편적인 지배욕구에서 벗어난다. 뇌라는 왕관을 일단 잃어버린 모나드들 중에는 다시 거기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 별로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자신의 고유한 독자성으로, 자신의 절대적인 독립성으로 돌아간 모나드들은 기꺼이 또 영원히 육체적인 능력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 모나드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이 빠져버린 신적인 상태, 즉 모든 악과 모든 욕망에서 ー 나는 모든 사랑에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ー 벗어난 상태,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숨은 선언을 지녔다는 확신을 영원히 맛본다.
죽음은 그런 식으로 설명될 것이다. 생도 이런 식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욕망의 정화로 말이다... 그러나 가설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친애하는 독자여, 형이상학으로의 나의 이러한 방탕을 용서해줄 수 있겠는가?
—가브리엘 타르드, 모나돌로지와 사회학
개인적인 올해의 책 후보
내용 좋네. 개인적으로 단자론이 전반적으로 좋은듯...
아니 생각해보니 저번에 올렸던 내용인가
머가 이리 어렵노..
나도 오늘만큼은 모나드로 존재하고 싶구나
따르드 베르그송이 좋아했던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