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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그 유명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었다. 책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므로, 기본적인 정보와 인상적인 부분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모비 딕』은 동명의 거대한 고래가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상 이 작품이 다루는 범위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을 단순히 '에이헤브 선장과 선원들의 모비 딕 퇴치를 위한 여행기' 정도로만 요약하는 것은 적잖이 부조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 작품이 모험 소설은 맞다. 모험 소설로서 쓰인 이유는 멜빌의 작가 경력이 모험 소설로 시작된 데에서 유래 되었을 것이다. 그는 본래 『타이피』, 『오무』 등의 모험 소설들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마디』라는 소설부터 단순한 모험 소설가에서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작품을 쓰는 유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의 절정이 이 『모비 딕』이라고 알려져 있다.
『모비 딕』을 심오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문체이다. 이 작품의 문체는 평범한 모험 소설과는 다르게 마치 서사시처럼 장엄하다. 두번째는 인용 및 모티브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 시작부터 인용의 발췌들이 나열되고 있다. 이는 작품에 대해 일종의 가상의 공신력 등을 제공하는 효과를 준다(비록 실제로 작품과의 직접적인 연관을 나타내는 인용만 있지는 않지만, 문학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라고 보면 지적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에른스트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에서 이와 유사한 장치들이 등장하는데, 그 효과 역시 유사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적인 상징이 굉장히 방대한데, 이는 작품에 일종의 신화적인 방대함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인명, 선명, 대사 등에서 이러한 경향은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실상 이것이 모비 딕을 평범한 모험 소설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주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인 "나를 이슈마엘이라 부르라." 역시 이 모티브를 사용한 것이니 말이다. 세번째는 구성이다. 이 작품의 골조는 소설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유형의 작법들이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에세이, 백과사전, 극본적 구성 등이 등장하며, 이것들은 서로 교차되거나 혼용되고는 한다. 네번째는 서사이다. 물론 상기한 장치들도 모두 중요하지만, 역시나 서사 역시 장엄한 효과를 주는 데에 있어 중요할 것이다. 모비 딕을 향한 복수에 스스로의 인생을 걸고 전념했으며, 결국에는 그 대가로 파멸한 에이헤브 선장의 이야기는 작품 전반에 비극적인 감상을 부여하고 있다.
『모비 딕』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 스스로의 감상을 소개하고 싶다. 상술한 대로, 인상적이라고 느낀 부분들에 관해 소상한 평을 작성하는 구성으로 해낼 생각이다.

첫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7장 "예배당"이다. 이 장에서는 줄곧 죽음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슈마엘이 뉴베드퍼드 예배당에서 죽음에 관해 사유를 펼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슈마엘은 이 장 전반에 걸쳐 바다에서 맞는 죽음에 대한 숭고함을 내세운다.
하지만 중요한 지점은 거기가 아니다. 그의 특정한 몇몇 표현들이 가지는 의미가 중요하다. 그는 '내가 탄 배가 산산조각 나면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실제로 느끼는 감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알베르 카뮈 등으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사조와는 최종적으로 상반되는 사관(死觀)을 보여준다. 이슈마엘은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했던, '명예를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유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두번째로 나온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라는 표현은 실존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꼭 인생의 무의미와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인생의 의미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죽어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죽은 뒤에 더 크게 대성했고, 요절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추앙받고 있는 많은 선원들을 언급할 수 있다. 그들의 인생은 제 명을 살았다고 가정할 때보다 큰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더 위대한 이로 거듭난 것이 아닌가? '살아있는 상태'가 죽어 껍질만 남은 인생보다 그 의미가 얕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지프 신화』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이 아닌가?(물론 이것이 적절한지를 여기서 판단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적절성을 논할 정도로 실존주의에 능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관을 낭만주의 신조와 연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개인적으로는 다소 부적절 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사야 벌린이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어떻게 실러의 문학을 낭만주의 신조와 연결 시켰는지 생각해보자. 실러는 일반적으로 칸트 철학의 후예로 인식된다. 그런 그가 어떻게 반계몽주의 계열인 낭만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벌린은 이렇게 대답한다. 본래 칸트의 윤리학은 '이성적인 개인이라면 자신의 이해관계나 감정에 개의치 않고 항상 의무에 입각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전제를 함의한다. 하지만 실러는 이를 더욱 확장하여 자연, 혹은 인과에 맞서는 개인의 주체성으로 변환하였다. 그리고 이 지점이 낭만주의 신조(자연에 맞서는 인간 정신의 자율성)의 일부로 수용된 것이다.
이 장에서 묘사된 이슈마엘의 신념은 그에 비추어 봤을 때 어떤가? 그는 자연이나 인과에 맞서기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이 수용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사후적 이익을 기준으로 말이다. 이는 낭만주의와 상반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잘 부합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상적 지형을 형성한다.

두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1장 "잠옷"이다. 이 장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특성이 비교에 의해 드러나며,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지가 제시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지를 가지고 다루어볼 만한 것은 고통과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쾌락의 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요컨대 쾌락이라는 개념은 고통이라는 개념의 존재 여하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끝이 '고통은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니 그저 인내하라'에서 멈추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물론 상기한 대로 고통의 개념은 쾌락이 있는 한 항시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그것이 옳은 가치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층위의 판단이다. 일부 자연주의 논리의 신봉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모호하게 넘기고는 한다(그런데 여러 번 이야기 했듯, 그들의 전개에는 오류가 있다. 흔히 '자연주의적 오류', 혹은 '자연에의 호소'라고 부르는 그것 말이다.)

세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7장 "라마단"이다. 이 장의 시작점에서는 이슈마엘의 정견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지구의 일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행성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이미 세상을 떠난 지주의 이름으로 여전히 방대한 토지가 소유되고 임대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주의 흉상 앞에 머리를 조아려도(...)"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는 종교 자체에 관한 묘사로 인식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실상 왕정, 성직자 등의 봉건적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이름으로 방대한 토지가 소유되고 임대된다'는 등의 구절을 통해, 묘사의 대상이 일종의 실력(구체적으로 재산)을 보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페인이 『상식론』에서 펼친 주장처럼(그는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바탕으로—첫번째로 인간에게는 생득적인 평등권이 있으나, 세습은 이를 영구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므로 자연권의 침해이다. 두번째로 현재 세대가 다음 세대의 정치적 결정을 마음 대로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러한 결정에는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대를 이어서 유지되는 법률이나 제도의 경우, 계속적인 인민들의 승인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단순히 경로의존성이라는 측면 때문에 정당성이 보장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번째로 역사 속 봉건적 권력의 탄생 과정 대부분은 자연권의 침해를 통한다. 이는 인민들 간의 사회계약을 통한 정체가 아니므로 윤리적으로 부정하다.
상기한 것까지가 페인이 제시한 근거이다.—세습 권력의 정당성을 전면 부정했다), 이는 봉건적 세습 권력에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네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24장 "변호"와 제25장 "덧붙임"이다. 이들 장은 서로 단일한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내용 상으로는 맨 앞 부분의 '발췌'와 공명한다. 이슈마엘은 이 두 장을 통해 포경선과 고래의 위엄에 관해 조명하고 있다. 그는 (다소 억지스러운 것도 몇 발견되지만 말이다. 이슈마엘은 역사적·미학적 근거를 난사하며 포경을 숭앙하는데, 그 논증들 가운데는 명백히 형이상학적 비약이나 상징화의 과잉인 경우 역시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근거를 사용해 포경업을 숭앙한다.

다섯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32장 "고래학"이다. 이 장에서 제시되는 것은 이슈마엘 자신이 말한 대로, 고래류 일반에 관한 체계적 설명이다. 그는 고래를 크기에 따라 분류하고, 이에 관한 역사나 특기할 만한 사항들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 포경선원이었던 멜빌의 약력을 엿볼 수 있다.

여섯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33장 "작살잡이장"이다. 이 장의 중심 내용은 포경선의 구성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외에 중요한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한 사람의 지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천박하고 비열한 기교와 엄폐물—그 자체는 더럽고 하찮은 것이지만—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실질적이고 유효적인 지배권을 가질 수 없다."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는 상당한 논란이 존재할 듯싶다. 왜냐하면 '결코'라고 단언할 만큼 많은 유형에서 지배 행위가 비열한 기교와 엄폐물을 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지성만으로 실질적이고 유효적인 지배권을 획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매개하는 수단이 왜 항상 비열하고 천박하며, 더럽고 하찮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공적 의사소통과 정치공학적 제도 설계를 바탕으로 '정당성'과 '실질성', 즉 유효적인 지배권을 발휘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사회적 기반을 생성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기제의 철학적인 면면들은 이 작품이 쓰인 시대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 현대에서는 로널드 드워킨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증적인 측면에서는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로버트 달이나 조반니 사르토리 등의 저명한 정치학자들에 의해) 제대로 된 이론들이 등장하게 되므로, 이슈마엘의 입장에도 어느 정도 참작의 요소는 존재할 것이다.

일곱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36장 "뒷 갑판"이다. 이 장이 그 유명한 에이헤브의 선장의 모비 딕에 대한 복수 계획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에이헤브 선장이 하는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곶을 돌고 노르웨이의 마엘스트롬을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 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다.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도 태양을 모욕할 수 있을테니까. 질투가 만물을 지배하니까, 여기에는 일종의 페어플레이가 존재하지. 하지만 그 페어플레이도 내 주인은 아니다. 누가 나를 지배하겠나? 진리에는 한계가 없어."
상기한 에이헤브 선장의 발언들은 후술할 제37장과 더불어, 그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는 이슈마엘과는 다르게 확실히 낭만주의적인 사고관을 지닌 인물이다. 이슈마엘이 자연을 수용하는 반면, 에이헤브는 그것을 정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연'이나 '인과'에 맞설 수 있다고 믿는 그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벌린이 실러의 희곡을 조명한 방향과 닮았다. 또한 그 믿음 때문에 끝내 파멸하는 그의 모습은, 계몽주의의 벽에 부딪혀 결국 절충에 이른 낭만주의의 운명을 떠오르게 한다.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의지는, 대부분의 경우 마지못해 타협하거나 아예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이미 여러 번 한 이야기지만, 중요한 것은 원리적 일관성이지 진실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견 기존 방향성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주장도, 그 근거가 체계에 비추어 적확하게 맞아떨어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납득 가능하다. 흔히 말하는 '절충'이란 바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 자체는 형식적이거나 비형식적인 오류에 속하지 않는다.

뒤이어 제시되는 제37~42장까지도 모두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 장들은 『모비 딕』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다양한 방법론(시점 변경, 희곡 구성 등)을 이용하여 에이헤브를 비롯한 다양한 선원들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비춘다(개인적으로 희곡 구성이 사용되는 지점에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율리시스』가 여전히 가장 신선한 소설 중 하나로 칭송 받는 것을 생각하면, 수십 년 앞서 유사한 기법 일부를 보여준 멜빌 역시 상당히 선구적이지 않았나 싶다.) 이는 주된 인물들의 성격을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효과를 준다. 에이헤브의 경우, 그 특유의 낭만주의적인 광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스타벅의 경우, 경건하지만 다소 우유부단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스터브의 경우, 의도적으로 주관을 버리고 흐르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소는 명백히 해당 인물들이 가진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의 몰입을 돕기에 적절하다고 본다. 적어도 계속해서 이슈마엘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유지되는 편보다는 훨씬 더 그러할 것이다.

아홉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42장 "고래의 흰색"이다. 이 장에서 이슈마엘은 다양한 예시를 통해 '흰색'이 인간의 심리에 부여하는 효과를 집요하게 탐구하고, 이를 모비 딕과 연결지어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흰색은 숭고함, 순결함 등의 긍정적 가치들을 상징함과 동시에, 창백함, 공포 등의 부정적 가치들 또한 상징할 수 있다(아무래도 모비 딕을 묘사할 때에 주로 연결되는 것은 창백함이나 공포이다.) 그는 흰색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이 모든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데에 의아함을 느낀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가 서두에서 언급한 에드먼드 버크의 미학 이론을 꺼내고 싶어졌다. 왜 하나의 색채가 서로 충돌하는 감정을 동시에 생성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에 관해 버크가 『숭고와 아름다움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에서 다룬 이론은 이렇게 답한다. 숭고함이나 고결함은 본래 그 자체로 압도적인 크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힘, 불확정성, 무한성 등에서 비롯되며, 이는 미적인 감상과는 구별된다(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유연함, 조화, 안정성, 친숙함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숭고와는 다르다.) 즉, 모비 딕은 숭고하면서 동시에 공포스러운 모순적 존재가 아니라, 숭고하기 때문에 공포스러우며, 공포스럽기 때문에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슈마엘이 묘사하는 모비 딕은 압도적인 크기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힘, 창백한 색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에드먼드 버크의 포경업 관련 연설이 제시된 것을 생각할 때, 멜빌이 이 장을 집필할 때 그의 이론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싶다.

열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47장 "거적짜기"이다. 이 장에서 이슈마엘은 '자유의지', '필연', '우연' 등의 인과적 개념들에 대해 직조의 비유를 통해 해설한다. 필연은 베틀의 세로실로, 자유의지는 가로실로, 우연은 실의 움직으로 비유된다. 주제가 철학사에서나 법학에서나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아, 우연과 자유의지와 필연—이들이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니다—그것들은 모두 뒤섞여 함께 일한다(...)우연은 한편으로는 필연이라는 직선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제약을 받고 측면에서는 자유의지가 그 움직임을 제한하지만, 그래서 필연과 자유의지의 지시를 받지만, 우연도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지배하면서 사건의 최종 형태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흔히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대립시키는 전통적 도식과 달리, 세 요소가 상호 간섭하며 한 사건의 구조를 형성한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특히 우연이 단순한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최종 형태’를 결정하는 적극적 요인으로 제시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도식적으로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다. 필연은 구조를 만든다. 자유의지는 그 구조 안에서 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건의 형상은 예측 불가능한 우연에 의해 완성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그다지 없다는 것이 아쉽다. 기껏해야 '책임능력'의 법적인 정의상, '우연'이 사건의 최종 형태를 결정한다면 법학에서 형사책임론은 곤란한 입장에 놓일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일 때는 '결과책임'의 개념이 사실상 무력화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음이 드러난다면, 모든 법적 처벌은 부조리한 조치가 된다—물론 형법이 우연의 영향을 전면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이 행위의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을 파괴함이 드러날 시, 책임은 조각된다. 다만 이슈마엘의 이론이 모든 사건에 적용된다면, 모든 형법상의 책임은 항상 조각되고, 그렇다면 항상 혐의도 조각될 것이라는 문제가 남는다.—그것은 법 체계 전반을 뒤흔들 수 있다. 형법은 책임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법이 법 체계 내에서도 상당히 기초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필연과 자유의지가 동등한 층위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점은 근대 법학과도 공명하는 지점이다. '기대가능성'의 개념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책임능력이 작동하지 못 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임'의 형성에 있어 자유의지만큼이나 필연도 중요하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평소에 라이프니츠나 프랭크퍼트 등 자유의지론과 연관이 있는 학자들을 읽어둘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든다. 특히 프랭크퍼트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했기에, 이 장과 더욱 연관이 있을텐데 말이다.

열한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74장 "향유고래의 머리—비교 연구"와 제75장 "참고래의 머리—비교 연구", 그리고 제76장 "파성퇴" 및 제79장 "대초원", 그리고 제80장 "머리"이다. 위 세 장들에서는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머리의 형태 및 특성, 그것들에서 파생되는 기능들에 대한 고찰과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슈마엘은 이러한 설명을 두고 '고래학'의 '실증연구'라고 칭함으로써, 상술한 고래학 운운 장들과의 연결점을 부각하고 있다. 특히 고래의 시야나 무게 중심과 같은 특성들을 자세히 고려하고, 이에 대한 의미나 효과 등을 도출하는 모습은 아주 독특한 대목이다(그는 고래의 감각 구조에 대한 고찰을 통해, 고래에게 지각되는 세계에 관해 추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가 매우 참신하다고 느꼈다.) 상기한 사항들을 통해, 위 세 장에는 확실히 고래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79장과 80장에서는 '골상학', '인상학' 등 자연과학보다는 자연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판단에 가까운 관점(이슈마엘은 이를 명시적으로 '유사과학'이라 칭한다)까지 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점을 근거로, 이 장들에는 확실히 고래의 종합적 분석을 통해 하나의 세계관을 도출하려는 철학적 의미가 들어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시도하는 학문적 경향을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부른다(이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막스 셸러, 마르틴 부버 등의 독어권 철학자들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은 '철학적 고래학'이라고 불릴 만하다.

열두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06장 "에이헤브의 다리"이다. 이 장에서 에이헤브는 불행이 행복보다 더 지속성이 크고, 치유되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 불평등한 관계를 가진다고 추론한다. 그리고 이슈마엘 또한 "이 명확한 추론은 뒤엎을 수 없다."라고 덧붙임으로 하여 동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복리는 해악보다 지속성이 짧고, 그래서 서로 등가적인 관계를 이룰 수 없을까? 이는 쾌락과 고통을 등가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계산에 있어 지속성이라는 요소를 도입했던 공리주의와의 충돌을 낳는 전제이다. 공리주의(구체적으로는 벤담—시즈윅에서 이어지는 계열이 그러하다. 밀은 다소 예외적일 수 있다.)는 쾌락과 고통을 동일 차원의 양적 요소로 다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계산을 허용한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강도를 고려한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확실성을 고려한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범위를 고려한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순수성을 고려한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근접성을 고려한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지속성을 고려한다.
반면 에이헤브는 지속성을 가중치가 아니라 질적 차이를 말하는 데에 사용한다. 고통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쾌락으로 상쇄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러나 고통이 본질적으로 치료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심리학이 보여주듯, 인간은 상당한 고통에도 적응하고 기준선을 회복한다. 게다가 쾌락 역시 반대되는 방향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감각이 등가적인 관계를 이룰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쾌락과 고통은 구조적으로 공통된 변수를 가지기 때문이다. 쾌락과 고통은 주체에게 좋거나 나쁨으로 경험된다. 상기한 공리주의에서의 고려 요소를 동시에 지닌다. 반복 가능하고 비교 역시 가능하다. 경험과 기대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는 점 역시 공통적이다. 즉, 쾌락과 고통은 질적으로 다른 감각이 아니다. 가치평가의 방향이 서로 역을 이루는 현상군일 뿐이다. 따라서 에이헤브의 단언보다는 여전히 기존 철학이 더 높은 설명력을 지닌다는 걸 알 수 있다.

열세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19장 "세 개의 불꽃"이다. 이 장에서는 에이헤브의 광기가 다시 한 번 여실히 드러난다. 에이헤브는 바다와 파도, 불꽃, 번개 등의 자연물들을 의인화 하고, 이들과 자신의 대립은 운명적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원리에 대항함으로 하여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사고관을 재서술한다. 다만 멜빌이 이 신화를 묘사하는 방식은 찬미와 경계가 동시에 작동한다. 에이헤브의 강박은 숭고의 미학으로 포장되지만, 결국은 자기파괴적 맹목으로 귀결되며 공동체와 자신을 파괴한다. 따라서 이 장은 낭만적 영웅서사의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읽혀야 한다.
그와 동시에 낭만주의적 자유관의 극단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에이헤브는 이 장에서 끊임없이 "맞설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없다" 등의 어조를 반복한다. 이는 그의 가치관이 성취를 이루겠다는 최종 목표보다는 투쟁이라는 강박으로 옮겨갔음을 조명한다. 자유는 선택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에이헤브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그는 이미 선택을 끝마친 상태이다. 그 이후의 모든 행위를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반복해서 정당화를 시도할 뿐이다. 자연과의 대결을 통해 자유를 획득한다는 낭만주의의 신조는, 일정 지점을 넘으면 자유가 아니라 강박으로 환원된다는 점을 매우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라 하겠다.

열네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23장 "머스킷 총"이다. 이 장은 스타벅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그와 에이헤브의 대립, 그리고 결국에는 무력하게 복종하는 스타벅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있다. 스타벅은 앞선 장들에서처럼 에이헤브의 방향성에 대한 불만과 우려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를 저지하는 데에는 실패하게 된다. 결국 이는 모두의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우리는 이 장에서 한 가지 중요한 윤리학적 질문을 도출할 수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모두를 죽게 만든다면 그래도 옳은가?" 하는 질문이다. 나 또한 스타벅과 같은 원리주의적인 윤리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단지 나의 대답에서 이어지는 행위와 스타벅의 대답에서 이어지는 행위가 서로 다를 뿐이다. 물론 나였다고 해도 에이헤브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를 제압하고 다른 모든 선원들을 구하는 데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했을 것이다. 나는 스타벅이 "에이헤브를 저지하는 방법은 그를 죽이는 것 밖에 없다. 나는 그를 쏘거나 혹은 저지하지 않는 행위만 할 수 있다."라는 거짓 딜레마에 휩싸여서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에이헤브를 실질적으로 무력화 시킨다면, 피쿼드호는 파멸의 여지를 현저히 낮출 수 있었을 것이다.

열다섯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25장 "측정의와 줄"이다. 이 장에서는 에이헤브와는 대조적으로, 공포 때문에 미쳐버린 핍의 광기를 보여준다. 이 장에서 핍이 보여주는 모습은 『율리시스』의 블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리멸절하다. 요컨대 그는 에이헤브처럼 목표를 향한 광적인 흥분을 보여주기보다, 두려운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 횡설수설 거리는 행태를 보여준다. 에이헤브는 이러한 핍의 모습을 동정한다. 그에게서 자신의 또 다른 가능태로서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이 점은 에이헤브의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된다.) 그리고 관찰자들은 이를 미치광이들의 모임으로 치부한다. 핍의 광기는 에이헤브와 다르게, 『고도를 기다리며』 등의 모더니즘 작품에서 묘사되는 강렬함과 유사하다. 에이헤브의 광기는 여전히 서사의 중심으로서, 본질적으로 서사적이다. 하지만 핍의 광기는 그렇지 않다. 핍은 모더니즘 문학의 광인들처럼 서사를 파괴하는 지리멸절함을 보여준다. 에이헤브의 강렬함은 폭력적이다. 하지만 핍의 강렬함은 그렇지 않다. 핍은 이미 인격이 붕괴된 허무한 상태에서 표출되는 비일상적인 강렬함을 보여준다. 『모비 딕』은 매우 서사적인 소설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이 장의 독특함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은 125장을 매우 특별하고 인상 깊은 부분으로 만들어준다.

열여섯번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제134장 "추적—둘째날"이다. 이 장에서의 선원들에 대한 조명은 에이헤브라는 개인의 광기를 넘어, 광기가 집단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들은 서른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그들을 태우고 있는 한 척의 배는 온갖 잡다한 것이 모인 것이고, 그것들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하나의 구체적인 배가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중앙에 긴 용골이 배치되어 균형과 방향성을 부여해야만 물 위에 뜰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원들의 다양한 개성—이 사람의 담력, 저 사람의 두려움, 죄와 결백—이 하나로 융합되어 그들의 지배자이며 용골인 에이헤브가 가리키는 대로 숙명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이는 마치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민족과 국가를 유기체화 하는 방식과 유사하며(슈펭글러는 전통적 국가 유기체설을 지지한다. 그는 개인을 세포로, 민족/국가들의 세포들의 종합인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한다. 또한 이 민족이나 국가의 방향성은 중심적 원리에서 부여된다고 설명한다. 즉, 이 장에서의 이슈마엘의 분석은 에이헤브라는 용골의 목적이 하나의 방향성이 되어 피쿼드호를 유기체화 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근본적으로 로버트 팩스턴이 정의한 파시즘의 개념에 부합한다(팩스턴에 따르면 파시즘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할 때 성립한다. 첫째로 파시즘은 개인적 권리보다 집단의 사명을 우선한다. 둘째로 파시즘은 내부 분열을 제거하고 단일한 의지를 강조하는 데에 힘쓴다. 셋째로 파시즘은 합리적인 기제보다 운명•사명•의지 등을 강조한다. 넷째로 파시즘에서 지도자는 사명의 도구이자 화신으로 비유된다.) 즉, 에이헤브는 낭만주의적 개인을 넘어 한 명의 파시스트 지도자와 유사한 인간이 된 것이다.
또한 "나는 운명의 부하에 불과해. 운명이 명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라는 구절은 이전에도 다룬 에이헤브의 강박을 가장 극단적으로 요약한다. 이 구절은 비가역성과 결단의 필연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파시즘과 상당한 수준의 공명을 보이고 있다.
그는 결국 낭만주의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집단적 광기의 중심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러한 상태의 피쿼드호는 결국 제135장인 "추척—셋째날"에서 궁극적인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배는 완파되고 이슈마엘을 제외한 모든 선원은 바다에 잠겨 죽는다. 그리고 이슈마엘은 "에필로그"에서 이를 담담히 회상한다. 끝내 도망친 모비 딕의 생사여부는 알 수 없는 상태로 이야기는 끝난다. 에이헤브의 복수가 성공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아 점차 썩어 없어졌을 에이헤브 자신조차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