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p
-공간은 그 기억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보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현재에만 머물도록 처단하는 셈이 될 것이며-
물질과 기억의 1장부터 상세하게 설명이 될 중요한 문구가 나온다. 베르그송은 말년에도 자신이 직접 쓴 작품들을 보고 또 보면서 수정을 했기 때문에 작품의 전체적인 윤곽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훗날 수정한 건 아니고 시론을 쓸 때부터 베르그송의 탐구 방향이 잡혀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다. 이건 후술.
136p
-'상호 침투'하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어 서로 '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 상들은 수와는 아무 유사성이 없게 되며, 우리가 구별되지 않는 다수성, 또는 질적인 다수성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는 순수 지속의 상을 얻을 것이다.-
<시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호 침투', '유기적', '속'이다.
우선 <시론>에서만 나온 내용으로 좀 풀어보면, 순수 지속은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건 언제나 나 이외의 것으로 섞여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즉 세상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것'이 있으니까 우리 우주가 하나로 안 뭉치고 펼쳐진 상태로 있지 않겠나. 이 말을 이어가면 당연히 단번에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단번에 주어지지 않고 수없이 많은 것이 펼쳐지고 있는 중에서 우리는 살아 숨 쉰다. 그러니 어째서 유기적이라는 말을 안 사용할 수 있겠는가.
너무 바깥 이야기라고 생각되나? 사실 이 모든 것이 '속'에 대한 이야기다. 어째서 속인지는 <창조적 진화>로 넘기고 여기서는 표면상 이해에 무리가 없는 '속'이야기만 하고 넘어간다. 베르그송도 그래서 136p 하단부터 계속 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린 지금 <의식에 직접 주어진> 시론을 보고 있으니까.
140p
-내 '속'에서는 의식적 사실들의 '유기적' 조직화와 '상호 침투'의 과정이 계속되며 그것이 진정한 지속을 이룬다.-
여기서 '속', '유기적', '상호 침투'의 똑같은 어법을 의식에 초점을 두고 반복한다.
가볍게 보자 여기서 속은 내 의식이다. 시계 추의 딸깍딸깍 소리가 반복해서 울려도 우리는 금방 그 소리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의식한다. 이때 딸깍딸깍 끊어져 있던 공간의 울림은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라는 낱말이 서로를 향해 상호 침투한다. 이게 '속'에서 가능한 이유는 기억이다.
141p까지 설명은 좀 더 보충이 필요하다. 특히 삼투압.
우선 이전 회차에서 정리한 도식을 아래에 다시 적어본다.
1. 순수한 지속(시간) <순수한 이질성>
2. 공간이 개입한 지속.혼합물, 동질적인 것과 연속성이 섞인, 삼투압으로 공간화된 동질적 시간
3. 공간.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성으로 있는 공간
역주 76번을 보면 마치 2번 삼투압이 순수 지속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이 아니고 2번도 지속이라는 말이다.
역주 77번에서 정리를 우리 도식으로 바꿔서 정리하면
1. -상호 침투하는 지속을- (분해해서)
2. -거기서부터 공간과 유사한 동질적인 내적 지속이라는 관념과-
3. -지속의 각 순간들이 서로 침투되지 않고 이어진다는 관념이 나온다.-
위에 우리가 적은 1~3번의 구도와 똑같다. (이후 1번, 2번, 3번으로 말하겠음)
즉 1, 2, 3 모두 지속에서 뻗어 나온 것이며 지속의 경향을 분석한 것이다.
그렇다고 들뢰즈처럼 2번을 순수지속이라고 보면 큰일이다. 1번을 놓치고 마는 것이니까.
그러면 결국 1번 순수지속의 일원론이 아니냐? 그건 또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는 건 <물질과 기억>
이에 대해 베르그송 본문의 설명을 보면
142p
-우리는 그 진동들을 위해 우리가 동질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공간의 제4차원을 창조하며-
여기서 공간의 제4차원은 2번의 설명을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일상 말하고 있는 시공간같이. <지속과 동시성>에서 자기가 이미 30년 전에 4차원이라고 말했다고 쓴 건 이것 때문이다.
이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 현상들의 의식의 상태들과 동시에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지속은 없는, 어떤 실재 공간이 있다. 그 이질적 순간들이 상호 침투하지만 각 순간이 그와 동시에 외적 세계의 한 상태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 접근 자체의 결과에 의해 다른 순간들과 구별되는 어떤 실재 지속도 있다. 그 두 실재의 비교로부터 공간에서 끌어낸 지속의 상징적 표상이 생긴다. 지속은 그와 같이 동질적 장소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며, 지속과 공간이라는 그 두항 사이의 연결선은 동시성이며, 그것은 시간의 공간과의 교차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문을 풀어보자
편의상 우리의 1~3번 도식을 거꾸로 써본다.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정리하면
3. 현상들의 의식의 상태들과 동시에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지속은 없는, 어떤 실재 공간이 있다.=공간.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성으로 있는 공간
2. 그 이질적 순간들이 상호 침투하지만 각 순간이 그와 동시에 외적 세계의 한 상태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 접근 자체의 결과에 의해 다른 순간들과 구별되는 어떤 실재 지속도 있다.=공간이 개입한 지속.혼합물, 동질적인 것과 연속성이 섞인, 삼투압으로 공간화된 동질적 시간
그리고 이때 2와 3의 공통된 공간이라는 상징적 표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동시성에 대한 설명은
역주 79번에서 나온다.
편의상 그대로 옮긴다.
-시공의 교차점을 동시성이라 부르고 있다. 동시성을 접점으로 하여 공간 쪽에는 지속하는 공간, 즉 공간은 공간인데 그 속의 사물이 완전히 상호 외재적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서로에 침투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공간이 있으며, 시간 쪽에는 공간적인 지속, 즉 지속은 지속인데, 완전히 상호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동질적으로 펼쳐져서 마치 공간처럼 잴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공간운동은 그 양쪽을 넘나들며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전 회차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는가?
이것도 편의상 다시 옮겨 적겠다.
131p
-동일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변화하는 존재자가 스스로의 지속에 대해 가질 표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런 것이다. -
아악 머리 아파. 베르그송은 시간이 있고 그건 공간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시간과 공간이 접점을 이룬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라고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베르그송 <시론>을 잘 따라 읽어 온 사람이다. 그 의문을 풀어내는 설명을 위해서 나머지 작품을 봐야 한다. 아니 사실 <시론>만 끝까지 읽어도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독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미리 의문점을 해결하고 넘어가겠다.
우선 베르그송이 말한 그대로 시간과 공간은 다르다. 지금까지 <시론>의 설명을 쭉 읽어오면서 이걸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다고 베르그송이 '공간이 없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아니 공간이 없긴 왜 없나 지금 내가 글 쓰고 있는 이 카페는 공간이 아닌가? 아 당연히 숨 쉬고 책 보고 커피 마시는 우리 삶에 공간이 없긴 왜 없겠나 당연히 공간은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공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도 지금까지 <시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오늘 독회 시작하면서 나왔던 문구를 다시 살펴보자.
135p
-공간은 그 기억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보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현재에만 머물도록 처단하는 셈이 될 것이며-
이야 이러면 베르그송은 현대 뇌과학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거 아닌가? 요즘 뇌과학을 보면 전체적으로 기억이 퍼져 있고,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게 기억이니까 신체 어딘가에는 있는 거 아냐. 그런데 지금 공간에 기억이 없다고 하는 베르그송은 잘못된 거 아니냐.
사실 그렇지 않다. 베르그송이 여기서 기억이 있을 리 없다고 부정하는 건 오직 순수공간이다. 순수공간에 어떻게 기억이라는 게 있을 수 있겠나. 기억은 바뀌고, 왜곡되고, 포장되며, 쉴새없이 변하고 있다. 이를 부정하는 뇌과학자는 없으리라. 그러면 변한다는 건 공간에서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가? 어? 공간...이라고 생각했으면 <시론>조차 안 읽은 사람이다. 그렇다 시간이 있어야 된다. 공간만 있어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공간은 있다. 다만 시간과 다르다. 그러면 갑자기 공간이 섞여있다거나 4차원이라거나 하는 말은 무엇이고, 베르그송이 '공간'에는 기억이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할 텐데 이미 우리는 위에서 도식으로 전부 설명했다. 하지만 좀 더 와닿는 설명을 위해 동시성을 접점으로 공간과 시간은 맞닿아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된다.
이해하기 쉽게 아래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직접 주어진 실재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편의상 A가 시간이고 B를 공간이라고 하자.
이때 A와 B는 가운데 닿아있다. 이 닿아있는 부분을 P라고 하자.
위에 설명했던 123을 또또 편의상 다시 적는다.
1. 순수한 지속(시간) <순수한 이질성>
2. 공간이 개입한 지속.혼합물, 동질적인 것과 연속성이 섞인, 삼투압으로 공간화된 동질적 시간
3. 공간.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성으로 있는 공간
이때 1번은 A 빨간색이고
2번은 P이며
3번은 B 파란색이다.
이렇게만 봐도 이해가 될 텐데 좀 더 풀어보면
우리는 A를 보고 B라고 말하는 착각을 한다. 지금까지 <시론>에서 정신없이 반복해서 설명한 게 이런 착각을 분석한 것.
그리고 이를 통해 A(시간)는 B(공간)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동시성이라는 접점으로 닿아있기 때문에 닿아있는 P는 분명 서로 침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P가 A(시간)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분명 A(시간)에 포함된 부분이 당연하다. 다만 B(공간)와 닿아있는 부분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현대에서 말하는 시공간 시공간~~이런 말도 다 P다. 막말로 P가 없으면 우리는 지금 살아있을 수도 없다. 너무나 상식 아닌가. 위에서 짧게 언급한 공간에 기억이 없다는 말은 시간을 배제한 공간에는 기억이 없다는 말과 같다. 기억이 어디 저장되어있는가? 신체 어딘가에? 온전히 신체 어딘가에 저장되어서 슈루룩 하고 끄집어낼 수 있고, 골고루 관계 맺는 뇌에 분산되어 있는 공간에만 있다면, 누군가 헤집어서 원하는 걸 딱 끄집어낼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질 못하는가. 공간에 있다는 건 그런 거 아닌가? 말이 공간이지 실은 공간을 앞세운 시간을 말하고 있었던 거 아니냐는 말은 현대에도 유효한 지적이다.
다시 돌아와서
<지속과 동시성>에서 상대성 이론이 P를 보고 A를 설명하려 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A를 보고 P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P에서 A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상대성 이론을 온전히 부정하는 건 학문하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베르그송에게 학문이란 위의 그림 APB를 어느 하나 배척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하지 않고 전부 설명하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그것이 실재니까.
이후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정신적 에너지>에서 1번(A)을 더 자세히 탐구한다.
<사유와 운동>에서는 1번의 탐구방법과 2번(P)에 대한 논의가 더 자세해진다. 베르그송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지성과 직관에 대한 이야기.
지성은 위 그림 PB를 직관은 A를 탐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관의 A가 지성의 힘없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A는 결국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삶, 즉 베르그송이 말하는 철학 하기 이전에 삶이 있다는 말처럼 P를 무시할 수 없다. 애초에 P 또한 A의 일부니까. 그래서 <사유와 운동>에서 '직관은 지성에 의해서만 전달된다.'는 문구가 나온다. 자세한 건 <사유와 운동> 독회에서...
<시론> 173p 역주 132번도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참고로 위 그림을 가지고 한 설명은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방식이다. p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오한 논의는 나중을 위해 아껴두자. 지금은 표면적인 이해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위 그림은 1번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여러번 더 튀어나올 예정이다.
즉 A 안에도
이런 구도로 접해 있는 것이 여럿 있다는 것.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도 지금은 넘어가고 다시 <시론>으로 돌아가자.
143p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결코 사물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때 사물이 원어로 chose인데 이건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 뒤에 진행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에 대비되는 일정하게 고정된 사물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chose는 아직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정의될 것이라는 말이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이미 진행progres이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공간에 점 찍어지고 우리가 chose라고 말하는 것은 유명한 별똥별의 예처럼 흔적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이다.
역주 81번을 그대로 옮겨본다.
-별똥별이 지나가면서 남긴 잔영은 별똥별이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이며, 별똥별의 운동 자체는 <야, 별똥별이 지나갔구나>하고 감탄할 수는 있지만 말로 기술할 수는 없는 어떤 운동성 그 자체이다. 운동 자체는 이처럼 말로 표현될 수가 없고 단지 직접적으로 지각될 뿐이다.
146p~148p는 베르그송이 좋아하는 제논의 역설이 나온다. 이건 뭐 지금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되지 넘어가겠다. 제논의 역설은 매 저서마다 나온다.
149p~150p
-우리는 운동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즉 외부의 변화와 우리 심리상태 중 하나 사이의 동시성을 점찍어 둔 다음, 운동이 끝나는 순간, 즉 또 하나의 동시성을 점찍어 두고 마지막으로 통과한 공간을 측정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속이 아니라 단지 공간과 동시성일 뿐이다.-
접하는 부분 동시성을 우리는 측정할 수 있다. 동시성이란 도대체 뭐길래? 이것도 베르그송을 책을 보다 보면 하나씩 밝혀질 내용이다.
150p
-지속의 간격은 오직 우리에게만 그리고 우리 의식 상태의 상호 침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하게 기억을 가리키는데 <시론>에서는 지속을 좀 더 우리 의식만의 것으로 좁혀서 보고 있다.
이건 시론이 의식에 주어진 걸 밝히는 에세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지속을 탐구하던 베르그송은 점차 그 논의를 <물질과 기억>-<창조적 진화>를 통해 우주로 넓혀가게 된다. 왜냐면 우리 의식도 우주의 일부니까. <물질과 기억>에서의 탐구도 <시론>의 의식과 마찬가지다. 가장 먼저 실재로 우리가 아주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게 바로 몸이다. 이것도 자세한 건 나중에
153p
하단에 사물 chose가 또 나온다. 여기서 chose는 이전 독회 시간에 이야기한 적이 있던 를 생각하면 된다.
153p~157p는 위에 설명했던 그림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읽으면 다 쉽게 읽을 수 있다.
157p
-감각을 가진 모루가 증가하는 수의 망치의 두드림에 대해 가질 순수 질적인 표상과 상당히 유사한 매우 동적인 과정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아름다운 예시다.
지속의 상 아래에서 수없이 두들기는 망치질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본다.
모루 위에 무언가를 올려두고 망치를 때리고 있는 '나'는 무엇일까?
이 생각은 <물질과 기억>으로 뻗어가는 시발점이 된다.
158p~159p는 이미 했던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159p
-하나는 항상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외부 대상의 동일성을 생각하지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특수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항을 더함으로써 전체의 새로운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131p
-동일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변화하는 존재자가 스스로의 지속에 대해 가질 표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런 것이다. -
와 연관해서 생각하면 된다.
역주 106에서도 또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으니 패스.
그림의 P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더 엄밀하게는 A 안에서 또 다르게 맞닿고 있는 그림을 설명해야 더 쉽게 이해되겠지만, <시론>에서는 이대로만 가도 무리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어차피 P도 A니까.
160p
-우리의 자아는 그 표면으로 외부 세계에 접촉한다. 계속되는 우리의 감각들은 비록 서로가 서로의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그것들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특징짓는 상호 외재성으로부터 뭔가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표면에서의 우리의 심리적 삶은 동질적 장소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그러한 표상 방식은 우리에게 큰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2번이자 P를 말하고 있다.
이어진 설명을 보자.
-그러나 그러한 표상의 상징적 성격은 우리 의식의 심부로 파고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진다. 느끼고 열정을 발하며, 숙고하고, 결정하는 내적 자아는 그 상태와 변화가 은밀히 상호 침투하면 그것들을 공간에 펼쳐 놓기 위해 서로로부터 분리하자마자 심대한 변화를 겪는 어떤 힘이다.-
상징적 표상에서 벗어나 1번 A로 나아가는 걸 말하고 있다.
이어진 설명을 더 보자.
-그러나 그처럼 더욱 깊은 자아는 표면적 자아와 오직 하나의 동일한 인격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A에 P가 있다. 굳이 지금 설명한다고 A랑 P를 따로 떼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역주 111번
-외적인 영향의 껍질을 제거하고 순수한 우리의 내적 상태를 보면 그것이 순수지속임이 드러난다.
162p
-꿈이 우리를 바로 그런 조건하에 놓는다. 왜냐하면 잠은 유기적 기능들의 작동을 늦춤으로써 자아와 외부 사물들 사이의 교통의 표면을 완전히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이건 <물질과 기억>에서 설명된다.
162~165p는 계속 위에 그렸던 그림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쉽다.
165p 또다시 중요한 문구가 반복되므로 챙겨간다.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난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건
131p
-동일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변화하는 존재자가 스스로의 지속에 대해 가질 표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런 것이다. -
159p
-하나는 항상 자기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외부대상의 동일성을 생각하지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특수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항을 더함으로써 전체의 새로운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까지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아예 베르그송 철학을 읽으면서 외워버려야 되는 내용이다.
<시론>에서는 P라고 넘겼지만 이 P는 사실 모순이 아닌가?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게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키워드는 '기억', '생명'이다.
166p
-내가 계속 지각했고 나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그려지던 그 대상들이 결국에는 나로부터 나의 의식적 존재의 무엇인가를 빌린 것으로 보인다. 나처럼 그것들도 살았고, 나처럼 그것들도 늙었다.-
<물질과 기억>에서 설명되는 지각을 <시론>에서 얼핏 설명하고 있다.
나중에 다 읽고 돌아와서 보면 다르게 읽히는 문구니 기억해두자.
168p
-언어는 우리에게 감각의 불변성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경험된 감각의 성격에 대해서도 우리를 속인다.-
언어인에 대한 비판은 저번 독회 시간에 말한 <사유와 운동>을 참고하면 된다.
슬슬 2장이 끝나간다. 2장이 끝나가면서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이자. 앞으로 베르그송 철학의 기초가 되는 심장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으니. 우리 독회에서도 암기될 정도로 다시 써본다.
131p
-동일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변화하는 존재자가 스스로의 지속에 대해 가질 표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런 것이다. -
159p
-하나는 항상 자기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외부대상의 동일성을 생각하지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특수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항을 더함으로써 전체의 새로운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65p
-지속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난 인상과 끊임없이 수정될 인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제 결정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173p
-자아와 외부 사물들 사이의 접촉면 아래를 파고 유기적이며 살아 있는 지성의 심층으로 뚫고 들어가면.-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자아와 외부 사물들 사이의 접촉면'=그림의 P
'아래를 파고 유기적이며 살아 있는 지성의 심층으로 뚫고 들어가면'=P를 파고 좀 더 심층인 A로 들어가면이라는 말이다.
이어서 인용한다.
-일단 분해된 뒤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항들의 형태로 서로를 배제할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관념들의 포개짐 또는 내적인 융합을 보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A 속에도
이렇게 모순이 계속해서 포개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가?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로 이어질 내용이라고 수없이 반복해서 미리 언급한다. 역주 133번도 그런 이야기.
이런 개념을 토대로 다음 3장부터 자유의 문제를 살펴볼 거라는 말로 2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렇게 <시론> 2장까지 끝났다.
베르그송 <시론>을 심사하던 사람들이 주로 1장과 3장을 논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만큼 2장은 이해가 쉽지 않다. 2장은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를 미리 이야기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압축된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2장을 마무리하면서 좀 더 적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다음으로 미루겠다. 우리 독회 계획표대로 가면 재독하는 주간이 중간중간 껴있는데 그때 하면 될 일이다.
아 오늘까지 함께 시론을 읽었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논문 짜투리를(주재형,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에 대한 재고찰) 첨부한다. 들뢰즈의 그렇고 그런 베르그송 해석은 이전 독회에서도 넌지시 던졌으므로 코웃음 한번 치고, 베르그송이 직접 언급한 말에 주목하자.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은 <시론> 219p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151~152 쪽에서, 등속운동과 가속 운동을 수리적으로 분석하는 행위는, 예시로 올려준 삽화의 뜻과 같이 A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아닌 결국에 B를 전제한 A를 분석하는 행위임을 지적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음. 결국에 과학자들이 시간을 파악함이란 공간을 전제하고 파악함이고, 이것은 운동이 지나간 궤적으로 산출된 결과(모든 시간대의 운동은 같다고 전제되기에)만을 기호로 표시할 뿐 운동 그 자체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귀결은 참 절묘함...
개인적으로 베르그송을 나름대로 계승한 걸로 보이는 두 철학자 들뢰즈와 베르그송 중, 전자의 해석은 그리 좋게 보시지는 않으시는데, 후자(화이트헤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심/
@ㅇㅇ(121.140) 들뢰즈는 사실 싫어하지 않습니다. 베르그송 독회가 끝나면 이어서 들뢰즈를 할 생각도 있어서요. 다만 영향을 받아서 자기 철학을 하는 것과 베르그송이 이런 거다 라고 말하는 건 확실히 구분해야된다고 생각할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을 계승했다기보다 아예 다른 학자라고 분류되는 것 같아요. 화이트헤드 본인도 지속에 영향을 받았지만 과정과 실재에서 조금 다른 노선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외부평가도 다르다고 말하고 학자 본인도 다르다고 말하고 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화이트헤드를 보면 진짜.. 뭐랄까 이거 이미 베르그송이 한 거 신조어 잔뜩 만들어서 다시 하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단말이죠.
@ㅇㅇ(121.140) 베르그송-들뢰즈-화이트헤드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 플로티노스 구도랑 비슷하게 보여요. 다만 철학적 구도는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이고 들뢰즈가 아리스토 베르그송이 플로티노스겠지만여
아무튼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이 독회는 아무도 참여를 안 하는 유령독회라 이렇게 한분이라도 같이 읽는다는 기분이 정말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