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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5년이 막바지를 앞두고 있다. 연말이라고 금년치 독서량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보려고 나름 노력을 했는데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 같다. 내년에는 더 많은 책을 읽어보겠다 다짐하며 2025년 마지막 달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실종자 (Der Verscholl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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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던 체코 프라하 태생의 유대인 소설가이자 독문학을 넘어 전세계에 있는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대문호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 - 1924)의 미완성 장편소설 실종자를 읽어봤다. 그는 특유의 암울하면서도 몽환적인 작품세계로 많은 작가와 독자를 사로잡았는데, 나 또한 여기에 이끌린 사람들 중 하나다. 그래서 나도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카프카를 꼽으며 그의 단편선집과 그가 생전 완성하지 못한 또다른 장편소설인 소송(Der Prozess)과 성(Das Schloss)도 찾아서 읽었지만 딱 이 책만 읽어보지 않았었다.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맞추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싱가포르에 있는 한 한국 책 서점에서 우연히도 이 책을 팔고 있었다. 싱가포르 자체가 물가가 비싼 나라기도 하고 한국 책을 모두 수입해서 들여와서 가격도 한국에 비해 좀 비싼 편이었지만, 내가 한국에 자주 가는 편도 아니고 카프카를 정말 좋아하는 만큼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사서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이 책은 17살의 카를 로스만이라는 독일 소년이 고향 땅에서 하녀의 유혹에 넘어가 덜컥 아이를 갖게 되자 부모로부터 집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카프카가 한창 작품 활동을 하던 1910년대에도 경제적 성공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가는 유럽인들이 제법 많았어서 이 책이 이러한 세태를 반영한 소설로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범상치 않은 이유로 여행길에 나서게 되는 것도 그렇고 극초반부에 미국에 도착하면서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이 횃불이 아니라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서 주인공의 여정뿐만 아니라 작품 내 미국이라는 무대도 평범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작중 카를 로스만은 낯선 땅에 발을 디디면서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인해 분에 겨운 호사를 누리기도 하지만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인해 밑바닥까지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황당한 방식으로 상승과 하강을 모두 경험한 주인공이 이국 땅에서 한결같이 목격한 것은 단순 경제 체계를 넘어서 개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미지의 권력으로 자리잡은 자본주의였다. 현실에서도 그랬었지만 작중 미국은 유럽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고층 빌딩들이 우후 죽순으로 솟아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엘리베이터도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보를 거듭하는 신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만사를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며 처리해야만 했고, 그 결과 사람들은 일터에서 휴식은 커녕 간단한 인사조차 못할 정도로 숨가쁘게 일해야 했다. 극단적으로 보여지는 양상으로 업무시간 중 단 2분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해고되고 그 자리는 부품처럼 가볍게 대체되는 장면도 있다. 이러한 광경은 카프카가 세상을 뜬지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우리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고 오히려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본 1927년 보다도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네 가슴에 더 통렬히 와닿는다.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자본주의 체제의 맹점을 평생 미국 땅을 1초도 밟아보지 않았던 작가가 치밀하게 묘파했다는 점에서 새삼 카프카의 통찰력에 감탄하였다.

본작은 카프카의 여느 작품들과는 다르게 공간적 배경이 미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져 있고 벌어지는 일도 훨씬 현실적인 편이다. 하지만 전술하였듯이 작중 미국은 현실의 미국하고는 거리를 두고 있는 환상적인 공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가령 예를 들면 뉴욕 인근에 있는 허드슨 강이 무려 보스턴까지 마주하고 있다던가, 숨막힐 듯이 복잡한 구조를 갖춘 선실과 옥시덴탈 호텔도 그렇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이어지는 고층 빌딩 계단과 400명의 직원들을 천사로 분장시켜 나팔을 불게하며 웅장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오클라하마 극장의 면접장과 같이 카프카스러운 공간들이 여럿 보인다. 카프카 특유의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앞서 언급한 비대한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묘사가 같이 어우러지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교묘히 허물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카프카가 일견 이성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근대 사회에서 허점이 되는 비이성적인 면모를 끄집어내어 비현실적으로 과장해 비유하는 방식을 즐겨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은 확실히 카프카스러우면서도 그의 작품 중에서도 이질적인 면모도 있다.

마지막으로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좀 털어놓자면, 나는 카프카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꽤나 큰 기대를 안고 이 책을 펼쳤다. 그래서 초반에는 작품 자체에 이질적인 성격에 고개가 살짝 갸우뚱했었지만 갈수록 카프카 특유의 작품 세계가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됐음을 깨닫게 되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마냥 어둡고 꿉꿉한 느낌만 들었던 카프카의 다른 장편들과 다르게 모험극의 성격을 띄어서 서사적인 재미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이었다. 또 작가가 그가 써왔던 작품의 분위기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호감을 샀었는데, 본작에는 실제 작가의 성품이 반영되기라도 했는지 익살스러운 장면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나서 장편소설에도 관심이 생긴 사람이 있다면, 비록 미완성인 게 티가 나긴 하더라도 이 책을 장편 입문작으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2. 셜록 홈즈의 회상록 (The Memoirs of Sherlock Hol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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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의 의사, 소설가이자 추리 소설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아버지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 - 1930)의 단편집 셜록 홈즈의 회상록을 읽어봤다. 그간 내가 쉼없이 독서를 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같이 난이도가 어느 정도 있어서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 그래서 내 머리에 휴식을 줄 겸 다음 책으로 재밌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주제의 책을 찾다가 책장에 꽃혀 있는 셜록 홈즈 전집이 눈에 밟혔다. 마침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본지도 오래됐던 터라 시리즈 중 대표적인 단편선으로 꼽히는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서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크게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집으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에는 주인공인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의 사건 추리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모험극이나 시대극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한 편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주인공 일행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추리소설로써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시리즈에서 가장 잘 알려진 단편집인 셜록 홈즈의 모험(The Adventures of Sherlock Holmes)의 후속작 격이라고 볼 수 있는 이책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미스터리한 사건과 흥미로운 추리 과정을 담고 있다. 경마라는 특이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극히 적은 단서를 가지고도 합리적인 추론을 이끌어내는 홈즈의 추리 실력이 돋보이는 단편 실버 블레이즈(The Adventure of Silver Blaze), 사건을 수사할 때 선입견을 배제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 라이기트 수수게끼(The Adventrure of the Reigate Squire)와 꽤나 많은 복선을 주면서도 교묘히 독자들의 주의를 돌렸다가 막판에 반전을 터트려주는 단편 해군 조약문(The Adventure of the Naval Treaty)과 같이 1890년대에 씌였음에도 지금 읽어도 재밌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작에서 돋보이는 특징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주인공인 셜록 홈즈의 인간적인 면모가 제법 드러난다는 점이다. 셜록 홈즈하면 매우 지능적이고 완벽한데다 추리 기계를 넘어 이성의 화신으로 보일 정도로 초인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이 먼저 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 천하의 홈즈도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홈즈의 인간적인 모습이 곧잘 보인다. 정말로 드물게 홈즈가 헛다리를 짚는 이야기가 담긴 단편 노란 얼굴(The Adventure of the Yellow Face)도 그렇고 아예 홈즈 본인이 부주의했다고 자책하는 장면이 나오는 단편 증권 거래소 직원(The Adventure of Stockbroker's Clerk)도 있다. 그 이외에도 오리무중에 있던 셜록 홈즈의 개인사도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그의 대학시절 이야기이자 탐정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맡은 사건을 다루는 단편 글로리아 스콧 호(The Adventure of the Gloria Scott)와 그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단편 그리스어 통역관(The Adventure of the Greek Interpreter)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단편 마지막 사건(The Final Problem)에서는 홈즈가 탐정으로서 가진 사명감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좀 보태자면,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는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서 장편을 전부 다 읽었고 단편집도 하나 읽었다 보니 이 책에서 약간 반복되는 패턴 같은 게 보여서 신경이 조금 쓰였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는 재밌어도 조금 물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더 깊게 알아볼 수 있어서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다른 추리 소설을 많이 읽어오셨던 사람이라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셜록 홈즈의 팬이라면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3. 대중의 반역 (La rebelión de las mas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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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태생의 철학자, 문학평론가이자 근현대 스페인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꼽히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1883 - 1955)의 대표 저작인 정치철학서 대중의 반역을 읽어봤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는 이름이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꽤나 생소하고, 나 또한 작가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었다. 그러다 스페인 문화의 애착이 생겨 스페인어 문학과 스페인 역사에 대해 얇게나마 공부를 하다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는 사람이 근현대 스페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니까 거의 이 책만 번역이 된 상황이었는데,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이 내 흥미를 끌었다. 마침 이 책이 다룰 법한 주제가 2025년 현재에도 제법 시의적절해 보여서 이번 기회의 이 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이 책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불쑥 나타나 본래는 부유층의 여가 생활을 위해 조성된 여러 여가시설들을 수두룩 뺵빽하게 채우며 존재감을 드러낸 '대중'이라는 계급이 어떻게 출현하고 별 특별할 게 없어보이는 부류가 유럽 사회 전반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인구가 1억 8천만을 채 넘지않았지만 1800년대를 기점으로 1914년까지 한 세기 남짓만에 인구가 4억 6천만명으로 불어난 점에 주목한다. 급격히 유럽의 인구가 불어난 요인으로 작가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착과 기술의 발전 두가를 꼽았다. 전자의 요인 덕에 유럽 전반에 인권이 천부적으로 주어졌고 만민이 평등하다는 인식이 보편타당한 상식으로 자리잡았고 후자의 요인 덕에 전반적인 생활 수준과 보건 환경의 개선이 이뤄지고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분명 전술한 두 요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세월 동안 유럽에서 '선택된 소수자'들이 수많은 투쟁과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이뤄낸 인공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인구 증가를 통해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대중들은 자유민주주의와 기술 발전의 과실을 태어날 때부터 누리면서 발전된 문명이 사람의 힘으로 빚은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풍경과 같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현대 유럽의 대중은 물려받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동기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그렇다고 선택된 소수자들이 제시한 비전을 따르거나 체제에 순응했던 이전 세대의 대중의 전철을 따르지도 않고, 만인이 평등하기에 당연히 나보다 더 우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도 없을 거라는비틀린 평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대중들로 하여금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 만으로 모든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피상적인 논리에 입각하여 대중은 평범함의 범주에서 벗어난 타인들은 모조리 배제하고 법률, 절차, 충분한 토론과 같이 이성에 입각한 위계를 존중하지 않고 완전히 무시하면서 폭력만으로 정치적 견해를 투사하는데 작가는 이를 일컬어 '대중의 반역'이라고 일컫는다. 언뜻보면 작가가 엘리트주의에 경도된 오만한 지식인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한창 활동하던 1920년대 유럽에 불었던 파시즘과 볼셰비즘과 현재에도 준동하는 포퓰리즘의 양태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태생적으로 주어진 국적이나 정체성 따위에 호소하면서 낯선 집단을 배척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통찰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 수 있다.

작가가 대중이란 어떤 존재인지도 정의를 한 만큼 이 책에서는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왔던 '선택된 소수자', 즉 엘리트 계층에 대한 작가 나름의 정의도 담겨있다. 흔히 엘리트라고 하면 태어날 때부터 좋은 환경을 누려왔던 귀족이나 부르주아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혈통으로 세습되는 통속적인 엘리트의 정의를 배격한다. 그가 말하는 엘리트란자신에게 아무런 부담도 지우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자기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책임감을 갖추고, 얄팍한 미혹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에 내재한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탐구해 나갈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현대에 들어서 엘리트 계층으로 두각을 드러낸 소위 '전문가' 그룹에 대한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산업화와 기술의 발전을 겪으면서 학문에서도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 학문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이렇게 세분화된 분야에 대해서만 정확히 알고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전문가들이 현대에 들어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도 문외한인 분야에 대해서도 마치 본인의 전문 분야인 것처럼 아는 체하며 학문적인 오류를 저지르고 시류와 대중에 영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세상을 뜬지 80년이 다되가는 지금에 들어서도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지만 고대사에 손대어 역사왜곡을 저질렀던 이덕일 교수라던가 심리학을 전공을 했지만 반PC 열풍에 편승해 정치와 철학 분야에서도 엉터리 주장을 하다가 학계의 지적을 받은 조던 피터슨 교수 같은 사례를 보면 작가의 분석이 요즘까지도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내 사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엘리트주의에 개인적으로 온전히 동의를 하지는 않는다. 또 본저가 1920년대 스페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지의 정기 연재 칼럼을 갈무리한 책인 만큼 다분히 서양 중심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전개되는데, 2020년대를 살아가는 동양인인 나로서는 이질감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술하였듯이 중우정치, 전체주의와 포퓰리즘을 향한 작가의 준열한 비판에는 작가의 뛰어난 통찰이 담겨있고 냉철하면서도 치밀한 논리가 그의 주장을 뒷받친다. 지면상의 이유로 자세히 다루지는 못했지만 대중 여론과 매커니즘과 국가가 형성된 원리를 설명하면서 같이 언급되는 저자 본인만의 존재론도 꽤나 인상 깊었다. 학자가 집필한 저서인 만큼 문장이 좀 딱딱한데다 번역도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주제가 간명하고 논리정연해서 정치철학서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쉬운 편이고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 책에 관심이 생겼다면 꼭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4. 농담 (La Plaisant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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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브르노 태생의 소설가이자 비록 체코인이었지만 정치적 박해로 인해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정착하며 체코어로 썼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이후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했던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 2023)의 데뷔작 농담을 읽어봤습니다. 사실 내게 있어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이하 참존가)을 읽어보고 나서 정말 마음에 들었던 나머지 세 번을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지만 정작 다른 책을 구해보자니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에 이끌려 우선순위에서 좀 밀렸다. 그렇게 쿤데라라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 탐구 해보길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 날 이 책을 꽤 좋은 가격에 중고로 팔고 있는 걸 발견했습다.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싶어서 망설이지 말고 사서 읽어봤다.

이 책은 공산당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루드빅 얀이라고 하는 한 열성적인 공산당원이었던 대학생이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여자 학우를 골려주려고 짓궂은 농담이 적힌 편지를 보냈다가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편지의 내용이라는 게  '나는 트로츠키주의자이며 낙관주의자는 아편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풍자조로 조선중앙티비 아나운서를 따라하거나 김정은 치켜 세우는 정도의 농담으로 치부할만한 내용이지만 하필이면 스탈린주의와 냉엄한 전체주의가 사회 분위기에 짙게 드리운 50년대 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포착된 터라 루드빅은 결국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대학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후 루드빅에게는 정치범이라는 딱지가 붙어 고생을 꽤나 한다. 주인공이 겪는 생고생에는 작가 본인이 몸소 체험한 일도 있어서 어느 정도 자전적인 성격도 있다. 쿤데라도 1947년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원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적이 있었지만, 해당(害黨) 행위를 했다는 석연찮은 고발로 인해 1950년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후 고역을 치르다 1956년에 간신히 복당했던 과거가 있었다. 루드빅이 쓴 몇 마디 문장을 가지고 어떤 비판적 사고도 없이 그를 거침없이 끌어내린 대학 학우들을 통해 작가는 맹목적으로 시류를 따라 우르르 몰려 다니는 군중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루드빅이 공산당 축출 후 그가 마주하는 같은 정치범들도 사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주류와는 다른 면모 때문에 반동으로 몰렸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용납치 않는 전체주의의 폐해도 거침없이 고발한다. 여러모로 작가가 또다른 작품인 참존가에서 어떤 객체를 보며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고, 무슨 이유로 떠올렸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얄팍하고 맹목적인 이미지로 등장하는 개념인 '키치'가 연상되었다. 꽤 초기작부터 작가의 사고관이 탄탄히 잡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작에서 괄목할 만한 특징으로 서사가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일직선상으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을 통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이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루드빅 뿐만 아니라 그의 내연녀이자 감성적인 면모가 있는 헬레나, 그의 동향 친구이자 몽상적인 민속 전통악단 연주자 야로슬라프,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자 특이하게도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병원 직원 코스트카의 시선에서도 진행된다.그래서 책을 읽어가면서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춰나는 듯한 인상도 들었다. 그리고 4명의 인물이 다들 사상과 관심사도 다른데다 술회하는 말투마저도 달라 각 파트의 문체가 확연히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덕에 이 책의 스토리를 다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루드빅을 제외한 3명이 시선에서 루드빅의 인간적인 결함도 가감없이 드러나다 보니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을 단순 피해자로 동정심만 갖고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한 인물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본인의 작품에 해설 한 줄도 싣지 말라고 하며 단편적인 해설을 거부하는 쿤데라다운 내러티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작가의 후속작 참존가를 무지 좋아해 큰 기대감에 부푼채로 이 책을 펼쳤는데,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걸 넘어서 오히려 참존가보다 재밌었던 것 같다. 참존가의 경우에는 이야기 도중에 불쑥불쑥 작가 본인의 철학 장광설이 나와서, 작가의 사유가 깊은 것과는 별개로 서사가 조금 난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작의 경우에는 서사가 훨씬 깔끔하게 전개되는 편이고 소소한 반전까지 있다보니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오히려 이쪽이 더 높았던 것 같다. 혹시라도 참존가 첫장에 나오는 철학 장광설에 질려서 책을 덮은 사람이 있다면 본작을 쿤데라의 입문작으로 적극 추천한다. 

5.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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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잉글랜드 포츠머스 태생의 소설가, 언론인이자 현대 대중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 - 1870)의 중편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찰스 디킨스의 명성이 원체 높기도 하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1821 - 1881)와 같이 외국의 문학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작가다보니 나도 언젠가 그의 작품을 읽어보길 희망했다. 그러나 디킨스가 장편 소설을 위주로 작품 활동을 했던 터라 그의 대표작들이 분량부터가 어마무시하기도 하고, 그가 구사하는 문장도 호흡이 꽤 길고 영국 향토색이 짙다는 얘기를 들어서 도전하기 망설여졌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책부터 도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중편소설 정도 되는 분량의 이 책을 점찍어 뒀었다. 그리고 때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기도 해서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봤다.

이 책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영국에서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인데다 지나치게 돈을 아끼는 구두쇠 영감 에비니저 스크루지가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스크루지 영감은 굉장한 부자이면서도 자신의 난방 비용조차 아낄 정도의 자린고비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죽으면 인구 과잉이 해소되서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타인에게 무심하다. 그는 모두가 들뜬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타인과 등진 채 집에서 홀로 지내다 7년 전 세상을 뜬 사업 파트너 제이콥 말리의 유령을 목격한다. 파트너와 마찬가지로 생전 돈 밖에 몰랐던 말리는 옛 동료에게 이대로 가다간 자기와 같이 죽어서도 고통을 받으며 구천을 떠돌게 된다며 사흘밤 동안 세 유령이 찾아가 스크루지에게 빙의하여 새 길로 이끌어줄거라고 전언한다. 믿지 못할 광경을 목도한 스크루지는 어안이 벙벙해 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크리스마스를 관장하는 유령과 함께 기이한 체험을 하며 매사에 냉담하기만 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꽤나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급격한 산업화를 맞으며 황금만능주의에 빠지고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근대인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담겨 있다.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스크루지의 성격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 현대인의 면모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또 작가가 사실주의 문학에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인 만큼 이야기 곳곳에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테면 빈민을 돕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지만 실상은 교정을 명목으로 빈자를 격리했던 악법인 신구빈법(New Poor Law)에 대한 언급이라던가 가난한 사람들을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해 죽게 만들면서 인구가 자연스럽게 조절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 1834)의 인구론의 영향이 느껴지는 스크루지의 사상이 그러했다. 이토록 산업화 시기 영국의 분위기는 삭막하기 짝이 없었지만, 작가는 서양에서 가족과 이웃이 서로 함께하는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통해 아무리 혹독한 환경에 처할 지라도 서로를 돕고 즐겁게 어울리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을 재조명하면서 인류애를 고양시킨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을 고르자면 뭐니뭐니해도 바로 문장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디킨스는 긴 호흡의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에 속한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처음으로 폈을 때 문장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근심이 곧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듯이 디킨스 표 문장은 길면서도 술술 읽히도록 적혀있는 편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현학적인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담박한 어휘만으로 유려한 문장을 구사해내는 게 꽤나 놀라웠다. 물런 조금 예스럽거나 풍토적인 성격의 표현은 영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으로서 낯설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술술 읽히는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왜 디킨스가 당대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남기면,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정작 예전엔 읽을 엄두도 못냈던 작가의 책을 이번에 읽어봤는데 이 책을 다 읽고서는 왜 이제서야 디킨스의 작품을 읽어봤을까 하는 후회를 했다. 그래서 코앞으로 다가온 내년에는 디킨스의 다른 대표작들도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모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책으로 모자람이 없었던 책이었다. 소위 글맛이 느껴지는 작품인 만큼 영어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서로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또 이야기 자체도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감동적이라서 번역본으로라도 일독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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