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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이미 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주장들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빛을 비줍니다. — 살아있고 현존하는 어떤 것 — 우리가 보았듯 모든 현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삶이자 의식으로, 죽어있고 의식 없는 것은 아예 현존하지조차 않습니다 — 살아있고 현존하는 어떤 것이 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방비가 되어 있으며, 단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 안에 있는 신의 현존(Daseyn)을 통해서만 그것은 현존 안에 붙들려 유지되며, 만약 신이 그로부터 사라질 수 있다면, 그 자신도 현존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영적인 생명의 낮은 단계들에서는 이 신적인 현존이, 단지 흐릿한 장막 뒤에서, 그리고 혼란스러운 그림자 형상 속에서만 보일 뿐인데, 이것들은 자신과 존재를 바라보는 영적인 감각 기관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명료하게 그리고 장막 없이, 명시적으로 신적인 생명과 현존으로서 그것을 바라보고, 사랑과 향유로써 이렇게 이해된 생명 안으로 잠겨 드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되고 말할 수 없이 '지복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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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것이 참된 종교적 인간의 상이자 내적인 정신입니다: — 그는 자신의 세계를, 즉 자신의 사랑과 노력의 대상을, 결코 어떤 향락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울함이나 미신적인 두려움이 그에게 향락과 기쁨을 죄스러운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향락도 그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행위로서 파악합니다. 그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그 행위를 살며, 오직 그 행위 안에서만 살고자 하고, 오직 그 안에서만 자기 자신의 모든 향유를 발견합니다.


이제 그는 또다시 이 행위를, 감각 세계 안에서 그 결과가 현실이 되게끔 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성공이나 실패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는 이제 행위 안에서, 순수하게 행위로서 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행위로서 살기를 원하는데, 그 안에 있는 신의 의지이며, 존재에 대한 그 자신의 본래적인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생명은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게 흘러가며, 이 중심점 바깥으로 결코 부유해 나가지 않고, 그 밖에 놓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되거나 흐려지지 않은 채, 그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원하지 않으며, 갈망하지 않습니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복된 삶에의 지침, 또는 종교론 中




요며칠 에크하르트를 읽어서 그런지 묘한 떨림이 느껴지는구나


들뢰즈가 말년의 텍스트에서 후기 피히테를 언급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사유가 동일한 압력점에 도달했을 때의 현기증, 철학의 현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