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ecd56db0d32bf13d8bfafb29f0070296629260220b32b72937a735e81e3c316191b2b5ae88b75263174662ec4a1ab9

Gemini로 번역됨

                                         

"방송 작가로 잘나가는 카미노라는 이름은 들었지만, 저게 진인가?"


"음." 하고 나는 말했다.


"재수 없더군.. 하나다 기요테루와 체스터턴만 읽으면서. 일본 미스터리의 최고봉은 히라노 겐의 『시마자키 도손』이라고 단언한다거나 말이지. 묘한 남자였어."


고바야시 노부히코 「요코하마 1958」 (『초인 탐정』 제7화)


 노자키 로쿠스케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1년 가을, 막 간행된 『북미 탐정소설론』의 저자로서였다. 2단 조판으로 600페이지에 달하는 이 괴물적인 대작은 밴 다인, 해밋으로 시작해 퀸, 로스 맥도널드를 중요한 기점으로 삼고, P.K. 딕을 경유하여 80년대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미국 탐정소설의 역사를 합중국의 피비린내 나는 계급 투쟁사와 오버랩시키면서, 만화경 같은 현란한 문체를 구사해 눈을 뗄 수 없는 레토릭의 힘으로 설득해 낸,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편집광적인 서적이었다.


아니, '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아마 잘못일 테고, 『북미 탐정소설론』은 당연하게도 이듬해 제45회 추리작가협회상 평론 부문의 영예를 안기는 했지만, 그 방대한 양과 비싼 가격이 재앙이 되어 거의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았다는 게 실정일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북미 탐정소설론』은 최저한의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평론이라 이름 붙인 손쉬운 가이드북만이 범람하는 가운데, 이토록 획기적인 저작이 묻혀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일본 미스터리계의 일대 손실이며, 우리나라(일본) 미스터리 평론의 구조적 빈곤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뜻있는 출판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북미 탐정소설론』의 보급판을 간행하라! 전국의 도서관은 노자키의 저서를 구입해 눈에 띄는 개가식 서가에 진열하라! 가사이 기요시는 노자키와 함께 인민전선을 형성하라!


 ──라는 식의 농담은 제쳐두고, 『북미 탐정소설론』을 그럭저럭 다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내가 떠올린 것은 서두에 인용한 고바야시 노부히코의 연작 미스터리의 한 구절이었다(이 글을 읽는 독자가 카미노 스이리라는 명탐정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초인 탐정』을 읽은 것은 꽤 오래전, 고등학생 무렵이었을 텐데, 이 구절이 묘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은 희화화된 명탐정의 청년 시절 애독서로서 거기에 거론된 이름들의 연결 고리가 잘 와닿지 않았던 탓이리라.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다시금 그때와 똑같은 위화감을 『북미 탐정소설론』의 저자에게서 느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도 아직 이 위화감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겨우 그 연결 고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 해설을 맡아 『저녁놀 탐정첩』의 교정쇄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짜내면서부터다. 대충 말해버리자면, 그 위화감의 정체는 '교양(Bildung)'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것이 아닐까. 즉, 고바야시 노부히코나 노자키 로쿠스케나 '교양'이라는 말이 아직 살아있던 시대, 대학생이 그나마 이와나미 문고를 훑어보던 시대, 그리고 미스터리, 그중에서도 번역 미스터리를 읽는 것이 인텔리의 '교양' 중 하나로 꼽히던 시대를 피부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노자키 로쿠스케와 카미노 스이리(라기보다는 그 낳은 부모) 사이에는 대략 한 바퀴(12년) 정도의 나이 차가 있고, 전중파와 전후출생파의 단절이 분명히 있을 테니 단순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예컨대 『북미 탐정소설론』의 편집증적인 망라성·백과전서적 성격은 『지옥의 독서록』의 그것과 훌륭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계몽적인 태도를 뒷받침하는 말로 다하기 힘든 정열의 근원이야말로 '교양'(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근대 소설 전체의 역사 속에서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위치를 제대로 책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적어도 그렇다면, "하나다 기요테루와 체스터턴을 애독하고, 히라노 겐의 『시마자키 도손』을 미스터리의 걸작이라고 단언하는" 듯한 허세는 과거 '교양'의 무리 사이에서는 지극히 전형적인 속물(snob)의 제스처였음에 틀림없다. 그렇기는 하나, 아니, 그렇기에 '교양'의 체계라는 것이 뿌리째 붕괴하여 이제는 그 잔재조차 볼 수 없고, 탐정소설사의 내부에 갇혀 '오타쿠'적인 행동──그것은 '교양'이 스스로를 해체하고 패러디화한 말로의 모습일 것이다──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나 같은) 60년대생 인간의 눈에 그러한 제스처가 기이하게 비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 미스터리는 지식인의 읽을거리라고 약간의 자조도 섞지 않고 자랑스레 발언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대가 있었다. 물론 염치도 없이 지금도 똑같은 소리를 읊어대는 사람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패거리들은 바보다.


"우리는 오늘날 어떤 종류의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은 사어가 아니라 지금도 쓰이고 있지만, 어떤 주저함이나 유보의 느낌 없이는 쓸 수 없을 뿐이다. 그중 하나는 지식인이라는 말이다. 지식인이라고 감히 자칭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있다고 한들 아무도 그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 「사어를 둘러싸고」).


 그렇지 않더라도 미스터리가 지적인 읽을거리라고 아직도 믿고 있는 답답한 사람이 많은 데에는 말문이 막힌다. 정말이지 농담이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나 가사이 기요시의 묵직한 소설이 출판되었을 때, 그런 공허한 언설의 홍수를 목격하고 나는 왈칵 구역질이 날 뻔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본영 발표'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은 없다. 책의 띠지나 광고에 적힌 카피, 이름 좀 팔린 누군가의 추천사를 곧이곧대로 믿고, 책을 읽기도 전부터 사고를 정지한 채 재탕한 슬로건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겨주는 작업은 결단코 독서라는 이름에 값하지 않는다.


 다만, 지적이라는 형용사를 '지성'의 본분에서 가장 먼 것으로 해석하는 한, 이들 슬로건은 옳다. 너무나 옳아서 슬퍼질 정도다. 즉, 미스터리란 이제 '고작해야 지식인'의 읽을거리이며, '기껏해야 지적인' 분위기에 젖을 수 있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의미에서. 물론 그것은 '교양'과는 전혀 별개의 물건이다. 만약 마르크스가 문예 평론가여서 현재의 미스터리 융성을 목격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미스터리는 민중의 아편이다." 그것은 지적인 치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기에 래디컬한 '지성'의 본분을 작동시키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교묘하게 기능한다.


나는 얄팍한 수수께끼 풀이 신서 미스터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파'든, '사이코 서스펜스'든, '하드보일드'든, '모험 소설'이든, 혹은 '등신대 인간의 생활'이 그려져 있든 결국은 마찬가지다. 비교문학론적으로 민주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문학 장르로서 미스터리를 무조건 찬양하는 사람은, 민주주의 국가가 내포한 모순을 은폐하는 미스터리의 범죄성에 지극히 맹목적인 것이다. 아무리 진보적인 의장을 고안하고 목청 높여 반체제를 외칠지라도, 미스터리라는 장르는 철두철미 반동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무리 용을 써도 현상 변혁을 향한 통렬한 일격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어떻게 해도 뒤집을 수 없는 전제이며, 또한 뛰어넘기 힘든 한계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께끼 풀이 따위는 지긋지긋해. 이제 추리소설 따윈 읽고 싶지 않아"라며 이제 와서 폼 잡고 비딱하게 굴어봐야 별수 없다. 이미 늦었다. 그것은 가장 머리 나쁜 반동들이 쓰는 상투적인 문구다. 어중간한 아이러니를 만지작거릴 바에야 차라리 천황의 이름으로 자위대에 총궐기를 촉구하고 할복하여 zuk어라. 아니, 오히려 이 뻔한 한계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미스터리에 래디컬한 '지성'을 도입하기 위한 첫걸음이자 유일한 길이다.


"학문은 한도의 발견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싸운다."


(사카구치 안고 「불량 소년과 그리스도」).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내포하는 반동성을 냉혹하게 직시하고, 그 끔찍하고도 추악한 모습을 가차 없이 그려내는 것, 미스터리라는 이름의, 누에(전설의 괴물)처럼 윤곽조차 불분명한 요괴와 투쟁하는 방법은 그보다 달리 없다. 미스터리의 걸작이란 항상 그러한 투쟁을 몸소 살아내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Y의 비극』이 그러하고, 『피의 수확』이 그러하고, 『허무에의 제물』이 그러하고, 『사나운 방주』가 그러하듯──.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노자키 로쿠스케의 『북미 탐정소설론』 또한 그러한 가열찬 투쟁의 계승을 꾀하며 쓰인 서적이었을 터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미스터리가 정정당당한 지식인의 읽을거리일 수 있었고 '교양'의 일단을 담당했던 시대는 우리나라(일본)에서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대략 말해 전중에서 전후에 걸친 약 20년 정도의 기간이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가사이 기요시가 최근 열성적으로 주창하고 있는 설을 유용하자면, 그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이 20세기에 초래한 역사적인 절단이 서양과 일본 사이에서 시차를 동반하여 수용된 것에 기인한다고 한다(이 점에 관해 상세히 기술할 여유가 없으므로 『소겐 추리』에 실린 가사이의 연재 「전후 탐정소설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순문학계에서는 일화적으로만 언급되어 온 듯하지만, 전중의 '수입' 탐정소설 체험이 전후파 문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떠올려 봐도, 하니야 유타카(『사령』이 탐정소설적 의장을 구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오카 쇼헤이(종군 중 영미의 탐정소설을 탐독했다고 한다), 히라노 겐은 말할 것도 없고, 『Y의 비극』을 번역한 아유카와 노부오, '마티네 포에티크'의 주변, 읽어본 적은 없지만 우메자키 하루오나 시이나 린조도 추리소설에 손을 댔었다고 하며, 거의 시대를 초월해 있는 듯한 오니시 쿄진이 최근 들어 이 장르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조차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고나 할까, 이제 와서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여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스가 히데미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에 '순문학 논쟁'이라는 게 있어서 히라노 겐이 '순문학 변질설'──마츠모토 세이초, 미즈카미 츠토무의 데뷔로 인해 일본적 '순문학'이 불가능해졌다──이라는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철저하게 반대한 것이 오오카 쇼헤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딱 그 무렵, 독자적인 '추리소설'의 확립과 함께 미스터리가 지식인의 읽을거리일 수 있었던 행복한 시대가 종언을 맞이했다는 사실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오오카 쇼헤이는 '교양'의 편에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에 저항했음에 틀림없다. 물론 대가 세이초에게는 '교양'이 있었겠지만, 뭐야, 이 정도면 '교양'이 없어도 쓸 수 있겠군, 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것이 '사회파' 융성의 계기가 된 셈이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니야 유타카나 히라노 겐의 이름을 든 김에 말하자면, 미스터리가 '교양'일 수 있었던 행복한 시대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으로서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殺인사건』이야말로 전후 탐정소설사 중에서도 별격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이 쓰이는 계기가 된 문단 범인 맞히기 게임에 참가한 멤버를 보면, 그 면면의 화려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다. 지난날의 분위기에 관해서는 다양한 곳에 기록되어 있으니 새삼 여기서 내가 아는 체하며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우연히 최근 그것에 대해 언급한 하니야 유타카의 에세이가 『군조』에 실려 있었다고 남을 통해 전해 들었기에, 이것을 기화로 독자의 참고를 위한 최신 자료라 칭하며 시험 삼아 인용해 보자.


 이 『야구 殺인사건』을 쓴 것은 오이 히로스케다. 스탕달의 파브리스와 기소 요시나카를 애호하는 오이 히로스케는 내 지인 중 가장 파격적인 쾌남아로, 아소 일족의 부자이기도 했기에 전시 중 「현대문학」을 주재하고, 그 센다가야의 집에서 다양한 놀이를 벌인 가운데 사카구치 안고, 히라노 겐, 아라 마사히토 등과 탐정소설 범인 맞히기를 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현대문학」은 쇼와 14년에 나온 「구상」과 같은 시기로, 앞서 말한 히라노 겐, 아라 마사히토는 양쪽 동인이었지만, 나는 「현대문학」에 가담하지 않았기에 당시 오이 히로스케와 접촉은 없었고 친해진 것은 전후이다. 센다가야의 집이 불타고 규슈에 있던 그가 상경할 때마다, 그 환영을 겸해 내 집에서 밤샘 범인 맞히기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전쟁 중과 마찬가지로 아라 부인이 마지막 부분을 찢어버린 단행본을 사용했지만, 이윽고 요코미조 세이시의 연재가 활발하게 시작되었으므로 똑같이 밤을 새우면서 그 연재 중반쯤에서 답안을 썼던 것이다. 전쟁 중 텍스트를 읽던 도중, 이건 옛날에 읽은 적 있는 작품이라고 히라노 겐이 기억해 내어 쓴 답안이 너무나 멋지게 들어맞아서 사카구치 안고가 몸을 떠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전설처럼 내려왔지만, 전후, 이번에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나비 殺인사건』에서 내가 또다시 멋진 답안을 썼기에, 전시 중과 전후의 '명탐정' 두 사람을 합친 히라노 유타카 경부를 '미탐정(헤매는 탐정)'으로 삼는 도전 소설 『불연속 殺인사건』을 사카구치 안고는 썼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우선 있었고, 게다가 센다가야에 집을 다시 지은 후 오이 히로스케의 일 하나에 고라쿠엔 구장의 기자석에 앉는 야구 평론이 더해졌으므로 『야구 殺인사건』이 쓰이게 된 것이다. (중략) 그때, 하니야 씨, 여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오이 히로스케에게 트릭이나 전개에 대해 상담을 받았고, 나는 그 자리의 착상을 말했는데, 그 착상 몇 가지가 오이 식으로 소화되어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카구치 안고가 그 작품을 이와타니 서점에 가져갔을 때 상담 상대는 하니야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출판 관계자들은 당시의 사실을 알고 있기에 사카구치 안고도 오이 히로스케도 타계한 뒤 심야총서사에서 복각할 때도 사이토 신지는 저작권자인 아소 요코 씨에게 허가를 구하고 낸 것이다.


하니야 유타카 「서명본」 (『군조』 93년 9월호)


 라는 사정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에서야 범인 맞히기 게임이라고 하면 자폐적인 오타쿠라든가, 사회성이 결여되었다든가, 살아있는 인간은 게임의 말이 아니라든가, 멍청한 모라토리엄 청년의 현실 도피적 증례라며 끈질기게 비판받는 게 고작이지만, 이 하니야의 글에 국한하지 않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록에서는 그러한 찜찜함, 불건전함 따위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회고담이라 미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건대, 이 범인 맞히기 살롱을 지배하는 공기의 건전함의 근거는, "이 비상시에 적성 오락의 대표인 탐정소설에 빠지다니 언어도단! 비국민!"이라는 식의 풍조에 대한 저항의 의지에 뒷받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고, 또 한편으로는 몇 번이나 말하듯이 당시에는 탐정소설이 확고한 '교양'의 일단을 담당하는 것으로 인지되고 있었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가사이 기요시의 「전후 탐정소설론」을 멋대로 부연해 말하자면, 전시 중의 재야 지성에게 영미의 탐정소설이란 다가올 일본 패전 후의 현실을 선취하는, 더할 나위 없는 교과서인 것처럼 예감되었을지도 모른다(그렇다고 한다면 전후 일본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시마 유키오가 탐정소설을 바보 취급했던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나저나 주절주절 길게 탈선만 하고, 남의 훈도시로 씨름하는 듯한 짓거리는 적당히 좀 해라, 언제쯤 정작 중요한 『저녁놀 탐정첩』의 해설이 시작되는 거냐며 슬슬 저림을 참지 못하기 시작한 독자가 대다수일지 모르겠지만, 천만에 말씀, 이미 그 해설은 단숨에 가경(佳境)으로 접어들고 있다네. 알겠나, 제군들?





 『저녁놀 탐정첩』의 무대 배경은 태평양 전쟁의 초기 단계, 이미 국내의 좌익 운동은 괴멸하고 치안 유지 체제가 서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뒤덮고 있으면서도 아직 일본 전체가 일시적인 전승 기분에 들떠 있던 시대, 쇼와 10년대 중반쯤으로 설정되어 있다. 등장인물은 언뜻 무심하게 <저녁놀>이라는 단어를 씌운 익명의 마을에서 생활하는 기형적인(freaks) 주민들──언덕 위 교회의 수상쩍은 외국인 신부와 그에게 심취해 이름도 본체도 구별이 가지 않는 쌍둥이 자매. 미셸 푸코 뺨치는 괴이한 풍모를 자랑하는 견묘(犬猫) 병원장과 '잠자는 남자' 체사레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그의 조수. 마을을 좌지우지하는 공장 보스와 그 부하. 노발리스의 이름을 딴 다리가 불편한 고서점 주인. 10전 식당 '저녁놀 정'의 셰프와 그 미모의 맘("Mum is the word"). 혁명에 대한 정열과 사랑하는 여자를 동시에 잃고 폐인이 된 청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을을 배회하는 특고와 경찰관. 그리고 유랑 끝에 이 마을에 당도한, 과거도 미래도 없는 젊은 남녀. 흡사 독일 낭만파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빠져나온 듯한 패거리들만이 사는 쇠락한 마을에, 때마침 "사악하고 퇴영적인 도피의 취미"라며 체제 측으로부터 규탄받고 있는 탐정소설을 그대로 옮긴 듯한──모든 범행 현장에 톰슨의 『탐정 작가론』의 마지막 장이 찢겨 남겨져 있다!──기괴한 연쇄 殺인이 발생한다.


 이 괴사건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탐정 5인방, 그 면면은 고바야시 히데오(고바야시 옹. 고바야시 노부히코가 아니니 주의), 사카구치 안고(하카구치 당고), 하나다 기요테루(하카다 쿄쇼), 오이 히로스케(오이 하카스케), 하니야 유타카(아니야 아냐키위치)의 모습을 본뜬 문사 출신 패거리들로, 고바야시 옹 이외의 네 명은 "반역의 객기를 부리다 오래전에 좌절하고, 전향의 굴욕을 묵묵히 견디며, 때려눕혀진 채 보호관찰을 받고 있다. 혹은 전력은 없지만 본래 기질은 쾌락의 자유를 옳다 여기며, 시국 풍조에 질식할 것 같은 불만분자"로, "지금은 다 함께 탐정소설의 범인 맞히기 게임으로 무위한 나날의 울분을 풀고 있다."


 이 무대에, 이 탐정 역할. 그것이 얼마나 대담하고도 주도면밀하게 고안된 야심적인 배치인지, 여기까지 나의 장광설을 따라와 준 끈기 있는 독자에게는 이제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설정의 참신함만 따져도 『저녁놀 탐정첩』은 우리나라 탐정소설사에 특필되어 마땅한 작품이다. 덧붙여 『부흥기의 정신』의 저자가 센다가야의 오이 저택에서 범인 맞히기 게임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하나다는 「현대문학」의 기고자였고, 크라카우어나 벤야민과 동시대에 독자적인 '탐정소설론'을 전개했으며, '동물·식물·광물'이라는 레토릭 가득한 안고론을 쓰기도 했으니, 세 바보(세 묘지) 트리오의 일원으로서 이토록 어울리는 인물은 없을 터이다.


 그런데 '작자 후기'에도 있듯이, 그들의 언동, 옥신각신 주고받는 대화의 상당 부분은 실재하는 다섯 사람이 남긴 작품에서의 박람강기한 인용에 기초하고 있는데, 동시에 이 기법은 디지털 샘플링을 구사한 랩/힙합 계열 사운드의 질감과도 통하는 데가 있어서, 그러고 보니 노자키 로쿠스케는 랩의 왕자 퍼블릭 에너미를 즐겨 듣는다던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놓칠 수 없는 것은, 이 종횡무진한 인용의 몽타주가 단순한 의장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 소설 전체에 변증법적인 긴장과 일종의 메타 비평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안고에게 푹 빠진 미하(팬)라서 아무래도 고바야시 옹에게 시비를 거는 당고 쪽에 편을 들게 되지만, 쿄쇼와 아니야가 넌지시 '전향'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 등 읽을거리는 많은 법이며, 이러한 문학적 묘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 작자의 '교양'에 다름 아니라고 말해 버리면 내 펜이 너무 나간 것일까. 내 수중에는 작자 자신이 작성한 '인용 출전 일람표'의 복사본이 있어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미는 다하지 않지만, 여기서 시원스럽게 무대 뒤를 공개하여 독자의 흥을 깨는 무지한 짓은 굳이 삼가겠다. 결코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전을 전혀 모르는 백지상태의 독자가, 꼬치꼬치 따지며 읽는 딜레탕트보다 이야기의 핵심을 다이렉트로 파악하기 쉬울지도 모르니까.





 입안에는 돼지 족발 통째의 아교질이 눌러앉아 끈적하게 층을 만든 것만 같다. 음식물을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 구강 자체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인지 북새통 난리다. 즉시 무를 집어넣어 씹어 으깨고, 찍 배어 나온 즙으로 씻어 내리고, 다음으로 곤약을 머금고 씹지 않고 장난치듯 내벽을 닦아낸 뒤 삼킨다. 묵묵히 먹고, 먹으면서 별로 말하지 않는다, 때때로 입안에 남은 관절, 잔뼈 따위를 '퉤' 하고 뱉어낸다. 대충 그런 절차가 이 요리의 작법인 듯한 것을 싫어도 알게 되고 있다.


 이것은 이야기 종반 가까이 고바야시 옹과 4인조가 '저녁놀 정'에서 돼지 족발 조림을 먹는 장면인데, 이 묘사는 그대로 『저녁놀 탐정첩』을 읽을 때의 독자 마음가짐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어조로 작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기도 하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미각이다.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신선한 놀라움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둔탁한 분노가 되어 끈적거린다." 물론 이것은 노자키 특유의 눙치기이며, 본서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작품임을 은연중에 독자에게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잇따라 일어나는 연쇄 殺인 사건은 어딘가 목가적, 아니 안고(Ango) 풍의 소극(farce) 필치로 쓰여 있어 포나 체스터턴은 물론이거니와 오츠보 스나오의 「텐구」라든가 피에르 베리의 걸작 『산타클로스 殺인사건』까지 끌어다 대고 싶을 정도의 야단법석이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서 착종하는 심리의 양상은 음산하고 사악하기 그지없으며, 그 대립의 변증법은 과연 하나다(Hanada)에게 사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북미 탐정소설론』에서도 노자키가 대담한 레토릭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솜씨란, 때로는 독단적이 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점까지 포함하여 하나다 기요테루적인 데마고기(선동) 직전의 위험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애초에 '탐정소설 금지령' 하의 연쇄 殺인·추리 경쟁이라는 발상 자체가, 전시 중에 『부흥기의 정신』을 써 내려간 하나다 식 저항의 제스처를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이러한 저항의 제스처는 현재의 미스터리 신(scene) 안에서는 일견 시대착오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특히 시마다 소지의 성공과 '신본격' 무브먼트에 의해, 마츠모토 세이초 이후 일본 미스터리계를 암묵 중에 뒤덮고 있던 사회파 리얼리즘 지상주의(그것은 전시 중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탐정소설 금지령'에 다름 아니다)는 일단 배경으로 물러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헤이세이 일본의 출판계에서는 여전히 불황을 모르는 미스터리 붐이 계속되고, 이 붐에 관련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가치관의 다양화', '백화요란'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어쨌든 리뉴얼한 모 문예지는 '미스터리 특집'을 꾸미고, 등장 시에는 '작가 이전', 오타쿠의 소꿉장난 취급받던 '신본격'조차 지금은 추리 문단의 한 유파로서 나름의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니까. 우리에게는 이제 맞서야 할 상대 따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이 다종다양하고 자유분방한 미스터리 전성시대에, 전시 하의 '탐정소설 금지령'에 대한 저항을 그린 『저녁놀 탐정첩』이 읽혀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별로 역설을 부리려는 생각은 없다. 백화요란의 분위기가 손쉽게 '익찬회'적 기운에 물들어버리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통제·탄압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닥쳐오는 법이고, 실제로 그러한 징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탐정소설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곤란한 시대를 다시 불러오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항상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흥! 천만에, 나는 부도 어음조차 지불해 줄 생각이 없다."



 『북미 탐정소설론』의 「휘갈겨 쓴 후기 혹은 어떻게 노자키 로쿠스케 씨는 북미 탐정소설론을 썼는가」라는 제목의 가상 인터뷰 속에서, 노자키는 "스무 살 전에 만든 것입니다만, 거의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국내의 6을 오야부 하루히코의 것 한 점으로, 7을 같은 다카기 아키미쓰의 『제국의 사각』으로 바꿔 넣는 정도일까요"라고 주석을 달면서 다음과 같은 탐정소설 베스트 텐을 피로하고 있다.


<일본>


『도구라 마구라』 유메노 규사쿠


『사령』 하니야 유타카


『허무에의 제물』 나가이 히데오


『옥문도』 요코미조 세이시


『음수』 에도가와 란포


『시마자키 도손』 히라노 겐


『노 가면 殺인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허상음락』 야마다 후타로


『흑사관 殺인사건』 오구리 무시타로


『불연속 殺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외국>


『Y의 비극』 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티


『붉은머리 가문의 비극』 필포츠


『어둠의 소리』 필포츠


『안녕 내 사랑』 챈들러


『브라운 신부의 순진』 체스터턴


『야수는 zuk어야 한다』 블레이크


『스타벨 사건』 크로프츠


『고무지우개』 로브그리예


『제2의 얼굴』 마르셀 에메


(차점) 『육교 殺인사건』 녹스


『범행 이전』 아일즈


『백모 殺인사건』 헐




 이 라인업을 보고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클래식한 본격 탐정소설에 대한 노자키의 편애이다. 그것은 이 베스트 텐이 "스무 살 전에 만들어진 것"인 탓일지도 모른다. 다만 『북미 탐정소설론』의 저자가 편협한 본격 지상주의자일 리는 없으니, 여기에 나열된 작품은 노자키 로쿠스케에게 있어 '탐정소설의 고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저녁놀 탐정첩』에는 수많은 탐정소설적 모티프·취향이 담겨 있는데, 그러한 모티프의 대부분이 여기에 열거된 작품에서 유래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본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고향에 바치는 찬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동시에 "탐정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가 중독의 형식이기도 하다"라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탐정소설 해설의 룰로서 너무 깊은 내용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예컨대 아마추어 탐정의 추리 경쟁이라는 취향은 『허무에의 공물』, 『육교 殺인사건』을 답습하고 있고, 재차 일어나는 범행이 일종의 비유(미타테) 殺인으로 나타나는 점은 『옥문도』, 『흑사관 殺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을, 결말에 놓인 진범의 기이한 고백 수기는 『붉은머리 가문의 비극』의 그것을 쉽게 연상시킨다. 또한 16장에서 출현하는 '사법연구보고 별책'이라는 서적이 심상치 않은 형태로 연쇄 殺인을 배후에서 통제하고 있는 듯한 사실이 판명되고……라는 의외의 전개가 『Y의 비극』의 요크 해터 수기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이뿐만 아니라, 본서에는 퀸에 대한 비평적 오마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많이 보이며, 노자키의 '미스터 북미 탐정소설'에 대한 집착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이러한 마니아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자세 그 자체는 딱히 본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그것만 따진다면 예컨대 '신본격' 작품군과 비교해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비도덕적인, 이 내던져진 이야기만이 문학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나는 오히려 이러한 이야기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향은 우리의 요람이기는 하지만 어른의 일은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 (사카구치 안고 「문학의 고향」). 적어도 '신본격'과 노자키의 소설 사이에 가릴 점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바와 같은 '어른의 일'이라는 자각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만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노자키 로쿠스케는 틈만 나면 '신본격'에 대해 다소 굴절된 동질감을 표명해 왔는데, 그 배경에는 게임 탐정소설에 대한 편애라는 공통점 이상으로 노자키 자신의 (이루어지지 않은) 요절 열망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마야 유타카 『날개 달린 어둠』의 노벨스판에 기고한 해설 「어둠 속의 날개──혹은 '신본격파' 알레르기에 대한 쇼크 요법」을 일독하면 명백하다.


"숙명에 대해 구구한 주석이 필요할까. 사람은 스무 살 때 온갖 우주를 가지고, 온갖 장대한 관념에 침범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을 때 노자키는 마야 유타카에 대해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청춘기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 또한 스무 살 때 온갖 우주를 가지고, 온갖 장대한 관념에 침범당했던 인간인 것이다. 『저녁놀 탐정첩』은 그러한 청년의 장대한 관념의 궁전 안에서 배태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상상한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노자키는 또한 다음과 같이 쓴다. "그것이 어떤 자에게 표현으로서 결실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마도 재능이라는 변덕스럽고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個)에 속할 수밖에 없는 우연에 의함과 동시에, 더욱더 우발적인 현실 세계의 역학에 좌우되는 것이다."


 마야 유타카가 아니라 쓰는 사람인 노자키 로쿠스케 쪽으로 중심을 옮겨 읽으면, 이것은 어딘지 변명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고백건대, 나는 노자키의 경력을 거의 모른다. 1947년 도쿄 출생. 84년 「환시하는 바리케이드──복원 문학론」으로 비평가 데뷔를 장식하기 이전, '곡마관'이라는 앙그라(언더그라운드) 극단 활동에 관여했고 또 전공투 운동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 그 정도밖에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60년대생인 나에게 전공투 운동은 더 이상 영광에 싸인 반역아들의 신화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어버린 야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혁명'이라든가 '정념'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고, '전향'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도 없다. 애초에 피처럼 붉은 저녁놀의 색을 좌익 운동의 실추라는 이미지와 연결할 회로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동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공감을 빼더라도, 이 소설에 각인된 '윤락(淪落)의 청춘'의 잔상은 애처롭다. 스무 살 청년이 구상한 『저녁놀 탐정첩』은 "현실 세계의 역학에 좌우되지" 않았다면 완전무결한 퍼즐러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독자로 하여금 몽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 게임 탐정소설의 어두운 정열에 사로잡힌 청년이 부조리한 현실을 배제하기 위해 구축한 무시간적인 유토피아였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이 유토피아='탐정소설의 고향'이 불합리한 현실의 힘 앞에 맥없이 와해하고, 갈기갈기 찢겨 비명을 지르며, 무엇 하나 매듭지어지지 않은 혼돈의 바다에 삼켜져 가라앉는 무참한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과거의 순수한 뜻에 반하여 꼴사납게 살아남아 버린 전(元) 청년의 비통한 탄식을 듣는 것이다. 노자키의 소설이 '어른의 일'인지 어떤지 지금 당장은 단언할 수 없지만, 그 탄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적어도 그것이 '아이들의 놀이'가 아님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탄식은 "고향에 바치는 찬가"의 순수하고도 진지함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의 날개」에서 도미나가 다로나 하라구치 도조를 끌어들이며 노자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은 발현된 시대에 따라 끔찍하게 엇갈린 표현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을까. 정말로 그럴까. 결국 시대를 거쳐도 그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라는 식으로, 어울리지도 않게 서정적이 되기도 한끝에 자칫하면 이러한 작자의 술수에 빠져 나는 무심코 "안티 미스터리?" 따위의 말을 입에 올려 모든 것을 망쳐버릴 뻔하게 되는데, 그런 류의 의미심장한 척하지만 내실은 텅 빈 수사를 붙이는 것이 눈앞에 있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행위의 변명에 지나지 않음이 명백한 이상, 해설자로서 절대로 그러한 혼잣말을 흘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안티 미스터리'라는 말을 발명한 것은 나카이 히데오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이 어떠한 사태인지 여전히 도통 확실치 않다고는 해도, 『허무에의 제물』이라는 작품이 무엇보다도 '최후의 탐정소설'이 되는 것을 목표로 쓰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 결말, 궁극의 의외의 범인으로서 '독자'가 지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신이 인간다운 마음을 가졌다면 스스로도 가해자이면서 태연하게 탐정소설을 계속 읽는다는 비정한 짓을 내일부터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즉, 나카이는 독자에게 기습적인 반성을 촉구함으로써 일종의 '전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전후 일본의 현실에 대해 반드시 유효하게 기능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허무에의 제물』의 독자=가해자라는 결론은 '일억 총참회'라는 레토릭을 부려 '천황의 전쟁 책임' 추궁을 흐지부지한 수법과 똑같기 때문이다. 실제 문제로서 국민 대부분은 참회하는 척했을 뿐이고 아무도 근본적인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허무에의 제물』이 세상에 나온 후에도 여전히 탐정소설은 계속 쓰이고 계속 읽히고 있지 않은가. 『허무에의 제물』에 전율한 독자도 다음 '안티 미스터리'를 찾아 더한 독서 편력을 거듭해 갔을 뿐이다.


 결국 '최후의 탐정소설'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저녁놀 탐정첩』이 나카이 히데오 사후에 출판되는 것에 의의가 있다면, 이 점을 확인한다는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탐정소설 금지령" 아래서 탐정소설을 탐독하는 행위는 권두, 치안 유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감에 따라 탐정소설은 통제·탄압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긴다. 독을 가지고 독을 제압한다는 역설. 이 반전이야말로 중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탐정소설의 반동적인 성격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근대 탐정소설의 원형인 포의 「군중의 사람」에서 이미 분명했듯이, 탐정과 범인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우애적인 공범 관계가 존재한다. 즉 양자는 서로 치환 가능한 입장에 있다. 이 구도를 밀고 나간 게임 탐정소설에서는 탐정=선/범인=악이라는 윤리적인 구분조차 무효화해 버리고, 마침내 탐정이라는 존재는 '선악의 피안'에까지 내몰린다. 그렇게 되었을 때 탐정은 탐정소설 그 자체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이는 반동적인 틀을 견디지 못하고, 드루리 레인이 그러했듯이 자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스가 히데미는 하나다 기요테루의 「탐정소설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탐정의 크리틱」).


 하나다 기요테루의 탐정소설(비판)론은 그 후 탐정이라는 존재의 애매함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가게 될 것이다. 도시를 들개처럼 돌아다니는 하드보일드 탐정이란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포기한 존재이기도 할 테니까. 그것은 "그 자신, 어느 쪽이 적이고 어느 쪽이 아군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게 되어 있는" 듯한 '이중 스파이'에 대한 어떤 종류의 친근감으로 이어진다(「스파이 예찬」). 이미 아케치 코고로에 즉해 서술해 두었듯이 스파이가 탐정의 하나의 변신이었다면, 스파이가 경찰이나 국가에 대한 아이덴티피케이션(동일시)이었다고 한다면 이중 스파이란 그 포기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이 앞에 있다. 냉전 하의 첩보물은 탐정소설의 게임성을 극단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과거 탐정이 겪었던 위기는 똑같은 형태로 이중 간첩의 위에도 닥쳐온다. 즉 게임성의 추구는 모든 가치관의 무효화로서 나타나고, 이중 간첩은 심각한 근거 없는 불안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 테마를 집요하게 계속 쓰고 있는 존 르 카레의 작품을 보면 분명하듯이, 동일시화하는 대상의 포기라는 양태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선악·피아의 구별이 애매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기에, 이중 간첩은 가장 반동적인 이데올로기, 고색창연한 휴머니즘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는 다른 종류의 내셔널리즘의 함정에 손쉽게 빠져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배신'이라는 이원론적 대립의 회로가 그렇게 부추긴다. '전향'의 실태란 바로 그러한 근거 없는 불안,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원론적 대립에 의해 은폐하고 그것을 일원론적으로 딱 잘라버리려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허무에의 제물』의 결말에서, 추리 경쟁에 흥미를 느끼던 탐정소설 마니아인 아마추어 탐정들이 <시운마루 호의 비극>을 목격하고 갑자기 "인간으로서의 의미" 유무를 운운하며 '참회'해 버리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전향'으로서 비판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녁놀 탐정첩』의 아마추어 탐정들은 사건의 진상을 들이대어도 갑자기 헛물켜며 '참회'를 시작하거나 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다가올 전후의 폐허 광경에 대비하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내일부터도 게임 탐정소설을 계속 읽을 것이다. 이제 그것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조차 아니다. 하물며 거기에 '인간'이 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닥치는 대로 읽어 치우고, 근거 없는 게임에 빠져들 뿐이다. 이윽고 안구가 흐물흐물 썩어 흘러내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탐정소설을 계속 읽고, 혹은 계속 쓰는 것. 탐정소설이 항상 내포하는 위험한 귀속의 함정으로부터 끝없이 계속 도망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최후의 탐정소설'은 그 불가능성을 계속 선고받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도 폐허 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Lost in a Roman wilderness of pain, and all the children are insane." (고통의 로마 황야에서 길을 잃고, 아이들은 모두 미쳐버렸다.) 하이퍼 자본주의의 사생아인 우리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에1리언 네이션의 아이들>이니까. 탐정소설은 zuk었다──하지만 그것은 생사의 경계를 잃은 좀비처럼 반복해서 반복해서 몸을 일으키고, 몇 번이고 일어설 것이다. 아름다운 요절의 노래 따위 이제 들리지 않는다. 뇌수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루 아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로스 맥도널드. 생령이 되어 타인에게 들러붙으면서 좀비 탐정소설을 계속 쓴 엘러리 퀸. 자가 중독과 부패의 극치에서 생겨난 '신본격'의 앞길에 있는 것이 그러한 끝없는 광기의 막다른 골목에 다름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이 좁은 일방통행로를 뚫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이제는 인간도 시체도 아닌 좀비가 되어서…….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