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기아스는 박종현 역과 김인곤 역 둘 다 읽어 본바 김인곤 역이 더 읽기 좋았다.

그러니 이하 인용은 정암으로 하겠다.


485c

-성인 남자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거나 장난하는 걸 누가 보게 되면 우스꽝스럽고 사내답지 못하며 맞아도 싸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이와 똑같은 느낌을 철학 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받습니다. (중략) 나이가 꽤 든 사람이 여전히 철학을 하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걸 볼 때마다, 소크라테스, 이 사람은 당장 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략) 그리고 재판장에 나가서 아주 열등하고 사악한 고발자를 만나 그가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하길 원한다면 당신은 죽게 될 겁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소크라테스? 그것이 좋은 자질을 타고난 사람을 붙잡아 더 못한 자로 만들어서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없고 크나큰 위험들로부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어느 누구도 구해 낼 수 없으며... 논박은 그만하시고 세상 물정을 잘 읽는 기예를 익히십시오.-



칼리클레스의 반복된 논의는 굳이 계속 인용할 필요 없어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 벗어나지 않는 일관된 입장을 취하고 있으므로, 더군다나 생각을 고쳐먹는 것도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미 속은 힘! 더 크고 강한 힘!으로 꽉 차 있다.


495e ~ 496b

모순율이 나온다.

-당연히 아픈 눈이 동시에 건강하지는 않겠지?-

-안질에서 벗어났을 때는 어떤가? 그때 눈의 건강으로 부터도 벗어나서 결과적으로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벗어난 건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그 둘 각각을 차례로 갖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네-


존재와 무, 죽음과 삶 등등 어려운 주제는 벌써부터 이야기하지 말자. 단지 여기서 말한 대로 아프다는 통증만 가지고 소소한 생각을 해본다.


아픔과 아프지 않음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물론 아! 아프면서도 좋아!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이런 건 분명 있어 보인다. 아픔과 좋아요처럼 무언가 달라 보이는 건 공존할 가능성이 있지만, 아픔과 아프지 않음은 어떤가? '아프면서도 좋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사람일지라도 '아프면서 안 아파'라는 말을 들으면 '어?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먼저 생긴다. 분명 '아프면서 안 아파'라고 말한 사람은 아주아주 미세한 시간 차이로 아팠다가 통증을 눈치채기 전에 순식간에 사라지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 둘 각각을 '차례로' 갖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네~라고 한다.

베르그송을 끌고 오고 싶은데 이런 건 베르그송 독회로 넘기고, 칼리클레스와의 이어진 말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힘셈과 힘없음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좋은 것들과 행복,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나쁜 것들과 비참함도 '차례로' 가지고, 각각으로부터 '차례로' 벗어나지 않겠나?-


그러면 우리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아픈 것과 좋은 것은 어떠한가.


-따라서 만약 사람이 동시에 벗어나기도 하고 동시에 갖기도 하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그것들은 분명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아닐 거네.-


여기서 칼리클레스를 위해 기초적인 교육을 해주고 있다.


-친구여 좋은 것들은 즐거운 것들과 같은 것이 아니며, 나쁜 것들도 괴로운 것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거네-


이 문구가 고르기아스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후반 소크라테스의 설교에 뒷받침되는 것은 물론이고, 칼리클레스와 폴로스, 고르기아스 모두가 혼동해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전에 소 히피아스에서 읽었던 내용을 되새겨본다. 정의가 기술이라면 왜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남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자발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가? 소크라테스는(사실상 이제는 플라톤) 고르기아스에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자네 기하학을 보면 네모난 것과 동그란 건 다르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정의도 이와 마찬가지네' 위에서 간단한 모순율로 칼리클레스의 오만한 이해를 바로잡아주고 있는 걸 생각해 보자.


이런 간단한 정의 내리는 방도는 뒤이어

507e~508a

-칼리클레스, 현자들은 함께 나눔과 우애와 절도 있음과 절제와 정의로움이 하늘과 땅과 신들과 인간들을 함께 묶어 준다고 말하네. 그렇기 때문에, 친구여, 그들은 이 전체를 세계질서(kosmos)라고 부르며 무질서나 무절제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네. 그런데 자네는 지혜로운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네. 오히려 자네는 기하학적 동등이 신들 사이에서나 인간들 사이에서나 큰 힘을 발휘한다는 걸 간과하고 있네. 그건 자네가 기하학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네.-


조화와 질서를 이야기한다.

기하학적 통찰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뿌리 깊은 관계를 말함으로 칼리클레스의 무절제함을 걷어내보려 시도한다.


잠깐 위에서 나온 기하학과 관련해서 슬슬 이데아가 나오려 하기 때문에 좀 더 이야기를 풀어본다.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기하학이 도형 배우라는 뜻일까? 그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나중에 다른 대화편에도 또 나왔던 기억이 있는데

여기서 기하학과 正義에 대한 설명을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글로 살펴본다. 이하 좀 긴 인용문.



<소은 박홍규 전집 1권 30~31p>

-물론 기하학은 유클리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기하학은 멀리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비롯되며, 피타고라스 학파의 기하학에는 엄밀하게 논증적인 부분이 있고, 후에 유클리드 기하학에 집대성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편의상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한 삼각형이 어떤 장소에 있거나, 동일한 삼각형으로 있으며, 또 그 삼각형이 공간 이동을 하여도 동일한 삼각형으로 있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서는 무수히 많은 위치에 무수히 많은 동일한 삼각형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 삼각형들이 공간 이동을 하여 위치를 옮긴다 하더라도 그것에 관계없이 동일한 삼각형으로 있다. 그러므로 위치를 달리하는 무수히 많은 삼각형이 공간 이동을 하여 합동이 되고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하나의 삼각형은 연장성이 빠진 공간에서 유별된 종 eidos으로서의 삼각형이며 측량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삼각형에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삼각형에만 고유한 규정이 있을 수 있다. 이 규정은 밖에서 얻어지지 않고 그 속에 있다. 왜냐하면 종이 된 삼각형은 다른 모든 종으로서의 도형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있고 그것의 규정은 하나의 전체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이 삼각형의 정의에 나타난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은 측량에 의거하지 않고 직각 삼각형에만 내포되고 있는 규정, 곧 종으로서의 직각 삼각형의 정의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정의에서 결과를 도출하는 증명은 근거와 결과가 하나로 연결됨으로써 통일된 전체로서 한 번에 직관되도록 하는 작업이다.-


좀 긴 인용문이었지만 결국 에이도스로서 정의(正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별된 종으로서 매번 다르게 측량되는 것이 아니다. 측량으로 직각 삼각형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고, 종으로 가지는 규정만으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495e ~ 496b에서 칼리클레스에게 무엇이 좋고 나쁘고를 설명하던 방식도 이와 같은 지적 직관에 해당한다. 다만 익히 알고 있듯이 직관으로 알 수 있는 것과 현실로 내려온 구현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해하기 쉽게 흔한 예로 점을 말해보자. 점이란 위치는 있지만 크기는 없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점이랍시고 현실에서 구현할 때 어떻게 하는가.

점을 탁하고 '찍'는다. 위치는 있지만 크기는 없어야 하는데 찍는 순간 크기가 생기지 않던가. 분명 지적 직관으로는 이해한 것이 구현에서는 불안정해지는 것. 원형의 이상은 이렇게 종으로서 제각기 규정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eidos는 외모이자 보이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nous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지적으로 본다는 말이 나온다. 다만 이러한 원형의 완전한 것은 구현할 수 없다.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기에 가장 건강한 혼을 보여주기 위한 신화를 덧붙인다.


527a

-아마 자네는 내가 말한 이것들을 마치 노파의 이야기인 양 설화로 여기고 깔보겠지. 그러나 사실은 자네가 알다시피, 자네와 폴로스와 고르기아스, 이렇게 당신들은 셋이고 요즘 그리스인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지만, 저승에서도 분명히 이익이 되는 이 삶이 아닌 다른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당신들은 입증해 보일 수 없네.-


당신들 죽어서 진짜로 심판받을지 아닐지 모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더 조심하며,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훌륭해 보이는 데 주의를 기울이며 훌륭한 상태에 있도록 살아가게!


당시 오르페우스교의 영혼불멸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변론, 크리톤에서 영혼을 돌본다는 주제로 긴 논의를 읽어왔다. 그때 개인의 영혼을 돌보는 건 확장되어 우리 모두 각자의 영혼을 돌본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었다.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각자의 영혼을 앞세워 무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며 이것은 무엇인가 (ti esti)를 추구한다. 쾌락을 앞세우거나 권력을 앞세우는 것보다 더욱 훌륭하다는 건내세?의 개인 혼 문제만이 아니다. 폴로스와 칼리클레스의 주장대로 불의를 거머쥐면 혼 돌보기의 확장성은 죽어버리고 만다. 이 대화편 상대방인 3인의 혼이 제 나름대로의 참된 정치가로서 쾌락과 무절제하고 부정의한 상태로 좋아지더라도, 그만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혼은 쾌, 무절제, 부정의로는 돌보아지지 않는다. 정의에 언제나 대상이 있는 것처럼 부정의와 무절제도 언제나 대상을 향한 무언가다. 그러니 본인은 즐거워서 혼에 도움이 된다 치더라도 그 타깃이 되는 대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영혼의 돌봄은 묻는 것에 있다. 그리고 물음이 이루어지는 방향은 언제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살길이어야 할 것이다.

전쟁과 온갖 부조리를 끊임없이 경계했던 플라톤의 혼 돌보기는 소크라테스의 시작점을 벗어나 더 넓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이번 고르기아스 편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위에서 나온 신화를 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범위를 넘어섰으니 티마이오스 독회 시간으로 미루겠다.

덧붙여서 이번 독회에 인용된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삼각형에 대한 글을 보면 '하나'의 삼각형이란 말이 나온다. 종이 된 삼각형은 다른 모든 종으로서의 도형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있으므로. 그러면 이때 '하나'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진정한 하나는 무엇이길래 多와 구별되는가. 이건 파르메니데스로~~



다음 주는 메넥세노스입니다. 그러면 박종현 판본으로는 한 권이 정리가 되겠네요. 흩어져 있는 대화편 찾아서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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