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베르그송의 기일입니다.
3장은 1~2장의 논의를 바탕으로 자유를 설명하는 파트다.
사실상 <시론>의 주 목적은 끝났고, 1~2장을 통해 설명한 지속을 세밀하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들어가기 전에 지속의 상 아래에 있는 우리의 의식에서 1~2장의 논의를 통해 무엇보다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 즉 자유가 무엇인지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 이전 1~2장의 구조를 먼저 훑어보고 지나가자.
이전 독회에서 사용했던 도식을 다시 가져온다.
1. 순수한 지속(시간) <순수한 이질성>
2. 공간이 개입한 지속.혼합물, 동질적인 것과 연속성이 섞인, 삼투압으로 공간화된 동질적 시간
3. 공간.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성으로 있는 공간
지난번 독회에서 <시론>은 3번부터 시작해서 2번, 1번으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설명을 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지금까지 함께 읽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텐데 도대체 베르그송은 왜 3번 즉 공간부터 설명을 했던 것일까?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설명을 적어본다.
<창조적 진화 강독> 66p
-운동(시간)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반사해서, 공간에서 닿아서, 즉 접촉을 해서 그 접촉하는 측면에서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얘기할 따름이지, 실지로 운동 속으로 들어가서 얘기하면 벌써 말한 것 없어져.-
여기서 B 공간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에 닿아있는 접촉 P를 파악하고 P를 접점으로 A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곧바로 A에서 이야기하는 건 베르그송이 말한 운동, 시간이란 너무나 우리 지성이 생각하기에, 아니 지성이라는 말은 너무 어렵다. 베르그송이 말한 대로 철학 하기 이전에 삶이 있다는 말대로 우리 삶에서 운동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베르그송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모든 것은 단번에 주어지지 않는다.'란 말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철학적 탐구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내 신체는 무엇인가? 시간인가? 물론 시간이자 운동이고 지속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신체는 또한 공간이다. 살아 숨 쉬며 생각하는 것은 제아무리 현상학의 판단중지를 비롯해 이것저것 명상, 초월, 방법론적인 무언가를 실행해도 내 몸, 즉 B로부터 시작되는 사유다. 그렇게 공간에서 타고 올라간 <시론> 제1장, 제2장의 사유는 비로소 접해있는 시간에 닿고야 만다. <사유와 운동>의 [형이상학 입문]과 기타 지성과 직관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론의 해석이 필수적이다. 3번에서 2번으로 올라가는 지성의 탐구, 그리고 2번에서 비로소 1번으로 향하려 노력하는 지성+직관. 온갖 비유와 은유를 통해 전달하려는 지성의 뒷받침 덕에 지금 우리가 이런저런 것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마지막 말에 주목하자. 운동 속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우리가 꺼내서 전달할 수 있는 건 없다. 운동이고, 지속이니까 거기는 오직 flux만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는 flux의 두 가지 운동 중에서 상승하는 운동의 생명이기에 그리고 3~2~1로 향하는 탐구를 했기에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다 보니 너무 설명을 앞서가버렸다.
잠깐
지금까지 설명을 본 사람들은 어? 이거 플라톤 동굴도 생각나고, 운동 ' 속'이란 말이 꼭 도가 철학이 생각나네요?라고 생각하면 정확히 짚은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 동굴과 다르고, 도가 철학의 道와도 다른 점이 무엇인지는 베르그송의 말대로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다. 아직 우리는 <시론>도 완독하지 않은 상태다.
참 말 나온 김에 너무나 아름다운 노자 <도덕경> 제1장을 감상하고 본문으로 돌아가자.
오강남 풀이 <도덕경>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창조적 진화>까지 읽고 다시 읽어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아름다운 문구다. 동서양의 철학 하는 방법은 달라도 형이상학의 방향은 어쩜 이리 통하는 부분이 있는지. 인류의 사유란 너무나 경이롭다.
잡설이 길었다. 제3장 본문으로 들어가자.
기계론과 역동론에 대해 분석하겠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179p부터 182p까지는 179p의 역주 1번과 2번의 내용을 참고하면서 훑어보고 넘어가자. 이 부분은 <시론>이 끝나고 다시 돌아와서 182p 역자 8번에 설명한 대로 소은 박홍규의 논문과 함께 자세히 볼 생각이다.
기계론은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그 기계론이므로 별로 설명할 게 없다. 비판하고 있는 방향도 익숙한 방향이고 그에 반해 역동론은 좀 더 관계를 맺는데 치중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역동론 또한 기계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어떤 힘(자발성, 능동성-다만 여기서 말하는 자발과 능동은 훗날 베르그송이 쓸 그것과 다르다. 베르그송이 쓸 자발성과 능동성은 시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힘을 기계론과 역동론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 이런 두 이론에서 베르그송은 자유를 탐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계론이니 역동론이니 너무 멀어서 뜬구름 잡는 소리같이 들린다면
이제 이 두 이론을 떠나 경험으로 직접 와닿는 걸 떠올려보자. 우리는 지금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을 탐구하고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두 종류의 결정론이 눈에 띈다.
하나는 물리적 결정론이다.
183p부터 물리적 결정론 설명이 시작된다. 쉽게 말해서 A에 A를 더하면 AA가 나온다는 것.
이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184p
-천문학적 현상을 예견하듯이 빈틈없는 정확성을 가지고 그 유기체가 속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행동을 계산해 낸다고 한다.-
186p
-뇌수질의 각 원자의 위치, 방향, 속도가 지속의 매 순간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서부터 우리의 심리적 삶이 동일한 필연성에 복종하리란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따라 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뇌의 주어진 한 상태에 엄밀하게 결정된 한 심리적 상태가 대응한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며, 그 증명은 아직 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볍게 논의하고 넘어가는 뇌에 대한 말은 <물질과 기억>에서 사유가 확장된다.
A에 A를 작용하면 반작용으로 뭐가 나올까?
189p
-어떤 이미지를 끌어들이든 간에, 심리적 사실이 분자운동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결코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운동에서 다른 운동의 근거는 발견되겠지만, 의식 상태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베르그송이 주로 비판했던 국지화 이론, 뇌의 어디 부분이 어떤 걸 담당하고, 어디가 어디를 담당한다며 하나하나 쪼개는 뇌과학은 죽어버린 지 오래다. 오늘날 기억은 뇌 전체에 사르르 퍼져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 같은 게 큰 '도움'을 주면서 두근두근 심장 뛰듯이 신경들이 관계를 맺어 기억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시론의 위 문구의 운동에서 다른 운동의 근거는 발견되겠지만, 의식 상태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건 <물질과 기억>으로 넘긴다.
192p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어떤 사물이 무로부터 나올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짧은 문장이 나중에 <창조적 진화> 제4장이 된다. 그래서 <시론>이 어렵다. 분명 의미가 있는데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툭 던지고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시론만 읽어서는 베르그송을 도저히 알 수 없다.
192p ~ 193p 역주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모순율은 우선 넘어가자 나중에 기억과 관련해서 좋은 본문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다.
물리적 결정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지금 베르그송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말씀대로 없으면 뭐 영구기관 만들 수 있게? 베르그송이 부정하는 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위시한 물리적 결정론에서 자유라는 게 이루어질 수 있냐는 것.
194p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움직일 수 있는 점들이 다시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체계에 대해서만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반복이 가능한 물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생명에서는 별개의 이야기란 말이다.
이때 말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물리적 결정론과 대비시켜서 잠깐 설명해 주고 있다.
195p
-시간은 그 체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이 없다. 동일한 양의 물질과 동일한 양의 힘의 보존에 대한 인류의 막연하고도 공통적인 믿음은 흘러간 시간의 어떠한 흔적도 보존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196p
-흘러간 시간은 보존적이라 가정된 체계에 대해서는 얻음도 잃음도 아닌 반면,
아마도 생명체에게는 그리고 의식적 존재자에게는 논란의 여지없이 얻음이다.-
197p
-시간의 작용에 복종하고 지속을 저장하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벗어나는 의식의 힘.-
자세한 설명은 역주 44번에 나와있으므로 여기서는 넘어가겠다.
이제 이런 생명과 반대되는 물질을 우리의 자유에 집어넣으려 하는 물리적 결정론이 점점 오만해지더니
198p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물리적 현상들만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터인데도, 사람들은 그 명제를 무한히 넘어서고, 형이상학적 편견의 영향으로 심리적 사실들이 틀렸다고 하지 않는 한, 힘의 보존의 원칙이 현상들 전체에 적용될 것이라고 앞서 나간다.-
이렇게 물리적 결정론에서 심리적 결정론으로 나아간다.
199p ~ 204p까지의 설명은 굉장히 간단하다.
심리적, 내적 상태들을
-욕망, 반감, 두려움, 유혹이 구별되는 사물로 그리고 따로따로 명령하는 것을 지금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 사물로 표현-
해서 우리의 수많은 선택들은 그런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어라 어째 괜찮아 보이지 않나?
하지만 심리적 결정론의 문제는 그런 내적 상태를 우리는 행위에 앞서 고정시켜버린다.
그러니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마는데
-그러므로 나는 그 위치에 머물면서 그것을 탐색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끼기만 하면 잠시 사라졌던 그 관념을 재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 사라졌다가 다시 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기억이 보존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면 다시 캐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기억이란 분명 보존된다. 하지만 고정시킨 보존이 아니기에 내가 다시 헤집은 그 순간 이전의 내적 상태는 그대로 있는 듯이 '보였을'뿐 절대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예전의 온전함이 아니다. 우리는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의 역동적 도식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니 지금은 심리적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에 주목하자.
이어서
-따라서 윤곽이 그려진 운동과 자리 잡고 있는 위치의 내적 심상에 그 관념이 특별한 색채를 분명히 전달했어야만 하고, 도달해야 할 목적이 달랐다면 그 색채는 아마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아직도 그런 운동과 위치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다.-
205p
-수행해야 할 운동이 공간적으로는 동일하다 하더라도,(예컨대 만원 지하철에서 할머니가 들어오자 앉아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고 했을 때 이를 똑같이 반복해도), 도달해야 할 목적의 새로움 자체가 그 운동의 표상의 뉘앙스를 변경시키지 않는다는 듯이! (사실은 여러 번 같은 공간에서 반복한 자리 양보임에도 매번 내적 상태는 고정되지 않고 달랐을 것인데도)-
심리적 결정론은 마치 기하학적으로 동일한 위치들이 의식에 주어진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니 어떻게 자유가 있을 수 있겠나.
205p에 재밌는 예시가 있다.
-나는 장미의 향기를 맡는다. 그러면 곧 어린 시절의 막연한 추억들이 기억에 다시 떠오른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추억들은 장미의 향기에 의해 환기된 것이 전혀 아니다. 나는 그 향기 자체에서 추억을 맡는 것이다. 향기는 나에게 그 모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다르게 느낄 것이다.-
어라? 어디서 많이 들은 문장 아닌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생각나는 게 당연하다.
참고로 <시론>은 1889년에 출간된 작품이고, <잃시찾>은 1913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프루스트의 사촌이 베르그송의 아내고,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섰다는 친분, 그리고 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함께 불면증 티타임을 가지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프루스트와 베르그송을 비교한 고 김진성 선생님의 논문은 <지속의 상 아래에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다루겠다. 그리고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도 재밌는데 ...하지만 난 아직 잃시찾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주절댈 자격이 없다. 올해 완독할 생각으로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바빠서 1권도 다 못 읽었다. ㅠㅠ
장미 향기로 돌아가서
중요한 건 추억들이 장미의 향기에 의해 환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딘가에 고스란히 요동치지 않은 상태로 온전히 보존되어 내가 언제든 끄집어 낼 수 있는 기억은 없다. 기억은 보존되지만 역동적이다. 순서대로 나열할 수 있는 계산된 것이 아니라는 것. 뒤이은 문장 '나는 그 향기 자체에서 추억을 맡는 것이다. 향기는 나에게 그 모든 것이다.'
이건 <물질과 기억>을 봐야 이해가 되는데 미리 말하자면 지각은 물질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중에 <물질과 기억>을 보고 다시 돌아와 살펴보자.
이어서
-그러나 장미가 우리들 각각에게 주는 다양한 인상들로부터 그것이 가진 개인적인 면을 먼저 제거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거기서 객관적인 면, 즉 장미의 향기에서 공통적인 영역에 속한 것 그리고 요점을 말하자면 공간에 속한 것만을 보존했을 뿐이다. 게다가 오직 그런 조건에서만 장미와 그 향기에 이름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니까 우리의 개인적 인상들을 서로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는 장미의 향기라는 일반적인 관념에 특수한 성격들을 덧붙여야만 했다. ~ 그리고 당신은 이제 우리의 다양한 인상들, 우리의 개인적 인상들은 장미의 향기에 다른 추억들을 연합한 결과라고 말한다.-
심리적 결정론의 지각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을 덧붙이길 즐긴다. 그리고 설명의 절차로서~ 즉 이건 실재를 모방한 언어와 다름없다.
207p
-의식의 상태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시도하자마자, 그 고도의 개인적인 상태는 서로에 대해 밖에 있으며, 각각이 유의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말로 표현되는 비개성적인 요소들로 해체될 것이다.-
심리적 결정론에 대한 설명이고
이에 대비되는
-전체 가운데에 있을 때, 그것들은 어떠한 공간도 점하지 않았으며 상징으로 표현되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상호 침투'했으며, 서로 ' 속'에 녹아들었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설명이다.
'상호 침투' ' 속' 어디서 보지 않았나?
저번 독회 시간부터 베르그송이 지속을 설명하면서 반복 사용하고 있는 단어다.
207p
-자아는 사실 그 표면으로 외부 세계에 접촉한다. ~~ 자아는 병렬된 것으로 지각한 항들을 인접성에 의해 연상될 것이다. 연상주의 이론이 적합한 것은 그런 종류의 연결, 즉 완전히 단순하고 말하자면 비개성적인 감각들의 연결들에 의해서이다.-
심리적 결정론은 이런 식이다. 병렬, 비개성적, 인접성에 의한 고정된 연결. 사랑, 증오 그리고 영혼을 흔드는 수천의 감정들의 객관적이고 비개성적인 면만을 고정한다. 이렇게 상호 침투하지 않고 병치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영혼이 느끼는 것을 완전히 번역하는데 실패한다.
그에 반해서
208p
-표면의 아래를 파고들어감에 따라, 즉 자아가 다시 자기 자신이 됨에 따라, 의식의 상태들 또한 병치되기를 멈추고 상호 침투하며, 전체가 융합되어, 각각이 다른 모든 것들의 색채로 물든다.
지속의 상하로 들어가면 역동적으로 서로 상호 침투하며 모든 것의 색으로 물들어진다.
209p ~ 211p
교육과 관련된 자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교육을 통한 자유는 소크라테스의 영혼 돌보기와 조금은 비슷한 면모가 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자유란
-자유로운 결정이 나오는 것은 영혼 전체에서이기 때문이다. 행위는 그것이 연결된 동적인 연쇄가 근본적 자아와 더욱 같아지려는 경향을 가질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즉 의식에 직접 주어진 자료를 파악하고, 그것들의 상호 침투하는 연쇄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결정이 자유임을 아는 것이다. 뒤이은 212p~의 설명대로 이런 자유로운 행위는 굉장히 어렵다. 3-2-1에서 3-2에 머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주어졌으니 자유라는 말이 아니다. 주어진 것들에서 더 뻗어나가 주어지지 않은 열린 곳으로 향하는 것이 자유라는 말. 216p에서 다음 독회에서 볼 Y자 그림 설명의 토대가 될 핵심이 나온다.
-진실은, 첫 번째 감정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두 번째 감정이 올 때는 자아가 이미 조금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숙고의 모든 순간에 자아가 바뀌며 따라서 그 자아는 또한 그를 흔드는 두 감정을 바꾼다. 그리하여 상호 침투하고 서로를 보강하며 자연스러운 진행에 의해 자유로운 행위에 도달할 상태들의 동적인 연쇄가 형성된다.-
214p에서 무의식이 나오는데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무의식은 골자가 프로이트와 비슷하다 할지라도 까보면 완전히 다른 무의식이다. 여러 상징을 분석해서 틀을 만들고 끼워 맞추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달리 베르그송의 무의식은 생동하는 무의식이다. 베르그송의 무의식을 분석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결과는 딱 하나뿐이다. '자유' 그리고 이 말 하나로 끊임없이 요동친다. 그러니 어떻게 심지어 본인도 아니고 타인의 말을 듣고 당신의 무의식은 어쩌고저쩌고를 할 수 있겠나. +@쎅무새로 덮어 씌우기까지. 다만 베르그송 영향을 받은 융을 가져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융에 대한 건 융의 저서를 끌고 와서 다음에 더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결정론자들은 이제 과거나 미래로 피신한다고 한다. 역동성? 그런 거 개나 주라지 세상에서 자유로운 행위란 미래의 예견이 불가피하다. 그러니
219p
-미래 행위의 필연적 결정을 긍정하며, 때로는 이루어진 행동을 미리 가정하고 그것이 달리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건 결정론의 적대자들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을 것들에 대한 예견과 선택했을 수도 있는 어떤 다른 편에 대한 기억을 자유로운 행위의 정의에 도입한다.
이 두 가지 자유로부터의 도주를 베르그송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다음 주 독회 Y로 만나보자.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독회는 시론 마무리입니다. 벌써 1차 문헌 한 권이 끝나갑니다. 분량이 좀 많아도 어차피 재독 주간이 있으니 천천히 읽어주세요.
@ 원래는 베르그송을 추모하며 관련 국내 도서를 모두 정리하는 글도 함께 올릴 생각으로 써놨는데 <시론>이라도 마저 읽고 난 후에 올리는 게 순서가 맞겠다 싶어서 미루겠습니다. 다음 6주 차에 시론을 마무리하고 7주 차 재독 주간으로 쉬어갈 때 올리겠습니다.
마르셀이 베르그손 사후 강단철학자들이 아니라 프루스트와 페기가 진정한 베르그손의 후예라고 일갈했다던데 페기 좀 궁금하더라 들뢰즈도 잃시찾만큼은 아니지만 페기의 클리오를 위대한 철학서라며 자주 인용하고.. 까미유 책에서도 나름 한 챕터 다루고 있긴 한데 페기 자체가 학자가 아닌 문필가다 보니 그 양반의 필치를 직접 느껴보고 싶음
심리 상태를 과학적인 명제로 표현함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이, 분석철학계의 심리철학을 마치 겨냥하는 듯한 인상이 드네. 정작 (분석) 심리철학은 거의 20세기 중반에 2차세계대전 끝난 직후인 반면, 베르그송은 진작에 20세기 초부터 논의했구나. 50년대 당대 분석철학계 특유한 철학사를 무시하는 분위기를 고려해도 철학사를 무시하는 철학은 뒷북 치는 짓에 그칠 수밖에 없는 건가 봄...
금주까지 완독은 못 할 수 있으니, 재독 주간에 양해를 구함...
재독기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 부담없이 읽어주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계획변경입니닷 이번 주는 248p까지 하고 다음주 마무리 다다음주 재독으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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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도규칙 당연히 프로이트랑 베르그송이랑 다르죠
@정신지도규칙 프로이트 무의식과 베르그송 무의식이 다르다는 내용으로 썼는데 어디가 맞지 않는다는것인지?
@정신지도규칙 여러상징으로 분석해서 틀을 만들고 끼워맞추려는 프로이트라는 설명에서 이때 상징은 말씀하신 이드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어디 베르그송이 그렇게 나누던가요 프로이트나 그렇게 하고 있지
@정신지도규칙 말씀하신대로 프로이트는 특정개인에 대흔 질적분석 (베르그송 입장에서 생각하면 분석이란 말 자체가 좀 웃긴일이지만) 하지않아서 그냥 베르그송이랑 다르죠 말씀하신 내용과 본문이 뭐가 어긋난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지도규칙 혹시 융의 무의식과 달리 베르그송의 생동하는 무의식은~이라고 쓰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그건 융이 베르그송에게 영향받은 걸 끌고와서 설명해야되는 거라 이야기가 좀 길어집니다
애초에 '정신분석'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쪽은 싸잡아서 베르그송과 아예 결이 다릅니다
@정신지도규칙 아 혹시 생동이라는 말이 거슬리신거라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도 생동한다고 말씀하시는 설명에서 생존에 필요없다고 여겨 올려놓고 내려놓고를 보고 생동한다고 하는 건 프로이트입장에서 말하는 수준의 생동인 것이고. 여기서 베르그송이 말하는 생동하는 의미는 말씀하신 수준의 생동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자아 초자아의 단계별 분석과 욕망이나 유아기의 심리적 잔존으로 기어이 묶어서 설명하는 이런 방식은 베르그송입장에서 생동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정신지도규칙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저도 물론 프로이트 공부해서 잘 알고 있구요. 자아 초자아 같은 프로이트식 의식의 구조를 나누는 것 자체를=제가 상징이라고 말로 표현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네요. 상징을 융처럼 symbol이나 기호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구조를 갖추려고 개념화하는 것을 지칭해서 대충 쓴 말이었습니다. 말씀하신의미로서 상징은 당연히 프로이트랑은 거리가 멀지요
@정신지도규칙 별거 아닌 독회에서 학술적 검토를 위해 쓴 본문 글이 아니라, 시론을 처음 읽는 분들에게 설명하는데 복잡한 용어는 자제하고, 우리가 평소에 쓰는 말을 그대로 빌려와 설명한다고 써서 저렇게 쓰여졌습니다. 애초에 무의식의 논의를 하던 베르그송 시론과 프로이트의 시기적 교차는 상당히 벌어져있음에도 그 둘은 서로 다르다는 걸 <시론>읽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기호,상징,수치화,쪼갬 등의 말로 설명하려고 노렸했거든요
@레알이랑 막 치다보니 오타가 좀 있는데 어쨌드 나중에 <물질과 기억> 독회에서 무의식을 다시 설명하면서 프로이트와 융을 설명할 텐데 그때도 다시 방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좀 더 명확하게 개념을 설명하려고 노력해야곘네요.
@정신지도규칙 해명되지 못한 부분을 보다가 무의식을 발견했다는 것은 베르그송과 흡사하기에 본문에서 쓴대로 골자가 비슷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다만 끼워맞춘다는 말의 의미는 무의식의 발견 과정과 전혀 관계가 없고. 뒤이은 무의식의 해명과 연구와 관련있습니다. 베르그송은 말 그래로 틀을 미리 만들어두는 걸 닫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으로서 오이디푸스나, 성, 욕망 등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지요.
@정신지도규칙 융에게 프로이트가 했다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친애하는 융, 성에 대한 이론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 주게. 우리는 이 이론을 아예 교리로 만들어야 하네.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방벽으로 말야.' 이것만 봐도 제가 위에서 말한 틀이 무엇인지 아실겁니다. 무의식을 과학적 이론으로 포장해 한 쪽으로만 밀어붙이려는 건 어째서 그런 걸까요? 자아 초자아의 경계를 어떤 꼬추모양 틀로 받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입니다.
@정신지도규칙 그럼요 출발점의 문제는 아니지요. 우리가 존재와 무의 모순율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있다'고 상정해야 학문을 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학문의 첫 물음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구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틀이라는지 뭐라고 운운하는 건 아닙니다. 프로이트 본인도 생명본능과 죽음본능으로 본능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연원된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파악되는 실재를 가지고 논하는 것이겠지요. 단지 베르그송 입장에서 첫째 억압이론의 수정을 거듭해서 학파가 유지되는 것에서 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지요.(다시 말하지만 시기가 달라서 이런 말은 따로 없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근본은 억압이론입니다. 여기서 앞서 말한 근본적인 학문의 시작을 빗대어 억압이론의 틀을 말하는 건 좀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정신지도규칙 프로이트가 초기와 후기로 수정을 한다고 해서 제가 앞서 말한 틀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 제가 잠시 착각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베르그송을 읽고 있는 분이 아니신 거죠? 그러면 제가 지금까지 말한 걸 '틀에 박힌 사고~'라는 식으로 이해를 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틀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죠. 프로이트는 틀에 박힌 사고는 아니죠. 말씀하신대로 수정은 하니까요 ㅎㅎ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를 보셨다면 당연히 아시겠네요. 제가 말한 무작정 성적인 것으로 한 번 꼬아서 말하는 걸 좀 벗어나려는 티가 나지요. 불안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요. 거기서 능동적인 해석을 중요시한다고 해도 억압은 말씀하신 것처럼 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지도규칙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개인이 실제로 겪었던 어떤 체험에 대한 억압으로 논하는 것. 거기에 본능은 다시 말하면 입아프니 알고 계시는 것이고, 베르그송은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융만 잠깐 끌고와서 알고 계시겠지만 융은 <본능과 무의식>에서 본능이 무엇인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동기나 이유가 무엇인지를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어떤 내적 필연성에 이끌려서 하게 되는 어떤 특정한 행동방식'이라고요. 무의식의 존재이유를 오직 개인적 체험에 대한 억압에서 찾으려하는 프로이트는 당연히 융의 이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몽환적인 신비주의라고 말하지요.
@정신지도규칙 그럼에도 말씀하신 것처럼 융 또한 프로이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아예 다릅니다. 이건 무의식이고 나발이고 역시 지속의 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때문에. 지속을 먼저 설명해야되는데 적다보니 길어져서 나중에 관심있으시면 독회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와주시고, 대충 억압이론이라는 그 틀마저 없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결국 학문이 안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책을 읽어보셨으면 한다는 말밖에 못 드리겠습니다. 너무 길어서
@정신지도규칙 그렇죠 이미 댓글에서 말한대로 융도 결국 억압이론에서 못 벗어나고 있지요. 본인도 그걸 염두하고 책을 쓰고 있으니까요. 듣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씀하신대로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하여 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 억압이론의 본질이라 아예 베르그송과 다르다는 것 뿐입니다.
@정신지도규칙 베르그송은 자유연상과는 또 전혀다릅니다. 애초에 반복이란 것을 상정하지 않으니까요.
@정신지도규칙 자유연상을 하는 이유는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정신지도규칙 ㅎㅎㅎ 아예 잘 못 알고 계십니다.
@정신지도규칙 점점 의구심이드는데 제가 다르다고 하는 걸 부정하고 싶으신가요? 프로이트 이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으니 다른 건 굳이 잘 알지 못하지만, 그건 프로이트의 이런 것이고, 그건 이런 것이라는 말씀으로 덮어보려하시는듯 싶어서요.
@정신지도규칙 어떤 방향의 대답을 원하시는지 궁금해서 여쭈어봅니다. 왜 다른지 설명하라고 하시면, 이미 독회에서 지금까지 해 온 분량만 읽어도 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서 제가 이 댓글로 공간부터 시작해서 다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요. 대화를 할수록 안타까운 점이 저는 베르그송과 프로이트를 염두하고 댓글을 남기고 있는데 상대방은 프로이트만 알고 그건 이럴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예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아서요.
@정신지도규칙 저런...제가 말한 것 어디에 프로이트 내용이 아닌 게 있을까요. 예컨대 위에서 말한 자유연상도 무의식을 탐구하는데 쓰인 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실겁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본인께서 '무의식의 탐구에만 쓰이진 않을겁니다.'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이 말은 즉 무의식 탐구에도 쓰인다는 것이죠. 그러면 제가 한 말은 잘못된 내용이 아닙니다. 자 여기서 원하시는 대로 구별이됩니다. 베르그송은 그런 거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정신지도규칙 프로이트도 무의식 영역에는 '시간x +이미지같은 관념으로 묶이지 않은 저장소같은 무의식 속 이드를 말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베르그송과 다릅니다. '~베르그송같이요. 지각기관을 베르그송도 의식으로 잡고 있는건데.' 이 부분은 아예 틀렸습니다. 어디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지 여쭤보고 싶네요.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댓글로 베르그송과 프로이트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달라는 걸 들어드릴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냥 논문 몇개 찾아보시는 게 가장 빠를 수도 있겠습니다.
@정신지도규칙 혹시 저희가 나눈 이 댓글 내용을 그대로 캡쳐해서 다른 글에서 사용해도 될까요. 나중에 제가 기회되면 융과 베르그송으로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베르그송 읽으신 분들은 굳이 설명 안해도 정신분석과 베르그송이 어떻게 다른지 이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본인이 다 설명해주셔서 제가 따로 쓸 필요가 없을정도에요.
@정신지도규칙 아 깜빡하고 안 적었는데 마지막 댓글에 상호침투라는 개념이라고 말씀하신 건 제가 본문에서 쓴 상호침투를 말씀하신 건가요? 그건 프로이트와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아예 우리가 댓글에서 논하고 있는 것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서. 혹시 <시론>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라서 찾아오신 거라면 프로이트의 의식 무의식과는 전혀 별개의 내용이니까 우리 이 대화는 시작부터 잘못된 방향이었던 거죠,
@정신지도규칙 아무쪼록 언제 꼭 <시론>부터 차근차근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독회에 사람이 얼마 없어서 이런 댓글도 반갑네요. 다만 5주차동안 읽은 걸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고 뒤이어 <물질과 기억>에서 논의할 걸 미리 앞서가지고 댓글로 설명하기엔 너무 귀찮아서 ㅠㅠ
@정신지도규칙 우선 베르그송은 의식과 무의식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때 말하는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프로이트의 의식 무의식이 아니라고 쓰셨네요. 그렇다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무의식이란 표현을 쓸 수 있나싶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조금 이상하네요. 그...무의식이 프로이트가 말한대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시기상 프로이트 무의식이 알려지기도 전인데...
@정신지도규칙 융 개념과 프로이트 개념은 다음 독회가 아니라 재독기간에 할 예정입니다. 사실 정신분석이 시간낭비라서 굳이 길게 쓸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있구요. 그리고 자꾸만 상호침투라는 말씀을 사용하시는데 상호침투 위에 제가 쓴 베르그송 본문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면 그렇게 사용하시면 잘못된 사용이지요. 그걸 본인은 이드 자아 초자아가 서로 융합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사용하시는데 베르그송에 있어서 상호침투는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프로이트 이론을 덧씌워서 베르그송을 읽으면 하나도 이해되는 부분이 없을거에요.
@정신지도규칙 창조적 진화를 갑자기 언급하시는 것도 전혀 관계가 없고, 잘못된 이해라서 게속 베르그송 책을 안 읽어보고 말씀하시는 게 티가나네요. 본인이 말씀하신 자아와 이드를 중시하면서 프로이트를 말씀하고 계신데 정작 프로이트의 새로운 정신분석을 보면 성이론은 꾸준하거든요. 수정을 이루어내고 있다지만 억압이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여전하구요. 그런 부분에서 베르그송과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정신지도규칙 독회를 계속 즐감이 아니라 책을 읽으셔야죠. 제가 쓴 본문은 책을 읽으면서 읽으라고 쓴 거라 본문만 보면 이해가 안됩니다....
@정신지도규칙 원래는 독회를 잘 참여하셔서 베르그송 책도 읽었는데 이해를 못하시는 가 생각해서 댓글을 쭉 남겼는데, 점점 베르그송은 읽은 적 없고, 단편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프로이트에 빗대어 어? 이거 이런거 아님? 이라고 말씀하시니 제가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레알이랑 와! 영업 성공! 우선 읽으시면서 독회 1회차 본문부터 차근차근 읽어주세요. 네 베르그송이 말하는 창조적 진화의 진화는 다윈의 진화와 달라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재밌게 읽으신 거 같은데, 나중에 거기 내용을 위주로 인용문을 뽑아서 시간나면 글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