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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는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초기에 활동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현대에도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다원주의'로 모든 정치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방법론적 일원론에 반하여, 민주주의와 정치의 재정의한 바가 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저에 있는 윤리학적 전제를 중심으로 정치를 이해하는 관점(주로 이를 활용하는 것은 정치철학이다)나 이익집단 간의 조절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해하는 관점(정치학에서 다원주의가 이 관점을 채택한다고 볼 수 있다) 등을 부적절 하다고 말한다.
샤츠슈나이더는 명백히 정치를 협의보다 갈등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그에게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는 '갈등의 범위'이며, 이 갈등을 전략적으로 확대 및 통제하는 일이 모든 정치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경향은 첫번째 장에서부터 드러나는데, 그는 이 책을 정치적 현상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가 등의 정치사회학적인 기제에 천착한다. 이를 바탕으로 실제 정치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두번째 장에서부터이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실은 그는 다소 정치철학자와 유사한 방식의 설명을 행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샤츠슈나이더 역시 정치학자답게 경험적인 사례들 또한 보조적으로 활용하지만, 철학자처럼 철저하게 모형세계를 동원한 논증을 펼치는 방식을 선택할 때도 많다. 그가 상기한 방법론을 사용하는 주된 이유는 경험적 사실 이전에 개념의 작동 방식을 먼저 조명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사실의 분석 이전에 정치적 가능성의 모형을 먼저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정치적 행위에 대해 논리적인 과정과 결론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철학자들과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그는 정치조직의 성격은 체제 내에서 이용되고 있는 갈등의 성격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정치가 무엇을 두고 일어나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이러한 가정 없이는 정치의 이해가 어렵다.
또한 샤츠슈나이더는 그간의 민주주의 이론들이 근본적인 가정에서부터 어긋나 있었다고 역설한다. 흔히 "인민은 너무 무지하기에 민주주의는 실패한다"라는 식의 비판이 제시되고는 한다. 하지만 샤츠슈나이더는 인민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민이 정치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이를 통해 '합리적 시민'에 도달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허황 되었다고 본다.
상기한 이유로 그는 민주주의의 개념이 재정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지도자들과 조직들이 공공 정책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경쟁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일종의 경쟁적 정치 체제"이다.
이하 지면들에서는 해당 저작에 대한 분석과 논평을 적극적으로 행하고자 한다. 감상들의 제목은 본서의 장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1. 제1장:갈등의 전염성
샤츠슈나이더는 이 장의 시작점에서 갈등이 갖는 전염성은 중요한 정치적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갈등에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요소가 포함 되어있다. 그리고 의회에서의 논쟁, 선거운동, 파업과 같은 정치적 활동들에서도 이러한 속성은 일부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그는 모든 정치의 근저에 '갈등'이라는 언어가 자리잡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 싸움은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로는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소수들이 있다. 두번째로는 전자보다 훨씬 더 많은 구경꾼들이 있다. 그는 구경꾼들은 싸움의 결과를 결정한가는 점에서 갈등—싸움 기제의 필수적 요소라고 본다. 구경꾼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갈등이 야기하는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상술한 사항들은 모든 정치의 기본적 양상이다. 앞선 생각들이 바로 샤츠슈나이더가 정치를 정의하는 바이다.
구경꾼의 규모는 곧 전염성의 정도를 말한다. 또한 구경꾼의 비중립성은 군중이 싸움의 결과를 바꿀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샤츠슈나이더는 상술한 설명을 바탕으로 이 두 가지 명제를 이끌어낸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정치의 핵심은 대중이 갈등 확산에 개입하는 방식과 그것의 관리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거의 모든 정치 이론은 누가 싸움에 참여할 수 있고, 누가 배제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고 하겠다"라고 적었다(이는 마치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이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 것을 상기시킨다. 결국 누군가가 어떠한 정체의 구성, 혹은 구체적인 법률 및 정책에 대하여 이해관계자인지는 정의될 수 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누군가를 적대 세력이나 배제된 자들로 판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갈등을 모든 정치의 근본적 기제로 가정하더라도 항상 극단적 결론을 낳지는 않는다. 이 점은 역설적으로 지금 다루고 있는 샤츠슈나이더의 결론이 잘 보여준다.)
이후 그가 거론하는 갈등의 또 다른 요소는 편향성이다. 갈등은 본질적으로 파당적이다. 갈등에 개입하는 군중은 중립적일 수 없으며, 힘의 균형의 변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원리에 대한 검토가 유명한 『연방주의자 논집』의 열번째 논문 이후로 진척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10번 논문은 제임스 매디슨이 작성한 것으로, 공화정의 근본적 문제를 파벌로 규정하고—이때 파벌은 다수든 소수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공통의 열정이나 이익에 의해 결집된 사람들을 말한다—그 해악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관해 논한다. 매디슨은 파벌의 원인이 인간 본성에 뿌리한다고 보고, 원인 제거—이는 파벌의 원천인 자유를 없애거나, 모든 사람의 생각과 조건을 완벽히 동일하게 만드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불가능 하거나 부당하므로 파벌의 효과를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오늘날에도 파벌과 분산된 이해관계라는 키워드를 축으로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사츠슈나이더는 바로 파벌의 존재와 갈등의 조정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를 선구적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상 매디슨의 귀결점이 샤츠슈나이더가 비판한 당대 다원주의자들과 유사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매디슨은 갈등의 관리를 결국 사회계약과 합리적 협의의 관점에서 정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10번 논문은 이익집단 정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도 자주 인용되고는 한다—후술하겠지만, 샤츠슈나이더는 이익집단 중심의 정치를 비판하고, 정당 중심의 정치를 옹호한다.—결국 한 가지 글을 가지고 수많은 서로 반대되는 연결고리가 도출된 셈이다.)
그는 미국 정치사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들을 해당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실력을 보유한 소수는 갈등을 사사화 하고 군중인 다수는 갈등을 사회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일반화 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행태는 항상 대립적이다. 즉, 갈등을 이룬다(소수와 다수가 항상 대립한다는 전제는 전술한 매디슨의 전제를 계승한 것이다.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 이론을 위한 서설』에서 훌륭하게 요약했듯이, 이는—외부의 견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는다면 소수는 다수를 억압할 것이다. 외부의 견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는다면 다수는 소수를 억압할 것이다.—매디슨주의의 근본적인 가정이다.) 그리고 이 갈등의 결과는 다시 상기 내용처럼 갈등의 범위 및 규모에 달렸다고 강조된다.
그는 흑인 민권운동을 이 '갈등의 전국화'에 성공한 사례로 뽑는다. 흑인들은 남부에서 북부로 대거 이동함으로 하여 더 광범위한 지역에 기반을 둘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전체 흑인 인구 역시 증가했다. 이제 갈등에서의 힘의 균형은 변한 것이다. 그들은 남부에 거주하는 13%의 미국인 뿐만 아니라, 그 밖의 87%의 미국인들에게도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샤츠슈나이더의 사례 기반 설명이다.
따라서 그에게 가치중립적인 정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갈등을 사사화 하려는 행태를 나타낸다(그의 말마따나 가치중립적인 정부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부는 당위를 제시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말로 가치중립적이라면, 그 정부에게는 유효한 판단 기준 자체가 부재한다는 뜻이다. 그 말은 곧 정부가 스스로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잃음을 가리킨다. 판단할 수 없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한 명령이나 당위 역시 제시할 수 없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면 타인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명령을 내리라는 명령을 자신에게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가치중립적인 정부가 불가능 하다는 것은 정부가 하나의 인격으로써 스스로 가치판단을 한다는 의미는 포함하지 않는다. 정부의 가치는 언제나 구성원의 일부에 의해 설정된다. 정부 자체는 인공적 기관이고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이므로, 스스로가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다.) 그에게 정부란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구성되어, 궁극적으로 갈등을 사회화 하는 도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정당, 이익집단, 법원, 언론의 자유 등의 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샤츠슈나이더의 설명이다.
그는 이러한 갈등의 양상이 노동조합, 정당 등의 모든 사회집단 전반에서 발생하며, 경쟁과 가시성이 갈등의 확장을 결정한다고 결론을 낸다. 즉, 그는 경쟁적 정당과 투명한 정보의 공개라는 두 축을 거론하며 이 장을 끝마친다.
요약하자면, "갈등의 확장력을 통제하는 절차가 곧 정체의 양상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정부의 권력과 자원의 규모에 관계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2. 제2장:이익집단 체제의 범위와 편향성
그는 갈등의 크기와 범위 면에서 이익집단 정치와 정당 정치를 서로 대립시킨다. 그에 따르면 이익집단 이론은 수많은 저명한 이론가들에 의해 강화 되었지만, 그럼에도 기본적 정치이론의 설명에 있어 취약하다.
중대한 것은 공익집단과 특수이익집단이 구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여기서 그는 공익에 관해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따 "공동체의 모든 혹은 실질적 의미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의 보편적인 이익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 기반으로서 국익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국민은 없듯이, 공동의 이익이 없다면 공동체 역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 추론한다(그러나 이것은 무슨 말인가? 공동체가 있으니 공적 이익도 있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은 단순한 순환논증에 불과하다. 공적 이익이 있기에 공동체가 있고, 공동체가 있기에 공적 이익도 있다고 말하면 궁극적으로 그 두 가지의 존재는 무엇이 증명하는가? 이는 분명히 불충분한 설명이다. 공적 이익의 존재 여부는 이것만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공동체의 존속 자체가 공동이익의 존재를 말해준다고 본다(마찬가지로 공동체가 무엇 때문에 존속 중인지에 대한 여부를 단순히 공동이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차라리 공동체는 공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는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특정한 공동체가 실제로 존속 중인 이유가 어떻게 '공동의 이익에 부합해서' 만으로 정리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온두라스의 무능한 정부는 공동의 이익에 부합해서 여전히 존속 중인 것인가?) 이에 반대되는 개념은 특수이익으로서, 이는 소수의 사람이나 분파만이 공유하는 이익으로 정의된다. 특수이익은 배타적인 사적 소유와 거의 유사한 양태를 보여준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완벽한 동의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공동이익은 어떻게 정초가 가능한 것일까? 99%의 이익이 1%의 이익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특수이익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이에 대해 법은 항상 반대자를 가지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가 공적 이익을 정의한다는 논변을 내세우고 있다(그러나 법이 한 사회 내의 공적 이익을 정의한다는 주장 자체가 법철학적인 논란에 휩싸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자연법론에서는 오히려 이미 정의된 공적 가치의 기준을 법이 외재화 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허버트 하트와 같은 법실증주의자들 역시 법을 내적 관점과 외적 관점으로 구분한다. 이때 내적 관점만이 샤츠슈나이더가 언급한 사항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론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현실의 규명이다. 바로 이런 기능적 이유에서, 모든 것을 특수이익으로 보기보다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을 구분하는 편이 설명에 더 용이하다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설명이다(단순히 '더 용이하기에'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은 정당한 규범 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당 방식의 '정당성'은 전혀 증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정 위에서 도출되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무엇이 있겠는가? 게다가 설명에 더 용이한 이론이 꼭 현실을 규명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부분은 현대 과학철학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항목인데, 샤츠슈나이더는 이를 매우 단순히 처리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은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의 구분이 주관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익에 대한 모든 논의는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정치학의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익에 대한 논의 역시 특정한 설명변수들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미제조업협회의 회원과 전미아동노동위원회가 관여하는 정치적 영향력은 다르다. 전자는 제조업 당사자들의 특수이익과 연관되지만, 후자는 실제 노동 중인 아동만 포함하지 않으므로 그 이익이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샤츠슈나이더는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의 구분은 정치학 연구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 없이는 서로 다른 개념을 무리하게 혼융시키는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구분을 수용한다면 이익집단 정치라는 주제의 외적 경계 중 하나를 얻어낼 수 있다.
그가 이 다음으로 거론하는 개념은 조직화이다. 그에 따르면 조직화 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하는 이유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이다(샤츠슈나이더는 "여기서 문제는 이런 구분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판단이 부당한 이유는 앞서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논한 주석에서 다룬 것과 동일할 것이다.) 지금까지 (샤츠슈나이더의 시대에서) 조직은 상호작용의 한 단계 정도로 서술 되어왔다. 하지만 샤츠슈나이더는 조직화 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은 단순히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을 통해 "보편적인 집단 중심 정치이론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이익집단 정치를 본질적인 것으로 분석하는 자세"를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결국 이것은 '이익집단 정치가 보편적 분석 방식으로 도입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적성에 봉사하는 설명이 아니고서야 무엇인가? 이런 구분을 도입해야 하는 이유가 애초에 어떠한 규범에 묶여있는 셈인데, 그는 이것에 관한 가치판단을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구분의 필요성에 관해 주장하는 바는 받아들일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부족하다.) 그에 따르면 지식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학문의 발전은 서로 다른 것들을 구분하고, 연구 소재별로 나누어 정확히 조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익집단 이론가들은 모든 범주를 파괴하고 보편적 관점에서 주제를 논한다. 그것은 대단히 낯설고, 사태의 이해에서 먼 방식이다. 여기까지가 샤츠슈나이더의 생각이다(그는 이 대목에서 전통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요지는 이익집단 이론가들이 낯설은 방식을 채택하기에, 그것은 사태의 이해에서 멀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학문적 방뱝론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적 방식이 옳고, 낯선 방식은 틀렸다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논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앞선 해명들을 바탕으로 조직화 된 특수이익집단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특수이익집단은 배타적이다. 그는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특수이익집단을 이익집단 체제라고 정의한다. 샤츠슈나이더는 모든 이익집단 체제가 일종의 정치적 영향을 구가한다고 가정한다. 그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분석 대상이 되는 주제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집단이 어떠한 이익을 위해 스스로를 조직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 편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직 자체가 어떠한 활동의 편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목록을 검토할 때 발견되는 사실은 이익집단 체제의 규모가 예상되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전국협회』에 따르면 이익집단의 대다수는 기업이다. 또한 이 자료에서 약 37.3%는 회원수가 20인 미만이었다. 그리고 미국 여론조사 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기업인들이 자기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연락할 가능성은 육체노동자들보다 4배 가량 높으며, 대학 졸업자들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 비해 자기 지역 국회의원에게 연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향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익집단 정치는 전체에 대한 대표성이 부족하고, 상층계급 편향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 편향성이 이익집단 정치가 보편적 형식이라는 귀납적 명제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다고 본다.
게다가 그에 따르면 이익집단 정치는 전술적으로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익집단 조직들은 다수의 이익을 대표하고자 할 때에도 대개 전체 지지자 중 극히 일부만을 동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미국 여성 중 0.05%만이 여성유권자연맹에 가입해 있으며, 미국 자동차 운전자 중 6%만이 미국자동차협회에 가입해 있다. 따라서 정당 정치에 비해 이익집단 정치가 성취할 수 있는 결과는 미미하다는 것이 그의 논변이다.
그렇다면 이익집단 이론은 왜 주류가 되었을까? 샤츠슈나이더는 이익집단 이론이 경제결정론을 구성하는 개념들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경제결정론의 논리는 갈등의 기원을 찾아내고, 이를 근거로 결론을 추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종류의 사고가 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경제결정론적 연구 대다수의 성공 사례만을 편향적으로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갈등의 기원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싸움의 상대방과 부딪힐 때 애초 입장을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이건 그다지 납득할 만한 좋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논증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주장을 펼칠 때 일체의 통계적인 자료나 연구 결과 등을 덧붙이지 않는다. 따라서 단순히 개인의 직관에 가까운 내용일 뿐이다. 위 논증의 낮은 개연성을 감안하면, 이를 바탕으로 갈등의 기원 이해가 그 성격 이해로 이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일단 하나의 갈등이 정치화 되면, 참여자부터 내용, 사용 가능한 자원 등의 모든 것이 변한다. 그 이유는 그 갈등에 또 누가 참여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기 사항이 샤츠슈나이더의 판단이다.
그는 이익집단 정치와 정당 정치를 종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를 갈등의 사회회로 인식하기를 제시한다. 이 과정에 따를 때, 정치는 다음과 같은 양태를 보인다.
"먼저 갈등은 높은 수준의 긴장을 가진 집단들에 의해 시작된다. 이들은 그 갈등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까닭에 상반되는 자신들의 주장을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다. 이들 집단의 갈등이 사적인 영역(경제적 경쟁, 사적인 협상과 흥정, 기업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 혹은 조직 구성원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의 관점)에 머무는 한, 어떤 정치과정도 시작되지 않는다. 오직 좀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때에만 갈등은 비로소 정치화 된다. 이익집단 정치는 갈등의 사회화에 포함된 하나의 단계로 서술할 수 있다. 이런 분석에 바탕할 때, 이익집단 정치는 정당 정치를 포함하는 모든 정치활동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가 된다."
3. 제3장:이익집단 정치와 정당 정치
그는 앞서 분석한 사항에 이어 이익집단의 압력 전술이 광범위하게 적용될 때 어떤 한계가 있는지 논한다.
이전 장에서 본 대로, 주요 이익집단은 굉장히 적은 회원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의회에 대해 정책적 압력을 구사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집단들이 어떠한 연쇄반응의 원천이 될 수는 있겠지만, 결과는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샤츠슈나이더의 추론이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가장 많은 참정자들이 동원된다. 과연 이들 중 이익집단 체제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그에 따르면 대선 시기에 실시되었던 여론조사에서 미국노동연맹—산별회의(당시 미국의 특수이익단체 중 가장 규모가 컸다)의 회원 중 절반만이 대선에 동원되었다. 또한 해당 조직 성향에 가까운 민1주당에 투표한 조합원은 전체 동원 시에 얻을 수 있는 지지표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표는 대략 1백만 표 정도였다. 미국에서 가장 큰 특수이익집단이 겨우 이 정도 비중의 압력 밖에 행사할 수 없다면, 평범한 이익집단들은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정당 정치에 비해 이익집단 정치의 동원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것이 샤츠슈나이더의 분석 결과이다(하지만 그의 결과는 그 자신이 이익집단 정치의 의의를 다소 오인한 데에서 문제가 있다. 이익집단의 핵심 영향력은 대중 동원이 아니라 의제 설정, 입법 지원, 규제 설계에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서 이러한 기능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정리만으로 "이익집단 정치는 영향력이 없다."라는 식의 일축이 이루어지기에는 불충분하다.)
게다가 그에 의하면 어느 의원 후보가 조직 노동의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오히려 유권자들의 지지도가 하락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이것의 실증은 1944년 선거에서 전미제조업협회의 지지가 해당 후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쳤음이 드러나며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익집단은 영향력이 작은데다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조직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는 이 결론을 바탕으로 이익집단 정치와 정당 정치는 다른 층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정당은 다른 정당과 경쟁한다. 특수이익집단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특수이익집단의 정당에 대한 협상력을 약화시킨다. 왜냐하면 경쟁적인 정당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제 정치에서는 이익집단이 정당 내부의 파벌 구성 요소로 흡수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경우 이익집단은 외부 압력자가 아니라 내부 규칙의 일부가 된다. 샤츠슈나이더의 틀에서는 이 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 요컨대 그의 이론은 강력한 정당론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반면, 정당의 내부 분화 현상은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샤츠슈나이더에 의하면 '다수'의 형성은 이익집단 이론보다 정당 정치 이론으로 설명될 때 더 적합하다. 양당제는 자동적으로 다수파를 만들어내는 기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한 비유를 통해 과정을 설명한다. 만약 연주회장의 출구가 단 두 개 뿐이라면, 어느 한쪽은 다른 쪽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용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양당제가 다수파를 만들어내는 방식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이익집단의 비당파성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이익집단은 갈등하는 두 정당 모두와 협상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양당제 하에서 이익집단은 둘 중 하나의 정당에 대한 종속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기업 집단이 공화당 후보만을 지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공화당은 그 이익집단을 실효지배 중인 것이다. 왜냐하면 공화당은 이를 통해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들에게는 공화당 이외의 다른 대안 정당이 없다. 그들이 선거를 중시하는 한 그들은 일반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당들은 자동적으로 선거에 관한 독점권을 가진다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분석이다. 정당은 이익집단 모두를 포괄할 만한 특질은 없지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기 때문이다(그의 예시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이론은 양당제 상황에서만 완전한 설명력을 지닌다. 샤츠슈나이더는 계속해서 유독 '두 가지 선택지', '두 가지 중심 세력' 등의 구도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이익집단과 정당의 기제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형태의 정당 체계를 갖추고 있다면, 오히려 그의 설명의 조건들을 전부 변경했을 때 이익집단 정치가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그가 자신의 이론이 '정치의 본질'이나 '민주주의의 본질'을 규명한다고 선언한 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일반적이라고 말하려면 "양당제는 모든 정체, 혹은 적어도 민주 정체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라는 전제를 도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전제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증명은 커녕 언급조차 된 적이 없다.)
정당은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극단적으로 단순화 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조직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행동 방식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공적 이익이 조직화를 이룰 만큼 강력하다면, 그에 맞는 조직이 형성될 것이라고 간주한다. 또한 이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러한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정치 행동 이론임을 제시한다.
4. 제4장:갈등의 치환
샤츠슈나이더는 정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각 세력들이 어떻게 나뉘는가에 달렸다고 말한다. 한 균열이 다른 균열로 변화하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갈등 구조가 생기고, 이에 따른 결과도 변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갈등의 참여자, 유형, 교차 둥등의 변수 하나하나는 모두 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이에 따라 새로운 다수파와 권력분포를 만들어낸다. 크든 작든 균열이 변하면 그에 따라 상호적대인 세력의 구성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치 과정에서 통합과 분열은 동일한 과정의 일부임을 부각한다. 상호적대적인 파벌 각각이 자신들에 대한 지지를 통합하지 않고서야 갈등은 발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갈등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통합하려고 한다. 갈등은 발전할 수록 강렬해지며, 이에 따라 양 진영의 내적 통합은 더욱 강화된다. 여기까지가 상기한 샤츠슈나이더의 가정이다.
그는 이 가정에 따라 정치적 균열들은 상호 양립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명제를 세운다. 어떤 갈등의 발전은 다른 갈등의 발전을 막기에, 모든 경쟁자들이 기존 관계 및 우선순위를 변화시키기 전까지 갈등의 구도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갈등 또한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는 무수한 갈등이 있지만, 이 중 몇몇 것들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식별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며, 민주주의는 그 덕분에 존속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의 근본 전략은 갈등의 우선순위를 관리하고 갈등을 통제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낸다. 이때 대안의 정의는 갈등의 선택을 의미하며, 그 선택을 행하는 이가 실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다(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력의 탄생을 다시 갈등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무한 퇴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갈등 A가 우선화 되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권력이 생성된 상황이다. 그런데 왜 갈등 A가 우선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A와 경쟁했을 이전의 갈등 B를 거론해야 한다. 그런데 또 B는 A와 같은 방식을 거쳐 주류 갈등이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시 거론되는 C~추정될 수도 없을 정도로 먼 갈등 역시 같은 방식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갈등은 어떻게 주류가 되었다는 것인가? 그의 이론을 이 문제를 난해하게 만든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그것은 정치의 본질을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한편으로 그의 말은 선결문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 역시 든다. 갈등과 정치의 본질의 관계에 관한 그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정치적 결과는 갈등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 "갈등의 구조는 어떤 균열이 우선되는가에 달려 있다." = "그러므로 정치의 본질은 갈등의 우선순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론은 사실상 그 기반이 되는 두 전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문장'이 아니라 '명제'라는 관점에서 "정치란 갈등의 우선순위를 통제하는 것이다."는 사실상 "정치적 결과는 갈등의 우선순위에 의해 결정된다."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갈등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정의해 놓고, 그 정의로 정치 현상을 설명하면, 이는 설명이 아니라 개념의 재귀라고 보아야 적절할 것이다. 정치가 왜 갈등의 통제로 환원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독립적인 논증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이슈가 자유롭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호의 우선순위를 확립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는 범주 오류에 속하는 표현이다. 정치는 우선순위를 필요로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회는 규범적으로 모든 이슈를 평등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중간 전제 없이 기능적 필요를 규범적인 주장으로 도약시키는 것은 명백히 논리적 비약이다. 위 문장은 우선화의 정당성이라는 규범적 의미를 도출하고 있으므로 범주 오류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략은 바로 갈등의 치환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기존 갈등을 전혀 다른 것으로 대치하면서 모든 갈등 구조를 뒤바꿔놓는 권력이라고 정의된다.
이어서 그는 정치 지도자들이 확고한 신념이 없거나 앞뒤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해명한다. 여기서 핵심은 권력이 전적으로 갈등과 관계되며, 그것이 다기능적이라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갈등의 우선순위를 쉽사리 확정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다른 모든 입장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당들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근거에서 의견일치에 이를 수 있다. 보수 정당은 승리의 대가로 좀 더 개혁주의적이게 될 수 있고, 진보 정당은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요구사항을 완화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의 견해는 중앙값으로 수렴하게 되지만, 그들은 여전히 상대방의 동기를 불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까지가 샤츠슈나이더의 분석이다.
2편까지 다읽었는데 뭔가 엄청집요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