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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5장:정치의 전국화
그는 지난 세기 미국 정치의 이해를 위해 1846년 선거를 분석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이 분석을 통해 20세기 초의 공화당 30년 우위 상황을 규명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유지된 주된 원인을 정당과 유권자 간의 지지 패턴에서 찾는다. 이 정렬이 매우 안정적인 동시에, 30년 동안 미국 정치의 속성을 정의할 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설명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이 상황은 인민주의 운동과 그 주변적인 역학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여기서 인민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벌어진 급진적 농민 운동을 일컫는다.) 인민주의 운동이 8개 주의 입법부에서 강력한 우위를 점하자, 남부 지역 보수파들은 매우 강경한 대응을 펼쳤다. 그들은 민1주당과 인민당의 연합 선거를 주도했으며, 흑인과 빈민의 참정권을 박탈하자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현재 입지와는 달리, 이 당시 민1주당은 보수 정치의 중심이었다. 반대로 공화당이 진보적인 편이었다. 이러한 국면이 변하게 된 계기는,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이 장에서 설명하는 것과 반대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즉, 대공황 시기가 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등의 '정치의 전국화'가 이루어지면서 두 정당의 경향이 역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공황은 전국적 개입을 필요로 했고, 이에 루스벨트가 응함으로 하여 미국의 정치적 논제는 광범위하게 전국화 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루스벨트를 필두로 한 민1주당계 정부가 진보적 노선을 견지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의 국면이 변했다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설명이다.) 사실 북부에 있었던 보수파들 역시 이와 유사한 행보를 보였다. 그 결과 민1주당의 영향력은 북동부 및 중서부에 거의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공화당은 이 지역들 대부분에서 영향력을 구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지형은 역사상 가장 '지역적인' 선거를 만들어냈는데, 실제로 북부의 민1주당과 남부의 공화당은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또 다른 원인으로 남부 민1주당 보수파가 남부 지역 장악을 대가로 전국 단위의 정치를 포기했다는 점이 있다.
이 같은 극단적인 지역주의가 성행할 때에는, 유권자들이 더 이상 유효한 대안 정당을 찾지 못하므로, 해당 지역 투표 가치 자체가 하락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점차 지역주의가 극대화 되며 정당 간 경쟁 구도가 일부 지역에서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물론 이는 지역 단위 경합이 줄었다는 의미만을 가진다.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에서 갈등 자체가 봉합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으므로, 이것이 협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샤츠슈나이더의 가정에 관한 근거의 성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반면 북부와 남부 사이의 경계 주들에서는 정당 경쟁이 줄어들지 않아 유의미한 변수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샤츠슈나이더는 지역주의가 정당 조직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루스벨트 이후의 미국 정치에서 다시 경합 주들이 늘어난다는 지표를 근거로, 정치의 전국화는 이와 반대되는 효과를 가진다고 판단한다(그러나 우리는 샤츠슈나이더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보다 150년 정도 전에 토크빌이 그의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잘 거론했듯이, 지역 중심 정치에는 충분한 장점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역 단위의 정치 과정은 공적 권력을 분산시킨다는 점에서 하나의 견제책이다. 또한 분산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기에 더욱 적절한 구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시 중앙 정치를 견제하는 사적 결사들은 사회적 이해관계의 적극적 표출을 가능하게 한다. 반대로 중앙화가 가지는 단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도하게 전국화 된 정치는 무조건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소수 지역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있으며, 중앙 통제형의 의사결정 형식을 비대화 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집권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권력이 특정 방향으로 과하게 집중될 경우 전제의 위험성이 자리하게 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정도에 이른다면, 샤츠슈나이더가 설명한 것과는 정반대로 인민의 참정권이 가지는 위력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6. 제6장:정치체제의 한계
이론상으로 민주공화국에서는 국민 전체가 정치 공동체에 속한다. 하지만 그중 약 30~40% 가까이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이는 샤츠슈나이더가 제시한 통계에 따른 가정이다. 그도 주석에서 언급하다시피, 이 논의에서 투표 불참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에 대한 그의 가정 중 성립해야만 하는 것은, "투표 불참자가 전체에서 '상당한—그들이 참정할 시 명백히 정치 지형에 변화를 가져올 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이다.)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법 외적인 요인에 의해 시민 중 상당수가 정체에서 배제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참정권 행사는 여부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지정되며, 정치 참여자와 비참여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음이 예고되고 있다. 특히 그는 이것이 법률에 의해 부정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이때 어떤 정체도 100% 참여율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작금의 상황에서 투표 불참 규모가 워낙 크기에, 기존의 심리학적•교육학적 요인들을 넘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전체에서 약 30~40%가 정체에서 배제되고 있다면, 체제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샤츠슈나이더는 이와 같은 투표 불참에 주목할 때, 이론과 실천의 심각한 모순이 드러나기 때문이다(그러나 후술되는 이론과 실천과의 균열은 서로 '모순' 관계를 이룬다고 보기 어렵다. '샤츠슈나이더가 주장하는 방향의 민주주의'나 '그가 정리한 현실의 미국식 민주주의' 중 하나는 반드시 작동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 작동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둘 다 참일 수는 없지만 둘 다 거짓일 수는 있다면 '모순'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모순'이 아니라 '반대'의 개념이니 말이다. 모순은 둘 다 참일 수도 없고, 둘 다 거짓일 수도 없는 항시 어떤 방향으로도 공명할 수 없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반대는 둘 다 참일 수 없지만 둘 다 거짓일 수는 있는 관계를 일컫는다는 점에서 샤츠슈나이더의 주장은 엇나간 지점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모순은 항상 서로 다른 진리조건을 가지므로, 여러 명제 중 어떤 것이 선택되어야 하는지의 딜레마를 생성하는 반면 반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반대 상태를 모순으로 착각할 시 거짓 딜레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는 논의를 시작하며 이 논제에 관해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자발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 당시의 미국 역시도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라 심신상실자가 아닌 성인은 모두 참정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참정자와 비참정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고 본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40%는 (정치에 대한 샤츠슈나이더의 정의를 생각해본다면 너무나도 명확하게) 기존 정치 구조를 뒤엎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정체 내로 들어온다면 분명히 힘의 균형은 변화할 것이며, 이를 막아설 공식적 대안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현하지 않을 뿐, 이미 정치 참여에 관한 명시적 권한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샤츠슈나이더는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혁명을 이루는 데에는 이들 나머지의 투표만 있다면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정체가 자기합리화•교의•선전 등으로 유지된다고 본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이러한 교의와 전통으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흔히 유권자는 모든 권위의 원천으로 거론된다. 그중 40%가 정체에 관심이 없는 나머지 투표에 불참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 된다. 그에 따르면 지난 일곱 차례의 선거들을 분석했을 때, 당선자와 주요 낙선자 간 평균적 표 차이는 불참자 수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러한 결과는 샤츠슈나이더가 초반부에서 제시했던 주목의 이유를 뒷받침 한다.
그런데 이들의 행태에 주목해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행태가 정체의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유는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첫째, 시민 상당수가 정체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투표 불참은 정치세계의 확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는 투표 불참을 통해 정체의 편향성과 한계가 드러난다고 간주한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가장 쉽게 쟁취된 것이 투표권이다. 흔히 보통선거의 역사를 "투표권을 위해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다." 정도로 요약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에 의하면 이는 오도된 것이다. 그는 투표권을 위한 투쟁 대부분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특히 흑인이나 여성은 그들이 싸워본 적도 없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언급되는데, 이후 내용에 따르면 이는 반민주 세력들이 자발적으로 투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은 이에 납득하지 못한다. 샤츠슈나이더는 "그들이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낭만적 견해에 사로잡혀 법률 상의 투표권 확대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일축한다.
그렇다면 샤츠슈나이더 자신은 보통선거의 형성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먼저 그는 유권자의 확대가 정당 간 갈등의 부산물이었다고 요약한다. 정당 체제의 부상은 정치라는 시장의 경쟁적 확대를 낳았다. 흡사 소비자들의 활동이 해당 품목 시장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듯이 말이다. 이때 정당은 소수파의 지지를 확보한다는 기획을 위해 투표권 확대를 위한 입법을 추진한다. 여기까지가 그의 설명 중 상황적인 것이다. 이 다음으로 그는 이전 장들에서 언급한 것과 유사한 원리적 설명을 덧붙인다. 그에 의하면 싸움에서 이기는 최선의 전략이 언제나 갈등의 확대라는 것은 진실이며, 이 사례 역시 '구경꾼'들의 개입에 의해 보통선거라는 제도가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언제나 진실'은 매우 강한 강도의 추론이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 보장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건전성을 확보한 연역논증으로 이 명제를 도출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언제나 진실인지 아니면 확률적, 혹은 조건부로만 진실인지는 불확실하다.) 이 지점에서 갈등의 확대는 새로운 구경꾼들인 군중들을 싸움에 개입하게 만드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샤츠슈나이더에 의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고전적 민주주의 개념(그는 이를 "인민의 권력 획득에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이라고 칭한다)에서만 역사를 해석하기에, 이러한 진실을 알 수 없다.
이어서 그는 "보통선거의 정당성에 관한 태도의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 되었으나, 그것이 민주주의 정치에서 이용될 수 있는가는 여전히 과제"라고 운을 뗀다. 그가 볼 때에 이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이론과 실천 간 괴리가 가장 심각한 부분이기도 하다.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이 법적 투표에 기여한 만큼, 그것의 행사를 방해하는 데에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그는 사람들이 참정권을 포기하는 원인을 정체의 작동 방식을 통해 분석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다수지배에 호의적이지 않은 관념 역시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저항은 정치, 정치인, 정당 자체에 적대적인 태도로 구현된다. 즉, 비정치적이며 다수지배에 반하는 '괴물'로서의 민주주의이다(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자유주의와 그 불만』에서 조명한 대로, 자유주의는 무분별한 다수 권력이 정체를 파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제를 가진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이해되는 민주주의 관념에도 투입 되어있다. 그러나 다수지배를 무한정 지지해주지 않는 정체가 그 자체로 순수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분명히 논란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의된 대의제 '민주공화정'에는 충분히 부합한다 하겠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방식의 투쟁을 포착하지 못하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이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정치의 조직화', 즉 '다수'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투쟁의 가운데에서는 투표권을 보편화 하려는 운동과 투표권을 무의미하게 만드려는 서로 다른 시도 간의 모순이 포착된다.
그렇다면 투표 불참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 것인가? 그는 대중 매체를 통한 투표 장려운동은 그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제한다. 대신 그는 공공정책상의 변화를 거론한다. 그는 이 전제를 뒷받침할 추론으로 투표에 불참하는 40%는 현재의 정체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든다. 그들은 60%의 논의에 무관심 하기에, 무언가 새로운 균열에 기반한 새로운 갈등이 펼쳐질 때에만 참정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샤츠슈나이더는 이 문제를 미국식 민주주의의 심각한 허점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40%는 정체에 관여하지 않거나 적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체제의 전복을 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하지만 "투표 불참자 40%는 현 정체에 적대적이거나 관심이 없을 수 있다. —> 그들은 체제의 전복할 꾀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 그래서 이것은 민주주의의 질병이다."는 미끄러운 경사면 식의 논리 전개가 아닌가? 우리는 이 부분에서도 그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이것은 민주주의를 허약하게 만드는 '질병'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중대한 정책 변화를 위한 지지의 기반은 오직 체제 밖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상기한 현상들을 단순히 인민의 무지•무관심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으나, 그는 이를 부유한 계층이 하층계급의 배제를 정당화 하기 위해 사용해온 논리라고 일축한다(하지만 그는 애초에 이런 주장에 대해 분석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숙의의 부족, 정보 문제 등이 실제로 유력한 설명변수가 될 여지가 충분함—물론 그의 이론 하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무력화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당이 선택지를 극도로 단순화 시키고, 인민은 오로지 그것들의 선택만 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술하였듯 이것은 철저하게 정치를 정당으로만 환원하는 편협한 관점이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갈등 이론에만 천착하여 이를 검토해보지 않는다.) 이어서 그는 그보다 자신의 설명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권 행위는 불참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선택지와 대안이 억압되어 있기에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가장 강렬한 요구를 지닌 사람들이 가장 열성적인 참정자라는 통념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만약 A와 B의 갈등이 정체에서 지배적이라면, C와 D의 갈등을 원하는 사람들은 기권을 택할 것이라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추론이다.
그렇다면 기권을 택하고 있는 40%는 어떤 유형의 사람들인가? 샤츠슈나이더는 많은 연구가 이들이 경제적 형편이 열악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이들임을 말해준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제시한 표를 참고했을 때 신문 구독자들, 주택 소유자들, 자동차 보유자들의 수와 1956년 선거 투표자들의 수는 거의 유사한 양상울 보인다. 그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정치 공동체와 사회•경제적 공동체가 거의 같은 범위를 가질 것이라 추론한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는 이러한 40%가 투표에서 배제되는 과정은 비가시적이며, 지각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하지만 주요 동산 및 부동산 보유자들과 참정자들 간 인원의 유사함만을 가지고, 한 사회 내의 정치활동과 경제활동의 범위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약한 인과 추론이 아닌가? 두 가지 설명변수가 서로 인과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커녕,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 역시 설명하기에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데이터는 다음과 같은 정보 이외에는 말해줄 수 없다. "미국에서 정치 참여자와 중산층적 생활양식이 겹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경제적 배제의 결과인지, 문화적 중개변수가 작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정치가 사회생활의 한 부분이며, 도덕적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갖는 '위대한 장점' 중 하나는, "사회 하층의 요구와 경험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일을 다른 어떤 통치체제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기한 전제 위에 서서 작금의 미국 민주주의는 민주적 언명에 모순되는 조건을 가졌다는 점에서, 시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시정될 필요가 있다'는 당위적 주장이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가 이것의 근간으로 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도덕적 체제'로서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가치판단이 포함된 일종의 규범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명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대하게' 만드는 '도덕적' 기제는 대체 '어떤 도덕'에서 도출되는가? 이것을 알 수 없다면 결국 '사회 하층의 요구와 경험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일'이 왜 도덕적인지도 알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명령도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그의 당위적 명령은 실패한다.)
그에 의하면 고립과 배제, 계층화 자체는 사회체제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작동하는 무의식적 기제이다. 이 지점에서는 그의 말들을 직접 인용하는 게 적절할 듯 싶다. "부자들이 다니는 교회나 대학, 클럽이나 호텔에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불친절한 말이나 상스러운 말을 내뱉을 필요는 없다. 미국 학교에서 표준화 되어있는 복장과 놀이에 익숙한 사람이면 누구나, 학비가 무료라 하더라도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이 왜 학교를 그만두는지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들은 배고픔 못지않게 굴욕이나 지위 하락으로도 고통 받을 수 있다. 가난은 늘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요점은 그런 과정이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며, 그에 대한 성찰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론과 실천과의 괴리를 인식하지 못한 채 편안히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의 민주적 신념과 비민주적 행동을 융화시키고 있다."(실은 위 인용문들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대적 빈곤이 해소된 것만으로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기준'에서 불충분한 것인가? 그는 뒤이어 사람들이 굴욕이나 지위의 하락으로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으로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공리주의적 기준을 지지한다는 것인가? 이는 확실히 알 수 없는 문제다. 그는 이것이 어떤 기준에서 불충분한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기준이라는 것이 상술한 '도덕적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도덕'에서 도출되는 것이냐는 질문으로 회귀하기 된다. 그는 사실상 가치판단을 전제하지만, 이를 전혀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문제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갈등들 간의 지배와 종속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민1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이 기업과 정부의 갈등으로 비화될 때 빈곤층들이 이에 관심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는 미국식 민주정은 사실상의 폭넓은 과두정이라고 정의한다. 고전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분명히 그에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법 외의 장벽이 인민을 정치로부터 배제시킴으로 하여 이 정체를 과두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정리이다.
모든 사항들을 종합하여 샤츠슈나이더는 현대 정치의 두 가지 주요 과제를 거론한다. 첫번째로는 공간적 제한이 소멸된 상황에서 펼쳐질 새로운 정치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높은 이동성은 과거보다 큰 단위의 정치 공동체를 낳았다. 이들 간의 힘의 균형과 갈등 구도는 과거와 명백히 다를 수 밖에 없디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두번째로는 수혜 배분에서 책임 할당으로 변화된 강조점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의 결정)은 그에 따르면 이제는 책임성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그러나 데이비드 이스턴 식의 정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후술되는 샤츠슈나이더의 대안도 결국 '누구에게 배분되는가'를 정치권력이 권위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이제 정부는 다른 무엇보다도 공적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40%의 배제된 사람들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그리고 그는 이 처방으로 사회적 혜택을 적게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정책의 추진을 제시한다(놀랍게도 전혀 다른 이론에서 출발하지만, 그의 결론은 수년 후에 출판되는 존 롤스의 『정의론』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을—그는 사실상 '누가 참여할 수 있고, 누가 배제되는가'에 집중함으로써 슈미트의 친구/적 구분과 유사한 전통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유사한 목표;규범보다 현실 정치의 규명;를 지닌 이론 간 수렴진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롤스는 협의를 정치의 기본으로 본다. 이 점에서 둘의 출발점은 단순하게는 봉합될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하지만 결론은 유사하다. 이것은 분명히 흥미로운 지점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7. 제7장:변화의 양상
만일 갈등이 완전히 발전하여 치환도 해소도 될 수 없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샤츠슈나이더에게 이 문제에 관한 대답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정체가 얼마나 역동적인가를 판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기 전에 해소 갈등한 갈등과 그렇지 않은 갈등 간의 차이를 제시한다. 해소될 수 없는 갈등은 어느 쪽도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 국면은 마치 토마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영원한 투쟁으로 이어진다. 어느 쪽도 투쟁의 지속이라는 불가피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갈등은 일정한 균형을 전제로 한다. 샤츠슈나이더는 이것의 실례로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을 거론한다. 이들 두 적대자는 강력한 힘과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로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들은 확고한 입지를 지니며, 무한한 인내심을 가진다. 이것이 그의 가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들이 체제에 교착상태를 유발했는가?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정부와 기업 간의 긴장 상태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공공정책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정부에 대한 태도는 지난 세기들을 거치는 동안 크게 변화했다. 사람들은 헌법에 명시된 권한 이외에도 정부의 모든 것이 인민의 권력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암묵적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공식적 기제를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 소유자들의 기대가 변화했다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상기한 것까지가 정부 역할의 변화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 설명을 바탕으로 어쩌면 권력분립 또한 과거의 낡은 갈등만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권력분립을 둘러싼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적 사회구조는 이미 오래 전레 사라졌으며 현대에는 더 이상 대통령—의회—법원 간 갈등이 첨예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와는 명백히 갈등의 성격이 달라진 나머지 이제 가장 첨예한 논제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하지만 이 설명은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여전히 체제 내에서 세 가지 주요 권력 간의 갈등은 특정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자주 포착되기 때문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직접적 갈등은 주로 특정 법률안에 대한 대통령의 지속적인 거부권 행사로 대표된다. 대한민국처럼 행정부도 입법권의 일부를 가진 경우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목격되기도 하지만, 이는 논외로 하겠다. 사법부에 대한 행정부와 입법부의 갈등은 흔히 정치적인 논제와 연관된 재판의 결과에 대한 개입으로써 벌어진다. 물론 사법부는 일정한 정견을 가지지 않도록 조직된 기관이기에, 단독적인 갈등은 상대적으로 적게 일으킨다. 하지만 상기 예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연방주의자 논집』의 고전적인 가정에서처럼 나머지 두 권력 간 갈등에 매우 자주 휘말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정부 내의 갈등은 여전히 수면 위에 드러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보인다.)
그는 위에서 다룬 질문과 답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전개한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이제는 정부와 정부 외의 세력 간 투쟁이 가장 첨예한 갈등이 된다. 그리고 이는 더 분명히 말해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 그러니까 정부와 기업 간의 다툼을 말한다. 그는 오늘날 기업이 정부와도 대결할 만한 권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과거의 교회와 같은 역할을 지닌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들 두 권력 체계는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기업은 방대한 양의 부를 지니고 있고, 이는 그만큼의 권력 동원을 의미하므로, 유사하게 최상급의 권력 체계인 정부와의 경쟁은 필연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는 바로 이러한 권력 체계들의 관계가 정체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본다(그러나 사회 내의 주요 기업들이 항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정부와 동등한 힘을 지닌 수준으로 대결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불충분한 부분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정부가 제시하는 정책이나 법률, 명령들에 따라 그들 사이에서도 수혜자와 피해자가 갈릴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 간 결속력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간 결속력이 하락한다면, 그 시점에서 힘의 균형은 변동하는 것이 아닌가? 힘의 균형이 변동한다면 해소될 수 없는 갈등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온전히 하나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들의 집합도 하나라고 주장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긴장 상태에 있음을 논한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은 매우 전형적이다. 요컨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형성 원리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 때문에 상호긴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에서는 평등한 인민 단위로 권력이 구성되므로 머리 수가 중요하다. 반면 자본주의에서는 배타적인 부의 소유가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기제의 비용 대비 편익 문제는 차치하더라도(물론 편익이 더 크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를 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현재 주제에서 벗어나는 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지 않을 뿐이다.),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원적 체계들이 상존하기 위해서는 양측 간 갈등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그의 요지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이를 두고 '처음에는 순수한 민주주의가 있었으나 금권 경쟁으로 인해 부패되었다'고 보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경제적 권력이 곧 정치적 권력이었고, 정치적 권력이 곧 경제적 권력이었기 때문이다(그의 이 말은 전제정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사실이다. 몽테스키외의 논증을 빌리자면, 전제정에서 '개인의 권리'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재산이든 직업이든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전제자가 원하면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정치적 권력이 경제적 권력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히려 샤츠슈나이더는 두 권력의 분리가 시도됨으로 하여, 유혈혁명 없이도 미국의 민주화가 가능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는 '미국의 민주화'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따라서 진위여부가 달라지는 진술이다. 미국의 독립이나 노예제의 폐지를 말한다면,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겪었으므로 거짓이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이라는 땅에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계기를 말한다면, 그 역시 거짓이 될 것이다. 초창기 타운홀 중심 정치에서는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이 잘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시각에서 미국의 역사를 설득력 있게 해석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샤츠슈나이더는 미국혁명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본다. 그에게 민주주의의 기능은 대중이 경제권력에 저항하는 데에 정치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갈등이 여전히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이 이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그들은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기업이 정부를 대신하는 방향도 지지하지 않는다. 요컨대 대중은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삶의 질 모두를 원하므로, 이러한 갈등을 용인한다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그리고 균형 상태는 오직 상호 유사한 수준의 역량을 유지할 때에만 이루어지므로, 경제 규모가 확장될 때 정부도 같은 수준으로 비대화 하려는 의지를 지니게 된다고 설명된다. 그런 의미에서 샤츠슈나이더는 경쟁은 정부의 작동 원천이며, 해소될 수 없는 갈등은 오히려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이제 정부는 분립된 기관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정부로 행동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판단이 된다(그러나 위에서 줄곧 지적하였듯, 정부, 그리고 기업들의 집합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취급하는 관점이 정말로 적절한 설명력을 지니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그의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에서 매우 핵심적인 가정이기에, 이 논란은 그를 근본부터 무너뜨릴 수도 있다.)
8. 제8장:절반의 인민주권
그는 이 마지막 장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앞선 장들에서의 전제에 따르면, 정체에서 시민의 역할은 대개 갈등의 범위가 결정한다. 왜냐하면 시민을 정치에 관여하도록 만드는 힘이 갈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샤츠슈나이더의 가정은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는 인민이 '갈등에 관여'한다는 것과 '실제로 통치'한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므로, 이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는 민주주의 시대 이전의 것이다. 그 정의를 만든 사람들은 현대 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런데도 현대 학자들이 그러한 과잉 단순화를 그대로 수용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민주주의 개념을 둘러싼 혼란은 정치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에게도 난제로 다가오고 있다. 결국 그는 우리에게 민주적인 것과 반민주적인 것을 구분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정의를 도출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어떤지를 검증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것은 여론조사일 것이다.
그런데 여론조사는 여론이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관념 때문에 현대 정치학 연구의 중심 중 하나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주의에서 여론이 수행하는 역할, 대중에게 필요한 지식과 그들의 역할 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가 던지는 하나의 문제이다.
민주주의의 교과서적인 정의는 일반인들이 정치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를 생각한다고 상정한다. 이러한 정의 속에서는 확실히 여론이 커다란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의 생각이 정부 활동에 직접적 구속력을 구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이러한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실제로 대중들은 정부에 견해를 전달하는 일을 주저하며, 서문에서도 언급되었듯, 실제로 정부가 하는 일들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경향을 '민주주의의 위기', '시민적 덕성의 종말' 등으로 칭하고는 한다. 그러나 샤츠슈나이더는 인민이 아닌 이론가들의 문제가 이 결과의 해석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인민이 이론가들의 정의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망상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문제는 1억 8천만 명의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1억 8천만 명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이 공동체가 보통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누구인가? 민주주의에 관한 '일반적 인식'을 추정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것이 여론조사라면, 보통 사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여론조사의 중요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보통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인지는 해명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통계적인 자료를 이용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샤츠슈나이더는 이 문제에서 통계적인 자료들을 제시한 바가 없다.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고려하는 정체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무엇인지는 정의될 수 없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가? 분명히 이 방면에서는 '합리적 시민'이나 '구성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의를 포함하는—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가 '인민을 설계하려고 한다'고 비판하는—정치철학자들이 훨씬 더 큰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뒤이어 그가 마지막으로 펼치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 누구도 정부를 운영할 만큼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가질 수는 없기에, 무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날마다 처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적응해야 한다. 이는 정치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도 해당되는 진실이다(...)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정신병으로 귀결될 뿐이다."(이는 놀랍게도 전혀 다른 결론을 지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유사한 근원을 보여준다. '무지의 문제'는 많은 정보들이 분산적이고 암묵적이라는 전제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이를 근거로 자생적 질서를 옹호하는 데에 반해, 사츠슈나이더는 6장에서 더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이 지점을 거론하는 것은 샤츠슈나이더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같은 전제를 가진 하이에크의 추종자들은 언제나 공공정책에 대해, "정보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것을 설계할 생각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는 이에 대한 답을 남겨놓지 않았다.)
로스쿨 생각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