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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괴담에는 유독 아는 것이 독이 되는 이야기가 많다. '보라색 거울'처럼 특정 문구를 어른이 될 때까지 기억하고 있으면 재앙이 닥친다거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귀신이 '보이기' 때문에 귀신을 무시하지 못하고 죽는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은듯 그 존재를 의식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피해를 입는 쿠네쿠네나, 햐쿠모노가타리에서 절대로 언급해선 안 될 괴담 등. 인터넷 시대에 복사 붙여넣기를 용이하게 해준 2ch의 힘을 빌려 일본 도시괴담은 이런 인식론적 괴담을 잔뜩 부풀렸고, 괴담의 대상이 미지로 남는 나폴리탄 괴담부터 무언가를 찍거나 담고 있는 매체로 전달되는 정보재해형 괴담까지 영역을 넓혔다. 개중 어떤 괴담은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같은 영상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도 했고, 반대로 인터넷 괴담이 괴담의 영역을 벗어나는 경우도 잦았다. 호러 바깥에서 정보 혁명이 모든 것을 정보의 형태로 바라보도록 할 때, 영화 <링>과 <회로>, 애니메이션 <serial experiments lain> 등 컴퓨터 바이러스 형태의 귀신이 이 정보망을 활보했다.
반면 일본 바깥, 특히 서구권에서는 매체의 가상성보다도 매체의 물성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뚜렷하게 긋기보다 현실과 가상이 겹쳐지는 곳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유튜브 호러의 미학을 영화로 옮겨온 시점에서, 사람들은 이미 어디까지가 의도적으로 찍은 것이고 어디까지가 비의도적으로 찍힌 것인지를 구분하려 했다. 매체에는 정보 이외의 잉여가 가득 남아 있었고, 그 잉여를 '로어'라는 이름으로 파헤치거나 애초에 파헤쳐지기를 기대하는 ARG를 제작하는 등 이곳의 호러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것으로 남았다. 그러니까, 괴물 영상이 있다면 그 영상이 조작된 것이든 괴물이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하며, 그 이외에 괴물이 있을 장소는 없다. 꿈 속에서 닥쳐올 죽음이 유예되었다가, 이후 이 꿈을 잊어버릴 때쯤 다시 그 꿈을 이어서 꾸게 되는 '원숭이 꿈' 같은 종류의 괴담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대체 어디에서 죽고, 이 꿈은 어디에서 이뤄지고 있는가?) 아마 바로 차이가 일본 인터넷 호러를 '아날로그 호러'라는 형태로 빚어냈으리라 생각한다. 이 호러에서도 공포의 대상은 영상물 안이 아니라 영상물 바깥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며, 시청자는 영상물의 세월과 그림체, 제작 당시의 동기를 바탕으로 영상물을-해석학적으로-독해해내야 한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아날로그 호러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재수용되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가? 이 차이를 포착하려면 아날로그 호러라는 흐름과는 별개로 진행된 일본 내 호러의 흐름, 곧 호러 쯔꾸르 게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 괴담이라는 정적인 텍스트는 호러 쯔꾸르 게임에서 동적으로 진화했는데, 간단한 예를 들자면 '지금 뒤를 돌아보지마' 라는 문구를 마지막에 삽입함으로 독자에게 급작스럽게 자신이 괴담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던 괴담은 이제 본격적으로 특정 텍스트의 독해가 플레이어의 죽음을 야기하는 과정으로 변했다. <아오오니>에서 아오오니를 출현시키는 트리거로 특정 텍스트를 활용하던 것을 시작으로, <Ib>나 <마녀의 집> 같은 호러 쯔꾸르는 본격적으로 '텍스트 독해 = 죽음'이라는 트리거를 내세웠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어떻게 움직이든, 이런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죽음은 텍스트의 형태로 다가오며, 어떤 때는 텍스트 자체가 정적인 화면에서 변화하며 그 생생한 위험성을 과시하기도 한다. 호러 쯔꾸르에서 정지된 화면 속 텍스트라는 매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로 여겨졌으며, 귀신은 늘 그 안에 있었다.
<긴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날로그 호러보다는 일본 호러에 가깝다. 공포의 대상이 여러 사건 및 괴담 속에 흔적을 드러내며 서서히 존재감을 발휘하는 과정과는 별개로, 이 문헌은 대체로 공포의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호러가 공식 영상물, 픽토그램, 카툰 캐릭터 등의 필터를 통해 공포의 대상을 왜곡해 표현하고 그 간극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이 문헌은 대체로 공포의 대상을 그대로 서술하거나 그려내며, 사실 그 이상이다: 공포의 대상은 그 매체 속에 깃들어 움직인다. 그녀를 그린 그림은 조악하게나마 그녀를 담고 있고, 그녀를 찍은 사진들에서 그녀는 서서히 움직인다. 이것은 <긴키>라는 책에서도 구현되어 있어, 설화를 취재하는 과정을 연재하는 연재물에서 저자는 자신의 글 속에서 그녀를 이동시킨다. 서서히, 독자는 그녀의 실체를 깨닫게 되며 그 과정의 끝에서 독자 자신도 그녀라는 정보재해를 담는 매체가 된다. 일본 괴담 '붉은 방'을 본딴듯한 호러 쯔꾸르 <아카이이카아>는 이를 일찍이 보여주었는데, '아카이이카아'라는 특정 문구를 알았기 때문에 꿈 속에서 죽게 된 피해자는 '아카이이카아'라는 문구를 조사하려다 그 조사로 인해 위험한 글을 작성해 유포하게 된 연구1원의 시신을 발견하며, 게임이 끝나면 게임 플레이로 인해 이 문구를 알게 된 플레이어에게 게임 UI 바깥에서 귀신이 덮쳐온다.
그러나 다시, 아날로그 호러로 돌아가자. 아날로그 호러에서 향수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인지하는 것만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공포의 대상과, 그 대상을 일부분 가려서 표현하고 있는 표현 방식이다. <유메닛키>, <모게코 캐슬>은 이 간극을 표현한 바 있는데, 플레이어가 돌아다니는 게임 속 세상은 실재를 왜곡하고 있으며, 이 게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믿을 수 없는 화자로 기능한다. 영화에서 하나의 카메라가 하나의 인물인 것처럼, 게임은 하나의 인물이다. 아날로그 호러는 대체로 자신 안에, 이 호러 매체를 제작하여 유포하는 이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를 집어넣는다. 단순한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넘어, 그는 공포의 대상과 협조하거나 어쩌면 그 대상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인터넷 괴담에서는 스스로를 저주받게 만드는 행위를 설명하는 '나홀로 숨바꼭질'에 가까운데, 염소 가스 제조법이나 숟가락 폭발물을 만들도록 하는 악의적인 트롤링 행위를 괴담으로 바꿔 이를 유포한 사람과 따라한 사람, 둘을 포함하여 하나의 괴담이 완성된다. <긴키> 역시, 자신의 의도를 끝까지 숨기고 있던 서술자의 마지막 고백과 함께 그녀가 그려내고 있던 소설 속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간극이 급작스럽게 벌어지며, 아기와 어머니가 엮인 괴담을 비롯한 여러 현장 취재가 현실에 대한 정직한 묘사보다는, 그 사이에서 많은 것을 가리고 있는 하나의 필터로 변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도 몇 번이고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긴키>는 일본식 아날로그 호러가 된다.
이 차이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미쓰다 신조의 공포소설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과 대조할 때 분명하다. 비록 <기관>이 공포의 대상과 마주하여 극적으로 변해가는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다루고 있다지만, <기관>은 <긴키>보다는 훨씬 더 전통적인 일본 호러물에 가깝다. 그는 동네에서 수상쩍은 곳으로 유명한 '특정될 수 있는 집'에 들어가며, <기관>이라는 책은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과 연결되기보다는 공포의 대상과 연결된 화자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매체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기관> 속에서 미쳐가는 화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기관>을 읽는 것으로 독자가 미칠 위험 같은 걸 상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기관> 속에서 특수문자로 가려지는 글은 그저 이 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지, 이 가려진 부분을 우리가 읽음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사실, 미쓰다 신조의 글이 으레 그렇듯 <기관>은 전기소설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좀 더 낡았다. 아마 이렇기 때문에 내가 <긴키>를 훨씬 감명 깊게 읽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폴리탄 괴담 ㄹㅇ 좋음
러브크래프트나 읽어볼까 갑자기 흥미 생기네
기관이 별로였다면 <작자미상> 같은 것도 메타소설 농도만 좀 높아뎠을 뿐 비슷하게 읽힐 듯
읽고 싶은데 꿈에 나올까봐 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