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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받아서 읽었는데 책 읽다 감동받은 거 오랜만이에요.
배운 바가 짧아서 이해 못한 부분도 많았는데 문학사에 대해서 관심있거나 소설 좋아하면 읽어들 보셔유
단테의 <신곡> 다룬 장에서 발췌한 부분이에요.
피안적 질서의 통일성이 어떻게 높은 스타일의 통일성으로 작용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인용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파리나타와 카발칸테의 현세적 삶은 종결되었다. 그들의 운명의 전환은 끝이 났다. 이제 그들은 최종적이고 변화 없는 상태에 들어와 있다. 다만 하나의 변화, 즉 마지막 심판의 부활에 즈음하여 육신을 되찾는 일만이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변화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등장하는 모습에서는, 그들은 육체를 떠난 영혼이다. 다만 단테는 이들에게 육체의 그림자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알아볼 수도 있고, 말을 할 수도 있고 괴로워할 수도 있게 한다. 현세의 삶에 대하여 그들은 추억의 관계만을 가지고 있다.
단테가 여기의 칸토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들은 지상의 척도로는 예외적으로 풍부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천리안을 가진 듯, 얼마 전에 일어났거나 미래에 일어날 지상의 일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고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세의 현재는 보지 못한다. 이것이 자기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는가를 묻는 카발칸테의 물음에 단테가 당황하는 이유이다. 카발칸테의 무지가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다른 영혼들이 미래를 예언한 바 있으므로 특히 그러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이미 끝나 버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삶을 기억을 통하여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그들의 처지가 실제적으로나(그들은 불타는 관 속에 누워 있다.) 또는 시공간적 변화가 정지되었음으로 하여, 원칙적으로 어떠한 지상의 처지하고도 그들의 처지는 다른 것이나, 그들은 죽은 자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테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경이, 아니 역설에 부딪친다. 현실의 모사는 현세적 삶의 감각적 체험을 모사하는 것이며, 현세의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역사성과 변화 그리고 진화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 시인에게 아무리 형상화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본질을 이루는 이러한 특성을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단테의 삼계의 주민들은 “변화 없는 현존” 속에 있다.
그러나 단테는 “인간 행위와 고뇌의 생생한 세계, 특히 개인적 행위와 운명의 세계를 이 변화 없는 현존 속에 투입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용 구절을 두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어보자. 두 관의 거주자의 현존과 그 현존의 장소는 최종적이며 영원하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네이스와 바울 그리고 그리스도가 지옥에 간 일이 있다.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도 지옥에 간다. 거기에는 풍경이 있고 풍경 속에 지옥의 혼령들이 움직인다. 일과 사건 그리고 변화까지도 우리의 눈앞에 벌어진다. 벌 받은 영혼들은 그림자의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장소에 출현하며, 언어와 자유를 가지고 또 어느 정도는 움직임의 자유도 갖는다. 그리하여 변화 없음 가운데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현세를 떠나 영원한 장소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구체적 현상과 구체적 사건을 보게 된다. 이것은 지상에서 나타나고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일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지상의 일과 필연적이며 결정적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리나타와 카발칸테의 출현의 현실성은 그들의 처지와 그들의 말에서 감지된다. 불타는 관의 거주자로서의 그들의 처지에, 그들과 같은 죄인들의 범주, 이단자와 믿음 없는 자들에게 내린 하느님의 심판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말에는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파리나타와 카발칸테의 경우에 특히 뚜렷하다. 죄인으로서 그들은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리고 같은 장소에 배치되어 있지만 전생에 있어서 상이한 성품과 상이한 운명, 또 상이한 성향을 가졌던 개체로서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인물로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운명은 동일하다. 그러나 동일하다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인 뜻에서 그들이 같은 종류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파리나타는 그의 처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카발칸테는 어두운 감옥에서 밝은 빛을 그리워하며 운다. 둘은 완전한 모습으로 그 몸짓과 말을 통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성격, 그들이 현세에서 가졌던바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는 뚜렷하게 개체적인 성격을 드러내어 보여 준다.
그보다도 삶은 끝나고 그럼으로 하여 그 이상 발전할 것도 변할 것도 없으나, 그들의 삶을 움직였던 정열과 성향은 행동으로 해소될 가능성이 없는 채 그대로 지속된다. 그런 까닭으로 하여, 말하자면 굉장한 압축이 일어난다. 영원 속에 확대되고 고정된, 변함없는 개체적 특성의 강한 모습이 지상의 생애에서는 있을 수 없었을 순수성과 조소성을 가지고 드러난다. 이것이 또한 신이 그들에게 내린 형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은 영혼들을 범주별로 분류하여 그것에 맞추어 그들을 삼계의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개체의 형식을 파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원한 심판의 결과로 고정함으로써, 신은 각각의 영혼에게 영원한 특수 상황을 부여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신은 이렇게 하여 비로소 그 개체적 형식을 완성하고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게 한 것이다. 파리나타는 지옥의 복판에서 어느 때보다도 장대하고 강력하고 당당하다. 그는 현세의 삶에서는 그와 같이 그의 담력을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과 소망이 아직도 변함없이 피렌체와 기벨리니 당과 지나간 일의 공과에 집중되어 있다면, 차안에서의 성격의 이러한 지속 - 장대한 모습으로 또 허망한 노력의 모습으로서의, 이러한 지속은 의심할 나위 없이 신이 그에게 내린 심판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차안적 본질의 희망 없고 허망한 지속은 카발칸테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인간 정신의 고귀함에 대한 신념, 아름다운 빛에 대한 사랑, 아들 귀도에 대한 사랑을, 이러한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된 지금처럼 강력하게 느끼고 사무치게 표현한 일이 없었다. 또 죽은 자의 영혼들에게는 단테의 여행이 영원 가운데서 산 사람에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기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이 죽은 자들로 하여금 가장 열렬한 자기 표현을 시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운명의 무변화 속에 극적 역사상의 순간을 도입하는 사정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옥의 거주자들의 특징은 기묘하게 축소되고 또 확대된 그들의 앎의 영역이다. 그들은, 땅 위와 연옥과 천국의 모든 존재가 정도가 다르게, 거기에 참여 하고 있는, 신의 직관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세간적 경과에 있어서의 과거와 미래를 안다. 이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체 속으로 합류되지 않고 그대로 잔존하는 개인적 존재 형식의 허망함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는 차단되어 있는 지상의 일들의 현상에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단테는 그의 역사성을 피안에까지 가지고 간다. 그의 죽은 자들은 현세의 현재성과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있지만, 추억과 뜨거운 참여는 그들을 너무나 강하게 충동하며 피안의 세계는 그것으로 가득 찬다. 연옥과 천국에서는 이것이 그처럼 강하지는 않다. 거기에서는 눈길이 지옥에 있어서처럼 뒤를 돌아보며 현세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앞과 위로 향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는 현세적 생존을 신을 향하는 종착점과 더불어 보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상의 삶을 살아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신의 심판과 영원한 영혼의 상태의 기초가 된다. 이 영혼의 상태는 참회자나 복자의 특정한 집단에 배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지상적 삶의 본질과 하느님의 구도 가운데 그것이 차지하는 일정한 자리를 의식 속에 새기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전생의 지상적 삶의 성격을 완전히 연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심판을 이루는 것이다. 대체로 어디에서나 죽은 자의 영혼은 자신의 특수한 성격을 드러낼 자유를 가지고 있다. 물론 많은 경우 이것은 어려움에 부딪친다. 그렇다는 것은 흔히 그들이 받는 벌이나 그들의 참회 또는 그들의 지복한 상태의 눈부신 빛이 현시와 표현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기 표현은 장애물을 극복함으로써 더욱 강하게 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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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그 안에서 완성을 얻는 것은 신의 질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신의 질서에 있어서의 그들의 영원한 상태는 단지 배경으로만 인식되고 그 불가역성은, 한껏의 힘으로 보존되어 있는 인간적인 면의 효과를 더한층 높일 뿐이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직접적인 삶의 체험, 넓고 깊게 감정의 뿌리에까지 파고드는 인간 이해, 인간의 충동과 정열의 해명이며, 그 결과 우리는 아무 장애없이 그것에 참여하고, 그 다양성과 위대성에 경탄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 그리고 직접적이고 경이로운 인간에의 참여로 인하여, 하느님의 질서에 기초해 있는 역사적 개체적 인간의 모든 것의 불파괴성은 하느님의 질서 그것을 거스르게 된다. 그것은 이 질서를 자신에 봉사하게 하고 그것을 불분명하게 한다. 인간의 이미지가 신의 이미지의 전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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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미치너 소설에서 개추하길래 혹해서 사놓고 못/안읽고 있는지도 어언 몇년인 바로 그 책이네 ㄷㄷ
저도 책 두께때문에 고민 좀 했는데 ㅋㅋ 한 번 읽어보세요 - dc App
오....저는 아직 롤랑의노래까지밖에 못읽었는데, 확실히 저자의 설명이 매력적이긴 합니다. 전 시간날때마다 조금씩 읽으려구요 ㅋㅋ
롤랑 장 너무 어려워서 읽는 지 페이지만 넘기는 건지 모르겠었는데 ㅋㅋ 그 다음 장 궁정 기사랑 좀 지나서 <돈 키호테> 다룬 부분 나오는데 그 부분 비교해서 읽으니 다시 재밌어졌어요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