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집에서 길을 잃고』앵커 북스 에디션 서문

단편 소설은 나의 특기가 아니다. 작가들은 기질상 단거리 선수거나 마라톤 선수이기 마련인데, 나는 장거리 주행이야말로 내 보폭에 맞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포, 모파상, 체호프에 의해 정의 및 발전되어 20세기로 전해진 현대 단편 소설의 형식은 습작기 시절의 내게 있어서 인색하고, 구속적이었으며, 변비라도 걸린 듯이 답답했다. 그 위대한 거장들을 존경했음에도, 나는 더 넓은 서사적 공간을 선호했다.

전근대의 이야기는 또 다른 문제다. 특히 세헤라자데나 보카치오 같은 이들이 들려주는 순환하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나는 사실상 그런 종류의 이야기와 함께 작가 경력을 시작했지만, 소설이라는 한층 더 쾌적한 공간과 소설가라는 더욱 안락한 작업 리듬을 위해 그것을 잠시 제쳐두었다. 타고난 단편 소설가는 몇 주에 한 번(초기 체호프의 경우에는 며칠마다 한 번씩) 빈 얼굴의 뮤즈와 맞이한다. 반면, 타고난 소설가는 몇 년에 한 번 세상을 꿈꾸고, 그곳에 씨를 뿌리고 사람을 거주시킨 뒤,  아마도 대통령 임기 전체나 대학 신입생이 학사 학위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그 안에 머물다가 행성 간의 공허와 다시 대면하는 쪽을 선호한다.

하지만 앵커 북스 시리즈로 재간된 소설—『선상 오페라』, 『여로의 끝』, 『연초 도매상』, 『염소 소년 자일스』—을 집필하고 발표하며 12년을 보낸 뒤인 1960년대 중반, 나는 여러가지 이유로 단편에 다시 도전하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먼저, 다른 조건이 같다면, 진실로 '적은 것이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방대한 소설이라도 세심하게 쓰인다면, 그 나름의 경제성과 엄격함을 갖추기 마련이지만, 『연초 도매상』과 『염소 소년 자일스』는 정말 긴 소설이었고, 그것들을 쓰면서 나는 내게 가장 부자연스러운 양식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게 되었다. 광대는 햄릿을 연기하고 싶어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며, 장거리 주행 선수는 단거리 질주를 갈망하게 된다. 교향곡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노래 한 곡에는 딱 맞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있듯이, 오직 단편 소설에만 적합한 서사적 아이디어들이 있다. 즉, 중편은커녕 장편 소설이라면 그 농도를 희석해 버리고 말 순간적인 포착이나 깨달음 같은 것들 말이다. 수년에 걸쳐 나는 내 수첩에 그러한 서사적 아이디어들을 몇가지 모아왔다.

게다가 나는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작법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 세미나 용도로는 단편 소설이 가장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편소설은 서정시처럼 손에 쥐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황폐한 집』이나 『전쟁과 평화』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개별 문장, 심지어는 개별 단어의 기능까지도 용이하게 검토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적 편의성과 미국 내 문예 창작 프로그램의 확산은, 역설적이게도 대중 독자층이 그 어느 때보다 적어진 시기에 미국 단편 소설이 반갑게 부활하게 된 주된 원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가르치던 모범적인 작품들은 강의실용 선집에서 나온 것들이었는데, (장편은 일관성 있게 발췌하기 어렵고 발췌본은 완결된 작품 보다 형식적으로 유용함이 덜하기에)내 소설은 그 선집에 포함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랠프 엘리슨이나 윌리엄 스타이런처럼 단편을 쓰지 않는 저명한 동시대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제외되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어쩌면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선집들에 실리고 싶었다. 작가의 동기가 모두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아르헨티나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저작들을 접한 것이 이 무렵이었고, 그의 기질은 단편의 형식과 너무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체호프처럼 장편 소설을 한 권도 쓰지 않았으며, 그의 비정통적인 천재성은 내게 단편 소설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을 접한 경험으로부터도 배우는 법이다. 보르헤스가 『픽션들』에서 보여준 형식과 내용의 절묘한 결합, 즉 그가 서사적 수단을 메시지의 일부로 상시 전환하는 방식은 내가 나의 방식과 소재로 어떻게 비슷한 시도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물이 『도깨비 집에서 길을 잃고』였다(사실 나는 열세 살 무렵, 뉴저지주 애즈베리 공원의 보드워크 도깨비 집에서 잠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자전적인 언급은 여기서 끝이다). 구제불능의 소설가인 나는, 애당초 단순히 단편 소설 몇 편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단편 소설들로 구성된 한 권의 책, 즉 단순한 모음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퀀스나 연작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각각의 단편들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겠지만(그 덕에 선집에 수록될 수도 있겠지만), 이 연작은 반향되고 발전하는 몇 가지 주제들로 엮여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를 취할 것이었다. 이는 비코적 영원 회귀의 상징인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처럼 단순한 회로를 닫으려는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린 회로를 만들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이 무엇의 상징인지는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 연작은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집필되고 엮은 것이다. 1968년 더블데이 초판에는 뒤이어 수록된 저자의 말이 서문으로 실렸으며, 이후의 판본에는 이 책의 끝부분에 배치된 "일곱 개의 추가 저자의 말"을 덧붙였다(당시 나는 일곱명의 저자가 등장하는 체하는 소설을 쓰느라 바빴다). 독자는 이 모든 걸 건너뛰고 '격자이야기'라 불리는 첫 번째 이야기로 곧장 가도 좋다. 내가 알기로 그 작품은 영어로 된 가장 짦은 단편 소설(10 단어)이지만, 동시에 끝이 없기도 하다.


광란의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의 전성기는 미국의 사회, 정치, 예술적 삶에서 평소보다 더한 동요가 일던 시기였다.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베트남 전쟁, 정치적 암살, 인종 폭동, 히피 반문화, 팝아트, 대규모 시 낭독회, 거리극, 모든 예술 분야에서의 활발한 전위주의, 그리고 소설의 죽음뿐만 아니라, 전자 지구촌 시대에 인쇄 매체가 사멸할 것이라는 불결한 예견까지—이러한 것들이 때때로 터지는 최루탄 및 오염 물질과 뒤섞여 당시 우리가 들이마시던 공기의 맛을 결정지었다. 독자는 이 『도깨비 집에서 길을 잃고(인쇄물, 테이프, 육성을 위한 소설)』에서도 그 시대 공기의 흔적을 맡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은 그러한 분위기를 혼란스럽기보다는 오히려 활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느꼈다. 독자 여러분 또한 이 이야기에서 같은 느낌을 받기를 바란다.

존 바스
1987




격자이야기(FRAME-TALE)

옛날에 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STORY THAT BEGAN)

점선을 따라 자르세요.
끝을 한 번 비틀고 고정하세요.
AB에서 ab로, CD에서 cd로.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라는 지시로, 소설을 잘라서 이으면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만들어짐. 예: 옛날에 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옛날에 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서문 번역은 AI+번역기랑 네이버 사전 뒤져가며 야매로 한 거라 부정확할 수 있음. 이건 개정판 서문이고 본문에 있는 것처럼 다른 서문도 있는데, 일단 이것만 번역했음

'FRAME-TALE'의 번역은 윤교찬 교수의 '존 바스와 엠브로우즈 멘쉬'라는 논문에서 인용한 것임.

연초 도매상 읽고 있는데 문득 생각나서 잠깐 번역해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