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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의 시 세계는 난해하다. 분열된 시적 주체들과 언어화되지 못한 자의식의 발산, 하위문화적 미학과 기괴한 이미지는

그의 시를 정말 읽기 어렵게 만든다. <여장남자 시코쿠>를 읽는 독자들은 뭔지 모르겠는데 좋음/불쾌함의 감정을 오가게 된다.

시집은 소설보다 리뷰하기 어렵다. 소설과 다르게 시집에는 일관된 줄거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시어와 이미지, 비유와 표현을 만나고 느낀 얕은 감상만 남게 된다.

나는 그의 시를 심도있게 분석해보고자 했지만 내가 "빠가...빠가라"(시코쿠 만자이) 답답함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이 글은 깊이있는 리뷰라기보다는 황병승이 세운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수첩을 꺼내 휘갈긴 노트에 지나지 않는다. 

<모게코캐슬>이나 <유메닛키>, <Space Funeral>같은 쯔꾸르 게임이 연상되는 세계, 그 세계를 내 나름대로 해체 분석한 결과물이다. 나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해설에 실린 강계숙의 글처럼 프로이트니 라캉이니 지젝이니 기표 기의 등등을 꺼내며 10페이지 넘는 분석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여장남자 시코쿠>는 <주치의 h>로 시작한다. 황병승 시인은 이 시로 시단에 등장했기 때문에 이 시를 분석하는 것은 그의

시 세계가 어떠한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 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 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할 때도) 그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 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 주치의 h


입의 나라는 입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뱉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위한 나라다. 이 시의 화자는 얼굴에 입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가족들과 달리 입을 하나만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부끄럼을 느낀다.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 있는" 가족은 '황'이 입의 나라로 들어서자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들로 변모한다. 화자는 아무런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 "침묵의 식탁"을 박차고 집을 나온다.

집을 나온 '황'은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는데, 이는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닌 행동이다. 첫 번째 도끼질은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고, 두 번째 도끼질은 망설임과 절망이다.

그런데 도끼질까지 하며 입의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황'은 계속해서 입의 나라에 출입한다. 그를 입의 나라로 안내하는 사람은 'h'다. '황'의 주치의이자 같이 늙어가는 사람, 수첩을 읽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화자의 이름 역시 '황' 아니었나? 거기다가 시인의 이름 역시 '황병승' 이 아닌가? 이를 고려해 본다면, 이 시는 내면의 기가채드...가 아니라  내면의 주치의 h와 함께 진행되는 자가 정신분석의 과정인 것이다. 그 분석의 끝은 절망이다. '황'의 여자친구가 지적했듯이 농담 수준이 영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의 도끼질 끝에 '황'은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시에서 '황'은 '주치의 h'이고 '황병승' 이다. 

다른 시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황병승 시의 주체는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미란다의 소설 속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소녀미란다좌절공작기)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11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11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11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커밍아웃

커밍아웃이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고백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시의 화자는 '당신'이라는 타인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마는, 그러면서도 계속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
화자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는 '당신'을 위해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하는 화자이지만, '당신'은 화자의 항111문을 혐오스러워 한다. 
그렇기에 화자는 '황'처럼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신' 또한 마찬가지, 부끄러움에도 악수를 청하며 소통을 시도한다.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 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 한 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리라, 기다리라! — 여장남자 시코쿠


이 시 역시 시적 화자가 '당신'이라는 타자에게 보내는 고백, 서랍 속 엽서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책 제목에서 언급된 '시코쿠'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다. 시코쿠는 12살 때 성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그래서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 날마다 연애편지를 보냈지만, 시코쿠는 사랑 대신 똥을 받는다.
멸시와 조롱을 견디며 시코쿠는 골방에서 여성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거부된다. 거부당하면서도 고백하는 시코쿠, 찢고 또 쓰는 붉은 입술의 도마뱀, 그것이 시코쿠다. 똥을 얻어맞으면서도 기어코 살아남아 편지를 전하는 존재다. 도마뱀의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꼬리는 어쩌면 여자가 되려 하지만 결코 여자가 될 수 없는 여장남자 시코쿠의 비애를 상징화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거세하려 해도 잘리지 않는 그것. 그러면서도 "찢고 다시 쓰는" 존재다. 여성이 되려 가짜로 임신까지 하지만 여성이 될 순 없었던 시코쿠의 비애, 그 비애를 가지고 찢고 다시 쓸 뿐이다.




달이 동네 개들을 다 잡아먹었구나 쿵쾅쾅 천장을 달리며 외로운 숙녀 시코쿠)

쉽게 말하거나 어렵게 말하거나 모두 진실이었으므로 똑같이 나의 고백은 아름답다

6은 9도 된다

잊지 못할 이여 가구처럼 있다가 노루처럼 튀어 오르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 당신이여 속삭이는 두려움이여

(너무도 키스를 원하는데 프랑스에서 프렌치 키스를 잔뜩 배웠는데 아무도
입술이 없구나 호주에서 호치키스나 배울 걸 수챗구멍에 대고 외로운 신사숙녀
시코쿠)

말할 때 코를 만지는 자는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자요 무릎을 긁는 자는 익살꾼이며
상대의 얼굴을 꿰뚫는 자는 초월한 자이다, 라고
꿈속의 소년이 말했다

새 이름을 지어주러 왔니
코를 만지며 내가 물었다

대답 대신 소년이 건네는 한 장의 사진,

시코쿠가 기차에 오르고
잘 가 나를 잊지 말아라
시코쿠였던 자가 역에 남아 손을 흔든다

죽을 때까지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
속삭이는 두려움이여 나를 풍차의 나라로 혹은 정지

(일 년 열 두 달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금세
밋밋해지던 나의 목소리여 손바닥을 칼로 푹 찌르며 외로운 신사 시코쿠 시코쿠)

당신만 죽어 없어진다면 나도 내 자리로 간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애초부터 그른 일. 사로잡히다, 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아저씨의 세계를 내어주세요
꿈속의 소년이 돌아섰다

무시무시한 이름인걸
무릎을 긁으며 내가 말했다

시코쿠가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시코쿠였던 자가 도망친다

제발 좀 나를 무시하라!

(달이 한 뭉치의 구름으로 피 묻은 얼굴을 쓰윽 닦아내고 컹 컹 컹 무섭게
짖어대는 밤! 치마를 갈가리 찢으며 외로운 여장남자 시코쿠 시코쿠)

감추거나 혹은 드러내거나 6은 9도 되어야 했으므로
나의 옛 이름은 언제나 우스꽝스러웠다

잊지 못할 이여, 가구처럼 있다가 노루처럼 튀어 오르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 당신이여
속삭이는 두려움이여, 나를 풍차의 나라로 혹은 정지 — 시코쿠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운 숙녀 시코쿠는 정상인들의 세계에 발 딛을 수 없어 천장을 달린다.
외로운 신사숙녀 시코쿠는 키스를 원하지만 입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꿈속의 소년”은 시적 화자의 분열된 자아다. '황'의 '주치의 h'처럼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시코쿠는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기에 대답을 얻지 못한다.
“소년”은 시적 화자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넨다. 시코쿠의 얼굴이 찍혀 있으리라 그러나 “죽을 때까지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 고정된 자신을 버린 시코쿠는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시코쿠는 남성이면서 여성이다. '여장남자'라는 단어 안에는 女와 男이 공존한다.
“나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던 이가 “제발 좀 나를 무시하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는 그의 좌절감이 느껴진다.





장님이 되고 싶어! 거리에서 만난 내 친구 키티는 매독을 앓죠 주말의 우리
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달려요 더 빨리 더 빨리 느린 건 질색이야 귀가 떨어
져라 외치는 키티 우리의 몸이 나쁘게 변해가고 있어요 지구가 돌기 때문이죠
달님을 보세요 해님을 구름과 호수를 저 느림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
리는 일찍부터 호기심을 버렸고 나는 당신이 왜 우는지 알아요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해요 더 나빠지기 전에 더 빨리 더 빨리 장님이
되는 게 소원인 내 친구 키티는 밑구멍에서 박하가 녹는 것 같아! 진물이 흐르
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면 더 빨리 더 빨리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언덕을 내려가요 느림보들의 충고는 듣지 않겠어요 
지구에는 쓸모없는 것들이 너무 많죠 한 장의 흑백사진이면 충분할 것을

돈밖에 모르는 엄마는 안녕히 가시라고 그래요 내 다리와 두 팔을 자기 맘대
로 하고 싶은 이도 저도 아닌 아빠 밤낮 인형놀이나 하자고 보채고 외국인 클
럽에서 산 흰 가루를 킁킁거리며 오빠는 두 번 다시 듣기도 싫은 갓스피드*에
빠져 지내죠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의 몸이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어요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어색한 건 없죠 더 빨리 더 빨리 페달을 밟아
이 느림보 친구야 키티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나는 당신이 왜 우는지 알아요 세상의 어떤 노래도 당신을 위로하지 못하고
아주아주 똑똑한 아저씨들조차 지구를 멈추진 못해요 더 빨리 지구보다 더 빨
리 나도 모르게 늙을래!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내 친구 키티 날마다 새
빌딩들이 들어서고 도시는 거대해져요 밤은 낮보다 환하고 사람들은 점점 세련
되어져가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죽음은 느리게 회전하고 있고 죽은 것도 산 것
도 아닌,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해요. — 키티는 외친다

*포스트 록 밴드 Godspeed You Black Emperor!
 

이 시의 화자는 날마다 새 빌딩들이 들어서는 도시,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젖어 있는 엄마, 화자의 몸을 맘대로 하려는 아빠를 멀리한다. 대신 거리에서 만난 '키티'와 친구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린다. 매독을 앓고 있는 키티와 함께 있으면 느림보들의 충고가 들려오지만 신경쓰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매독을 앓는 키티만이 상처받은 '나'와 마주할 수 있다. 마침표 없이 달리는 시에는 일종의 속도감마저 느껴진다.




1

우편함 가득 붉은 글씨의 편지들이 날아가고 아버지가 네 발로 걷기 시작했
다 그의 몸에 빽빽이 자라나는 검은 털을 바라보며 망할 놈의 영감탱이 어머니
가 서둘러 엽총을 구하러간 사이 나는 두꺼운 책을 덮고 꿈틀거리는 핏덩이를
자궁 밖으로 밀어내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걸음마를 익히고
사방 피 칠을 하며 노란 방을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뜨거운 미역국을 끓였다

2

해 질 무렵 어머니가 엽총을 들고 돌아왔다 겁에 질린 아버지가 기다란 꼬리
를 끌며 구석을 옮겨 다닐 때마다 미역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총을 가진 여자
가 두려워 나는 이름도 얻지 못한 아이를 옷장 속에 처넣고 제길 제길 붉은 발
자국들을 지웠다 어머니 어서 한 방 갈겨버리지 그래요 달도 꽉 찼는데 

노란 방을 흔들며 나는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그재그로 날뛰었다
닥쳐 다음은 네 차례야 총구를 겨누고 있던 어머니가 소리치자 옷장 속에서 더
벅머리의 벌거숭이 사내아이가 뛰쳐나왔다 놀란 어머니가 휘청거리며 방아쇠를
당기고 창문이 날아가고 화약 연기 속으로 부리나케 달아나는 아버지 우물쭈물
하는 어머니에게서 총을 빼앗아 든 사내아이가 개머리판을 휘둘러대었다 이 에
미 애비도 없는 자식 어머니가 방문을 박차고 아버지를 뒤쫓는 어둠 속 달이
기울고 있었다

3

큰 소리가 모두 사라진 검은 방 나는 식어빠진 미역국을 그릇 가득 퍼 담으
생일 축하해…… 스무 살이 된 더벅머리 사내아이가 나의 머리통을 겨누고
있었다 — 사냥철


이 시집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시라고 생각한다. 짐승처럼 걷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조롱하고 엽총을 구하러 가는 어머니, 순식간에 자라 "노란 방을 삐뚤삐뚤 걸어" 다니는 아이,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미역국을 끓이는 '나'. 모든 상황이 기괴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화자는 "총을 가진 여자"가 두려워 아버지를 같이 부정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버려질까 두려움을 느낀다. 아버지를 사냥하려던 찰나 옷장 속에서 아이가 튀어나와 부모 둘을 쫓아내고 화자와 아이 둘만 방에 남게 된다.





고무인형이잖니 그건 먹는 게 아냐...알아요...그런데 왜 먹니?···웃고 있잖아요...웃고 있다니?···무서워요 즐거운 사 람들이···무서운 사람들이에요 홀로 휴일의 공원을 찾아본 적 있나요?···홀로? 휴일의 공원?···모른 체하시긴 그런데 이 지독한 냄새는 뭐죠?···누가 고양이라도 태우나 보지···바보 저기 시계탑이 불타고 있어요...빨간 애드벌룬 말이냐?···새들 이 허공에 꼼짝없이 매달려 있는 게 안 보이세요? 무슨 누런 꽃무늬들처럼...어른을 놀리면 못쓴다...완전한 어른은 없어요···완전한 어른?···어린 시절의 회상에 빠져 있는 저 사내를 보세요 그는 어른인가요 아님 어린아이인가요?···엉뚱한 녀석, 그래봐야 너는 절망과 불만을 혼동하는 어린애···글쎄요 새들은 왜 마주 보고 노래하지 않는 걸까요?···부끄러우니까···짐승들은 왜 결투할 때만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거죠?···부끄러움을 잊었으니까···꼭 우리 두 사람 같군요 티격 태격 태격티격... 나는 페르나에 가요...페르나?...페르나. 시계도 달력도 없고 아름다운 오빠들의 춤과 음악이 계속되는...저기 쌍둥이 빌딩 사이 주름치마 같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본 적 있나요?···커다란 빌딩들이 쬐끄만 벌레 정도로 보일 때쯤 거기 페르나가 있어요...그곳에 도착하면 아저씨께 근사한 엽서를 보내드리지요···페르나, 처음 듣는 얘기로군 헌데 그곳엔 왜 가려는 게냐? ···울기 싫어서요...울기 싫어서?···잠꼬대하기 싫어서요···잠꼬대?···잠꼬대, 밤마다 검은 노트를 펼치는 일 잊을 수 없는 페이지를 열고 ···붉게 번진 입술의 오빠를 오빠 곁에서 들끓는 개들을 개들을 때려잡는 아버지를···나무 위에서 덤불 속에서 뜨문뜨문 읽어내는 일 싫어요 페르나에선 잠들지 않고 아무도 울지 않죠...아저씨도 함께 갈래요?···페르나?···페르나···나는 아파서 못 가···어디가 아픈데요?···이곳을 떠나는 게···아파···아프죠 그러니 두려워하 지 말아요...두려워하면 느려지고 눈치 빠른 아버지가 금방 알아채고 말죠···싱거운 녀석, 너는 페르나 따위가 정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페르나 따위가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하죠?···관두자꾸나···그래요 그만두죠...그런데 넌 원래 그렇게 울보였니?···아뇨···아님 뭐가 그렇게 널 슬프게 하는 게냐?···당신이···내가?···빠가···빠가라··· 

빌딩 사이로 난 작은 골목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소녀 
까맣게 타버린 시계탑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사내는 소녀가 버리고 간 고무인형을 한입 깨물어본다 
골목 뒤편에서 시끄럽게 흔들리는 소녀의 웃음소리, 
고무인형이잖아요, 그건 먹는 게 아녜요, 그건······ 


소년은 땀에 흠뻑 젖은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페르나 페르나 사전을 뒤져보지만, 페르나라는 단어는 없다 
방바닥엔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이며 옷가지들 그리고 
창틈으로 날아든 정오의 눈부신 엽서 한 장이 기다랗게 놓여 있었다. — 시코쿠 만자이

* 일본의 전통 예능, 만담의 한 종류.


제목인 '만자이'처럼 대화체로 이루어진 시다. 1연은 '사내'와 '소녀'의 대화가 등장한다. 소녀는 "고무인형"을 먹는다. 먹는 물건이 아님을 알면서도 먹는다. 고무 인형은 무엇인가? 인형, 즉 가짜이며 아이를 달래기 위한 인형이다. 위로를 위한 존재다. 소화 불가능한 채로 트라우마를 속으로 넣는다. 
소녀는 "즐거운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이에요"하면서 두려워한다. '황'이 마구 웃고 떠드는 가족들을 보고 기시감을 느낀 것과 비슷하다. 
소녀는 페르나에 간다. 페르나는 환상향이다. "시계도 달력도 없고 아름다운 오빠들의 춤과 음악이 계속되는..."곳이다. 이곳 현실은 시계탑, 빨간 애드벌룬, 허공에 꼼짝없이 매달려 있는 새들밖에 없다. 소녀는 페르나에 도착하면 엽서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소녀는 페르나에 사내를 초대하지만 사내는 "아파서 못 가" "이곳을 떠나는 게 아파"한다. 무엇이 소녀를 슬프게 하는가? 가려져 있지만 그것은 아빠 혹은 오빠가 빠가라. 
시는 대화체에서 평범한 구조로 다시 돌아가고 소녀의 뒷모습을 남긴다. 
소녀는 사라지고 비관적인 사내는 가짜 위로를 깨물어본다. 
2연에서는 소년이 등장한다. 마치 꿈에서 깬(정말 그렇다) 듯해 페르나를 뒤져보지만 그런 단어는 없다. 남은 것은 창틀로 날아든 엽서 하나 뿐.

황병승 시의 주인공이 여러 모습을 하고 있는 파편화된 모습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사내-소녀-소년 전부 동일한 인물일 수도 있다. 소녀는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환상 세계로의 도피를 상징한다. 사내는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안 현실의 자아이고, 소년은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상을 붙잡는, 고무 인형을 깨무는 자아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이봐 이츠이, 거울 밖의 네 얼굴은 꼭 내 얼굴 같구나

우리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지만

단 한 번의 키스도 나눌 수 없어

이제부터 나는 기다란 수염을 달고

아무런 화면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


나의 사랑 나의 아게하


이 밤의 여행은 너무도

가난하고 뻔뻔스럽구나


이제 얼굴을 적시고

왕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두꺼운 외투를 팔러 가자


나의 사랑 나의 아게하


누구에게도 불려지지 않은 이름, 당신은 두 배나 되는 사람

당신에겐 아름다운 아들딸들이 두 배나 있고

두 배나 되는 당신이 늙지도 않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춘기의 아이들은 뱃속으로부터 두 배나 일찍 늙겠지


노래가 되지 못한 시와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곧 달고 맛좋은 버찌의 계절


그러나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내가 만든 노래

흥얼거리며, 엎드린 소녀인형처럼 수음을 하지

달고 맛좋은 버찌의 계절이라……

하지만 신을 믿는다면, 신은 '흑인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당신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

(도둑맞은 나의 노래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당신은 엎드린 소녀인형처럼 죽은 체하는 사람


나의 사랑 나의 아게하

이제 얼굴을 적시고

왕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고물이 된 시계를 팔러 가자


두 배나 되는 아들딸들이여, 잃어버린 당신의 반쪽의 노래

그것은 장님의 콧대만큼 높고 눈부시며

당신과 당신의 아름다운 아이들 서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함께 울기에는 피가 덜 섞였다


버찌의 계절, 마당 가득 버찌는 멀어졌고

의미는 없다


멀고 먼 나의 사랑

멀고 먼 나의 아게하


누구에게도 불려지지 않은 이름, 당신은 두 배나 되는 사람.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 」 중에서.



이 시는 '이츠이'와 '아게하'의 발화가 교차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름은 타자에게 불릴 때 생긴다. 즉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하여 "두 배나 되는 사람"이 된다.

거울 밖의 얼굴이 자기 얼굴 같다는 것은 경계의 붕괴를 뜻한다. 자기 안의 타자다.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기에 자기 자신에게 키스할 수 없다. 사랑하지만 닿을 수 없다. 

타자인 아게하는 내 노래를 흥얼거리지만 그 노래는 "도둑맞은 나의 노래"다.




1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될래요 이름도 창녀로 바꿨죠, 대야미의 소녀


이곳은 작은 마을, 그녀는 정육점에서 그럴듯한 유방을 달지는 못했네

칼솜씨는 쓸 만했지만 바느질은 형편없었죠, 대야미의 소녀


그것으로 좋았네 내 손으로 처음 사과를 깎아 먹었을 때처럼, 나는 겸손해졌죠


낮고 낮은 지붕 아래, 밤낮 가릴 것 없이

참 많은 죄 없는 사내들이 다녀갔네

풍만한 가슴의 여자들처럼 뼛속까지 미음을 받진 못했지만, 대야미의 소녀

침대가 주저앉을 정도로 톡톡히 미움을 받았죠, 즐거워라

즐거워서 노래를 다 불렀죠


그곳에 키스해줘요 불이 나도록

그곳이 못 쓰게 되도록 그곳이 멍해지도록

우유 마셨나요? 우유 마셨어요?

험악한 얼굴의 풋내기 아저씨

다정한 말투는 마나님에게

점잖은 충고는 조카들의 어깨에

키스해줘요 그곳에 불이 나도록

그곳이 못 쓰게 되도록 멍해지도록

내 뺨을 내 뺨을 갈겨봐요

당신이 쏘고 싶은 구멍에 대고

당신을 당신을 털어놔봐요

장전(裝塡)했나요? 장전했어요?


2


이곳 대야미에 번듯한 전철역이 들어서고 공장과 건물들

각양각색의 죄 많은 눈 코 입들이 이주해오기 전까지

대야미의 소녀는 작은 마을 대야미에 살았네


한때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을 때, 말이죠

마구 벌을 내렸죠. 오로지 용서받고 싶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며

정육점에서 뿌리째 잘라준, 이 쬐끄만 녀석을 허리춤에 차고는

잔뜩 속상한 표정의 사내를 흉내내곤 하죠, 웃음…… 웃음…… 대야미의 소녀.



이 시의 화자는 죄 없는 세계에 스스로 ‘표적’이 되기 위해 창녀가 된다. 화자는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김으로써, 속죄양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가 선택한 여성성은 완전하지 않다. 칼솜씨는 쓸 만했지만 바느질은 형편없었'다. 어설프게 여성으로 봉합된 존재,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흉내만 낸 혼종이 된 것이다. 그는 제대로 ‘여성’이 되지 못했고, 그렇기에 이 변신은 실패한 연극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그것으로 좋았네”라고 말하며 자신을 낮춘다. 이 겸손은 수용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자기 비하이며, 동시에 속죄를 완성하기 위한 태도다.

‘낮고 낮은 지붕 아래’라는 공간은 기독교적 모티브와 타락을 연상시킨다. 이는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말과 같이 화자는 스스로 가장 비천한 위치로 떨어졌다. 창녀는 곧 성녀이며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된다. 화자에게 사람들은 '풋내기 아저씨'로 보인다. 화자는 자신의 몸을 타인의 미움과 분노, 폭력의 배출구로 내어준다. 이때 반복되는 “즐거워라”는 마조히즘적 쾌감의 표현보다는, 광기와 자기최면이 섞인 가짜 즐거움이다. 

2부에서는 시선이 과거로 이동한다. 대야미의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고, 막연히 용서받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아이였다. 따라서 현재의 창녀 역할은 어린 시절부터 준비해 온 연극의 연장선이였던 것이다. 모든 자기훼손은 용서받기 위한 제스처였던 셈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미지는 전통적 남성성과 폭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남성성은 이미 잘려나가고 축소된 상태로 등장한다. 화자는 그 남성성을 소유하지도, 완전히 거부하지도 못한 채 그저 흉내만 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조롱한다. '황'의 도끼질처럼, 두 번 웃는다.



황병승은 단언컨대 가장 특이한 시 세계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도마뱀도 되었다가 고양이도 되었다가 늙은 여인 예술가 시인 붉은 여왕 온갖 얼굴을 달고 있는 세계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울림, 그것이 황병승의 세계를 특별하게 만든다.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