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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피츠제럴드의 해당 단편을 읽은 사람들을 위해 쓴 감상문입니다.
혹시라도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읽으면서 ‘왜 하필 주인공을 프라하에서 일한다고 설정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아래의 감상문을 흥미롭게 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0. 관점: 예술에 대한 태도
예술과 관하여, 언제나 저에게 가장 믿음직스러운 증인은 프라하의 카프카입니다.
저는 카프카가 예술에 대해 서술한 묘사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요제피나, 여가수 혹은 쥐의 족속>.
카프카의 단편에 따르면: 우리 인류는 ‘진정으로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섬세함이 있는가에 관해서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저 쥐와 같은 군서동물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작품의 예술성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작품이 자체로 불멸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쥐새끼인 우리들이 그 앞에서 기꺼이 침묵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수의 노래에는 불멸처럼 느껴지는 멜로디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너무 과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 아름다움을 쉽게 찬양합니다. 이와 반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쉽게 무시하는 작태’는, 다른 사람들에겐 크나큰 경멸의 표지일지 모르겠으나, 카프카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술가의 심리 &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해 전적으로 카프카에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뮤즈(Muse)의 종족이라기엔 쥐(Mäuse)의 족속에 늘 가까운 것입니다.
아래의 감상문 역시 저 자신이 이해한 바, 즉 저의 귀에 감지된 ‘요제피나의 노래’를 서술한 것에 불과합니다.
1. 음악성: '더욱 더 느리게'
<다시 찾은 바빌론(Babylon Revisited, 이하 BR)>에서 피츠제럴드는 장면들에 음악의 힘을 스며들게끔 노력합니다.
이 노력은 노골적입니다. 침묵 속에 의미를 숨겨두는 것이 많은 작가들에게 덕목으로 여겨지는 반면, 음악과 율동은 오직 드러냄으로써 의미를 가지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이 의미가 독자들에게 자칫 이해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직접 작중에 곡명을 제시합니다.
원문:
But he wanted to see the blue hour spread over the magnificent façade, and imagine that the cab horns, playing endlessly the first few bars of Le Plus que Lent, were the trumpets of the Second Empire.
의역:
하지만 그는 드넓은 파사드에 새파란 시간이 확 물들어버리는 걸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택시의 경적을. 저기서 「느림보다 더욱 느리게」가 처음으로 울려퍼질 적의 떨림이 영원토록 재생되고 있다고, 이미 지나가버린 제2제국의 트럼펫이 거기에 있다고.
Debussy: La plus que lente(느림보다 더욱 느리게).
드뷔시는 당시 유행하던 '느린 왈츠'를 풍자했습니다. 느림의 미학이라며 즐기던 노래를 아예 '더욱 더 느리게'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드뷔시의 이 작품은 그때 어떤 왈츠가 유행하였는지 이해한 다음에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Rodolphe Berger: Valse Très Lente(아주 느린 왈츠).
베르거의 음악을 감상한 뒤 드뷔시의 음악을 들으면, 드뷔시가 보란 듯이 '아주 느린 왈츠'를 패러디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많은 독자들에게 분명해졌듯, 개츠비는 재즈와 왈츠의 리듬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단편인 BR에선 더욱더 노골적으로 선언합니다.
이 단편은 왈츠이되, ‘더없이 느림’에 관한 왈츠라고.
작가는 작품 내내 ‘slow’, ‘fast’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가장 초반에 등장하는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더는 술을 마시며 폭주하지 않을 거냐는 직원의 질문에 주인공 찰리는:
원문:
“No, no more,” Charlie said. “I’m going slow these days.”
의역:
“안 돼, 더 이상은 안 돼.” 찰리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 삶의 속도를 천천히 맞춰볼 셈이야.”
하지만 이 ‘천천히’란 무엇일까요? ‘느림보다 더욱 느림’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작가는 이 질문을 대놓고 던졌습니다. 무책임하게 던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조각하면서. 그러니 저 또한 이 질문에 맴돌겠습니다.
1-1. 느림이란: 더 성숙해져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것
작중에서 주인공은 일종의 폭주족처럼 묘사됩니다. 과거의 파리에서 주인공은 너무 달렸습니다. 지나치게 빨리.
이 빠름은 과거 주인공과 엮였던 여사친, 로레인에 의해 증언됩니다. 이 증언은 편지로 이루어져 있고, 마치 파사드에 세워진 대문처럼 명명백백하게 인용됩니다.
원문:
"Dear Charlie: You were so strange when we saw you the other day that I wondered if I did something to offend you. If so, I'm not conscious of it. In fact, I ha□ve thought about you too much for the last year, and it's always been in the back of my mind that I might see you if I came over here."
의역:
"친애하는 찰리에게: 저번에 우리가 만났을 때 네가 너무 이상하게 굴어서, 나는 혹시라도 내가 너를 어쩌다 상처 입혔던 것일까 고민했어. 만일 그랬더라면, 내가 의식적으로 그러진 않았을 거야. 사실, 난 작년 내내 너를 정말 많이 떠올렸어. 그리고 여기에 오면, 어쩌면 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의 뒤편에 언제나 놓여 있었고.”
과거에 로레인과 주인공은 길거리에서 ‘세발자전거’를 훔쳐다가 서로 웃으면서 밤중을 질주하곤 했습니다.
세발자전거는 어린아이들이나 타는 장난감입니다. 다시 말해, 로레인과 주인공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유년기를 공유하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세발자전거의 폭주에 단호히 반응합니다.
원문:
In retrospect it was a nightmare. Locking out Helen didn't fit in with any other act of his life, but the tricycle incident did—it was one of many.
의역:
돌이켜보면 악몽이었다. 헬렌을 바깥에 내버려두고 자물쇠를 걸어잠근 일. 그건 단 한 번뿐인 사건이어서, 나머지 일생 전체랑은 도무지 들어맞는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세발자전거 사건― 그건 늘 자신의 인생에 있어왔던 사고 중 하나였다.
주인공에게 과거의 어수룩함, 미숙한 폭주는 이제 끔찍한 일입니다. 이것과 결별해야 합니다. 어떻게?
지나치게 빠르게 달리려는 저 대중들. 저 숫자를 헤아리는 방법도 모르는 모지리들. 저 가증스러운 옛 친구들과 단호히 결연함으로써.
지금의 주인공에게는 왈츠조차 지나치게 빠릅니다.
‘지나치게 빠른 것’을 주인공은 파리의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몽마르트 언덕 즈음에 늘어진 환락가는 더 이상 주인공에게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원문:
He bought a strapontin for the Casino and watched Josephine Baker go through her chocolate arabesques.
의역:
그는 카지노의 간이석 전용 티켓을 샀고, 조세핀 베이커가 초콜릿빛깔의 아라베스크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세핀 베이커는 당대 유명한 무희였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파리로 건너온’ 주인공과 사정이 똑같습니다.
메타적인 이야기로: 피츠제럴드는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출생하였고 베이커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했습니다. 둘 다 서부도 동부도 아닌 중부 태생.
파리라는 이국에서 두 사람은 제법 가까운 동향 사람이며, 두 사람의 만남은 로맨스로 이어지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왈츠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BR의 주인공은 지금 왈츠보다 더욱 느린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왈츠적인 베이커 대신, 주인공은 보다 안전한 ‘익명의 여인’에게 술을 사줍니다.
원문:
He bought her some eggs and coffee, and then, eluding her encouraging stare, ga□ve her a twenty-franc note and took a taxi to his hotel.
의역:
그는 그녀에게 달걀 요리와 커피를 사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유혹적인 시선을 견뎌내며, 그녀에게 20프랑 지폐를 쥐어준 뒤 텍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커피(초콜릿빛깔에 대한 환유) 한 잔. 그리고 작별. 그것이 BR의 주인공이 과거 유년시절의 속도에게 건네주는 최대한의 예의였습니다.
주인공이 이처럼 ‘더욱 더 느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빠르게 살아가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느리게 살아가는 데에도 역시 그만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원문:
In the little hours of the night every move from place to place was an enormous human jump, an increase of paying for the privilege of slower and slower motion.
의역:
한밤의 이 짤막한 시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훌쩍 옮겨가기 위해서는 사실상 터무니없이 높은 점프가 필요했다. 느려지고 또 느려지겠다면, 그 특권적인 태도를 취하겠다면, 그만큼 지불되어야 하는 대가도 높아졌다.
2. BR에 등장하는 ‘프라하적’인 것
여기서 ‘an enormous human jump’라는 표현은 주목할 만합니다.
비단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 후보 중 하나였던 ‘The High-Bouncing Lover’를 연상시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1919년에 발표된 카프카의 단편집 <시골의사(Ein Landarzt)>. 독일어로 시골의사를 뜻하되, 어원적으로 '토지(Land)'와 '의술(artz; 이 단어의 어원은 명확한 결론이 없습니다)에서 비롯했습니다. 후자의 artz가 우연찮게 art와 발음이 비슷한 건 꽤 재미있는 언어유희입니다.
여기에는 <이웃 마을>이라는 엽편이 실려 있습니다. 불과 몇 줄짜리 엽편의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웃 마을>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이란 놀랍게도 짧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한마디로도 말할 수 있겠어. 예를 들자면 말이다, 어떤 젊은이가――도중에 우연히 맞닥뜨린 불행한 사고들로 늦어지는 거야 무시한다 쳐도――행복하게 흘러가는 일상적인 삶의 시간조차, 사실은 말을 타고 가는 그런 여행에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떻게 이웃 마을로 말을 타고 가자며 결심할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거의 납득하기 어렵구나”라고.
BR에서 묘사된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점프의 어려움(every move from place to place was an enormous human jump)’과 동일한 주제의식이 카프카의 엽편에서도 구현되어 있습니다.
카프카가 엽편을 발표한 시기가 1919년. 피츠제럴드가 단편을 출판한 시기가 1931년이니, 후자가 전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재미있게도 있습니다.
카프카의 단편집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책의 형태로 출간된 것은 1938년이니, BR 발표 시점보다 한참 늦습니다. 그러나 책의 형태가 아니라 ‘잡지’의 형태로는 훨씬 이전에 발표되었지요.
프랑스 잡지, 《La Nouvelle Revue Française》(NRF). 앙드레 지드 등이 설립에 참여한 무척 유명한 문학 및 비평잡지이지요.
허밍웨이가 피츠제럴드에게 보낸 서신(1926년)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Nouvelle Revue Française”에 실릴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해당 잡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NRF의 1929년 8월 1일, 제191호에 카프카의 단편이 몇 개 실리고 소개됩니다. 그중 「Le Plus proche village」라는 엽편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어 판본에서 <이웃마을(Das Nächste Dorf)>로 번역된, 위에 실린 엽편입니다.
1928년에 동일한 잡지에 <변신>의 프랑스 번역본이 실려서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러한 기세를 이용해서 내친김에 단편(사실상 엽편들)도 5편 번역한 것입니다.
5편 중 하필 1편이 「Le Plus proche village」라니. 재미있지요?
아카이브 링크는 아래에 첨부합니다.
https://archive.org/stream/la-nouvelle-revue-francaise_1929-08_33_191/la-nouvelle-revue-francaise_1929-08_33_191_djvu.txt
아카이브 잡지, 209쪽-210쪽에 기록된 프랑스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LE PLUS PROCHE VILLAGE
Mon grand-père a□vait coutume de dire : « La□vie est
étonnamment brève. Dans mon souvenirelle se ramasse aujourd'hui sur elle-même si serrée que je comprends à peine qu’un jeune homme puisse se décider à partir à cheval pour le plus proche village sans craindre que — tout accident écarté — une existence ordinaire et se déroulant sans heurts ne soit de beaucoup insuffhisante, même pour cette promenade. »
카프카의 이웃마을. LE PLUS PROCHE VILLAGE.
드뷔시의 느림보다 더욱 느리게. LA PLUS QUE LENTE.
여기서 조금 더 에드거앨런포적인 템포로 추리를 진행해보겠습니다.
1929년 8월. 당시 피츠제럴드 부부는 칸느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29년 10월 1일, 파리에 도착하여 1930년 2월까지 머무릅니다.
유명한 문학잡지를 읽기엔 충분한 시간적·공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피츠제럴드가 드뷔시의 곡명을 언급한― 작가의 너무나도 노골적인 텍스트를 들여다봅시다.
원문:
But he wanted to see the blue hour spread over the magnificent façade, and imagine that the cab horns, playing endlessly the first few bars of Le Plus qu(e) Lent, were the trumpets of the Second Empire.
혹시 눈치채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피츠제럴드는 오타를 저질렀습니다. 드뷔시의 곡 제목은 <La Plus que Lente>이지, <Le Plus qu(e) Lent>가 아닙니다. 여성형 관사와 형용사를 써야 할 대목에서 남성형을 썼습니다. 더 나아가 원본에선 que를 qu로 썼다는 증거마저 있지요.
이에 대해 기존의 연구자들은 피츠제럴드의 단순한 오타로 취급했습니다. 피츠제럴드는 오타가 곧잘 발견되는 작가였고, 미국인이 프랑스어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논문. William White, Two Versions of F. Scott Fitzgerald's "Babylon Revisited": A Textual and Bibliographical Study(The Papers of the Bibliographical Society of America, 1966).
또 다른 논문. Garry N. Murphy와 William C. Slattery, The Flawed Text of 'Babylon Revisited': A Challenge to Editors, a Warning to Readers(Studies in Short Fiction, 1981).
아래에 논문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중략)
정리하면: 학자들이나 문필가들은 <Le Plus que Lent>를 단순한 오기로 취급하거나 편집상의 실수로 비난하며, 그렇기에 판본에 따라서는 정말로 출판사가 <La Plus que Lente>로 바꿔서 인쇄합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가 이를 의도했다고 보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애당초 왜 우리는 BR의 주인공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할까요? 관사와 형용사를 헷갈리는 것쯤은 그에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단순한 인간적 이해가 아닙니다. BR의 주인공은 총체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기억을 상기해보겠습니다.
아시다피시― 주인공은 첫 장면부터 처제댁의 주소를 바텐더에게 건네어줍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지요.
바텐더는 그 남자에게 주소를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중의 후반부에 그 남자가 정말로 처제댁에 들이닥쳤을 때, 주인공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완전히 당황해합니다. 도대체 저 남자가 어디서 처댁의 주소를 얻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고작 며칠 전에, 자신이 바텐더한테 주소지를 건네어주었는데도요!
‘그들’, 즉 불청객들의 방문에 대해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문:
They were gay, they were hilarious, they were roaring with laughter. For a moment Charlie was astounded; unable to understand how they ferreted out the Peters' address.
의역:
그들은 가벼웠고, 유쾌했으며, 웃음과 함께 떠들었다. 그 순간 찰리는 경악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들이 처제댁의 주소를 알아냈는지. 그걸 이해하는 것이 찰리에게는 불가능했다.
피츠제럴드가 ‘쪽지 건네주기’ 장면을 소설의 1면에 대뜸 삽입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1면에 건네어주는 ‘주소지’가 체호프의 총입니다. 막판에 총이 발사되어, BR은 파국에 이릅니다.
그러니 BR의 주인공을 신뢰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는 충분합니다.
피츠제럴드는 주인공을 ‘프라하’에서 일하는 자로 설정했습니다. 프라하는 카프카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피츠제럴드가 봤을지도 모를 프랑스 문학잡지에는, 카프카의 엽편인 <LE PLUS PROCHE VILLAGE>가 실려 있었습니다.
드뷔시의 곡명을 피츠제럴드는: <LE PLUS QUE LENT>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 시점에서 피츠제럴드가 분명히 카프카의 <이웃마을>을 읽었으며, 드뷔시의 곡명도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신은 저 개인의 것입니다. 여기서 존경하는 여타 독자 여러분께도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아직 한 가지 증거를 더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작중에서. 센 강에 의해서 좌우로 갈라지는 파리를 구경하면서, 주인공이 이를 묘사하는 방법.
1981년의 논문에선 피츠제럴드가 실수로 동일한 의미(택시로 좌측 언덕을 2번이나 가로짓게 된다는 모순)를 가진 장면들을 나열되었다고 문제가 제기되는 텍스트입니다.
원문:
The Place de la Concorde moved by in pink majesty; they crossed the logical Seine, and Charlie felt the sudden provincial quality of the left bank.
의역:
콩코르드 광장은 분홍빛의 장엄함으로 말려들어갔다. 그들은 가로질렀다. 논리정연하게 흐르는 센강을. 그리고 찰리는 갑작스레 좌측 언덕 특유의 변두리 분위기(provincial quality)를 느꼈다.
변두리스러움(provincial quality)은 민음사 번역본에선 ‘촌스러워’ 보이는 느낌으로 번역했습니다.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그러나 BR에서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점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센강으로 인해 단절된 좌측과 우측의 ‘분리성’은 BR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점프’와 일맥상통합니다.
물로써 분리하는 이 강줄기를 유일하게 헤엄쳐 수영하는 존재가 작중에서 주인공의 딸로 한정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명확합니다.
원문:
he felt a cramping sensation in his belly. From behind the maid who opened the door darted a lovely little girl of nine who shrieked "Daddy!" and flew up, struggling like a fish, into his arms.
의역:
그는 뱃속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문을 열어준 하녀의 뒤편, 거기서 사랑스러운 아홉 살짜리 소녀가 소리쳤다. “아빠!” 그리고 아이는 뛰어올랐다. 그의 품속으로, 물고기처럼 발버둥치면서.
BR의 주인공은 ‘느림보다 더욱더 느려지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점프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그중 ‘이곳’이나 ‘저곳’을 지역성(provincialism)이라 명명합니다.
원문:
As they rolled on to the Left Bank and he felt its sudden provincialism, he thought, "I spoiled this city for myself. I didn't realize it, but the days came along one after another, and then two years were gone, and everything was gone, and I was gone."
의역:
택시가 좌측 언덕으로 넘어가자 그는 그곳의 갑작스러운 지역성을 느꼈다. 그가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이 도시를 망쳤어. 예전엔 깨닫지 못했지만, 하루가 하루를 넘어서 오고, 또 2년이 가버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가버렸고, 나도 가버렸지.”
저는 이 지역성이라는 특유의 어법 사용이 카프카 엽편의 프랑스어 번역본, 즉 ‘le plus proche village’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느낍니다.
따라서 피츠제럴드의 표기는 오타가 아닙니다.
피츠제럴드는 카프카의 <le plus proche village>를 읽었으며, 여기서 표현의 영감을 얻었으며, 이러한 카프카적 서술을 드뷔시의 곡명인 <La Plus que Lente>와 연관시켰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곡명을 <Le Plus que Lent>로 바꾸어 표기했습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성립시키기 위해 피츠제럴드는 굉장히 뜬금없이 주인공의 거주지역을 프라하로 설정합니다.
BR을 마치 피츠제럴드의 자화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비평가들에겐 당연한 사실처럼 여기집니다만, 만일 그렇다면 피츠제럴드는 그저 ‘의외성 있게’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를 주인공의 정체성에 정초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과 그토록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왈츠류의 성별을, 도무지 남성성과 여성성을 헷갈릴 일이 없는 단어에 관해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뜻이 됩니다.
저는 피츠제럴드가 왈츠의 성별을 헷갈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별다른 생각 없이 프라하를 언급했을 것이라고 진단하지 않습니다. 그건 드뷔시의 곡명과 마찬가지로 노골적인 힌트입니다.
피츠제럴드의 앙증맞은― 그리고 놀랍도록 솔직한 유희, 한편으로 비겁하면서도 한편으로 훌륭한 장난에 대해선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1-2. 느림이란: 이토록 빠른 시간 속에서 느리게, 더욱더 느리게 살아가는 삶의 어려움이다
1-3. 느림이란: 되돌릴 수 있는 것들에 관해 늦어버리는 지각이다 ... ... ...
이제 메타적인 분석을 시도했으니 내용적인 분석에 들어갈 차례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까지 쓰는 데 이미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였고, BR이 저에게 준 감흥이 여기서 더 유의미한 분석을 부추길 정도로 강력하진 않습니다.
피츠제럴드가 왜 이러한 느림의 미덕을 하필 ‘character’라고 표현했는지, 또 그것이 ‘세대와 세대를 되돌아 건너뛰어(jump back)’ 딸아이에게서도 발현되기를 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논하는 것은 상기의 문헌학적 조사보다 훨씬 더 문학적인 여흥이 될 것입니다.
― 더 나아가: 이 소설에서 ‘집’과 ‘문’의 요소가 되풀이된다는 것. 주인공은 집(home)을 가지길 원하지만, 그는 호텔에만 머무를 뿐이고, 사랑하는 아내를 문밖에 내버려뒀다는 것. 동시에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도 아내가 없는 곳, 즉 집이-아닌-곳에 영원토록 감금당했다는 것.
― 마지막으로: BR의 주인공이 저지른 ‘가장 느린’ 행위는 다름 아니라 ‘지각’이라는 것. 로레인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음에도, 먼저 사과했음에도, 주인공이 익명의 여인에게 계란과 커피를 사주었듯이 로레인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 그 차가움.
― BR의 주인공이 로레인에게 저지른 짓: 이것은 자신의 온 생애에서 쌓아온 편견을 ‘벽’으로 만들어서 상대방한테 마주보게끔 하는 절망이고, 다름 아니라 주인공이 작중 내내 아내의 자매한테서 느끼는 ‘적대감’과 똑같다는 것.
― 즉: BR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내의 자매에게 당한 짓거리를 똑같이, 과거의 친구들인 로레인에게 행하고 있다는 것. 언제나 연락하겠다며 약속할 뿐, 그 약속을 끝없이 지연시켰다는 것. 의도적인 지각: 느리고, 지나치게 느린.
그것이 BR에서 주인공이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라는 것.
등등은, 피츠제럴드의 문학적 기교를 맛볼 수 있는 요소들이기에 충분히 감미할 만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사실 제가 구태여 소리 높이지 않더라도 명민한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리는 요소입니다.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1-2, 1-3에서 주르륵 나열한 감상들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이 댓글란에 계시다면, 그리고 또한 얘기를 꺼내주신다면, 훗날 확인하여 성심성의껏 답변토록 하겠습니다.
얼마전 독서갤러리에서 해당 단편에 관한 개념글이 올라왔고, 이에 관심이 생겨서 개인적으로 독서했습니다. 이런 계기를 제공해준 독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A와 V 사이에 □를 삽입한 까닭은 디씨의 검열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3.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피츠제럴드는 단순히 파리가 유럽의 ‘좌측’에, 프라하가 ‘우측’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프라하를 선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프라하가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졌기 때문 아니냐―라는 반론은 아쉽지만 무효합니다. 1931년 당시, ‘동유럽의 파리’는 프라하가 아니라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프라하가 해당 별명을 가지게 되는 것은 1950년대 이후로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러나 파리와 프라하가 각각 ‘좌측’과 ‘우측’에 있으며, 두 도시의 발음이 똑같이 P로 시작하여 R을 품는단 점에 의해서, 피츠제럴드가 프라하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역성'이란 표현, 'Le plus'로 대표되는 오타들 역시, 하나하나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하지만 저는 피츠제럴드가 프라하를 선택하고, 드뷔시의 곡명에서 오류를 저지르고, 그가 머물렀던 기간 동안 <이웃 마을>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이 엮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고, 그것이 단순히 작품의 외적 정보에 그치지 아니하고, 작품의 핵을 이루는 ‘jump’의 어려움과 일맥상통하다고 기껍게 말한 것입니다. 기꺼움, 즉 작은 유희입니다.
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읽었지만 개추
번역 어디로 읽음
민음사 번역본(단편선집1)이 사실상 유일한 번역본임. 그런데 비추함. 왜냐하면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은 사후 70년이 지났기에 저작권이 풀려났고,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의 자매 사이트(PGA)에 무료로 게시되었기 때문임.
https://gutenberg.net.au/fsf/BABYLON-REVISITED.html
해당 링크를 통해 전문을 긁고 챗지피티 혹은 제미나이 등에게 '원문과 번역본을 한 단락마다 나란히 병기해줘' 따위로 주문하면, 바로 번역본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음
@ㅇㅇ 종이책으로 사서 읽고 책을 소장하는 게 목적이라면 민음사 단편선집도 추천할만함? 1,2편 모두! 역자가 다르길래 - dc App
@로즈워터씨 소장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추천할 수 있음! 단, 단편집 2편은 구매하지 않아서 모르겠음... 하지만 읽는 것이 목적이라면, 적어도 <다시 찾은 바빌론>에 한정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함 (1) 피츠제럴드가 각각의 인물에게 부여한 개성있는 말투가 구현되어 있지 않음 (2) 피츠제럴드가 음율의 효과를 내기 위해 일부러 영어 대신 사용한 프랑스어들(거리를 낯설게 하는 동시에, 주인공의 기분을 술마신 듯 복돋아주는 역할)이 구현되어 있지 않음 (3) 이미 센강을 건너서 좌측으로 왔음에도 다시 좌측으로 간다는, 2번의 묘사(이것이 실제 파리의 공간구조상 사리에 맞지 않다는 연구자의 지적이 있었고- 판본상 단락을 착각하여 재삽입한 것일 수 있다는 의혹이 있음)가 중첩되었음에도, 이를 주석에서 언급하지 않음
@로즈워터씨 옮긴이는 단편을 번역할 때 2차 연구자료들을 뒤지지 않고 판본들만을 비교했을 가능성이 큼 따라서 소장상의 목적이라면 가질 수 있으나, 이 독서를 통해 옮긴이가 나에게 '전해주어야 할 정보를 되도록 유실없이 전해주었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될듯
님 정체가 뭐임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근데 음악의 연관성을 나는 잘 모르겠는데 구글링 해보면 연관성이 있다고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