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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 중 하나로 분류되는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덕'(aretê)에 관한 여러 중요한 문제들이 논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간 소크라테스는 그를 상대로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덕의 단일성', 자제력 없음의 불가능성'에 관해 논쟁하지만, 이 대화는 결국 아포리아로 끝난다. 소크라테스는 떠나고, 문제는 남겨진다. 과연 이 대화편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액자형 구조의 이 작품의 틀 바깥 이야기는 제쳐 둔다면, 이야기는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히포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서 배우려는 것에 대해 조언을 구하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에게 소피스트에게 배운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질책을 하고, 프로타고라스를 직접 찾아가 소피스트가 가르치는 기술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 덕에 대해 긴 대화를 하게 되지만, 결국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결정지어지기도 전에 자리를 떠난다. 이 결말부에서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에게 '다른 선생을 찾으라'는 등의 조언을 하지도 않고, 애초에 히포크라테스는 도입부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소크라테스는 첫 부분에서부터 프로타고라스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점은, 이 대화편이 단순히 소피스트를 논박하고 논쟁에서 소크라테스의 승리로 끝나기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Gagarin, M. [1969]. "The Purpose of Plato’s Protagoras.", 136n).


자신을 위장하지 않은 소피스트라고 주장하는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제자가 되면 얻게 될 것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은 "잘 숙고하는 것" 즉 "시민적 기술"(politikē technē)을 가르친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그런 것은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토론을 시작한다. 그는 필요할 때 건축이나 조선작업에 관해서는 그에 능통한 전문기술자를 부르지만 나라의 경영에 관해서는 그런 특수한 능력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점이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준다고 본다. 게다가 그는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고도 말한다. 다만 이제 그는 프로타고라스의 생각의 근거를 물으며 궁금해한다.


이제 프로타고라스는 '위대한 연설'이라고들 불리우는 옛날이야기를 통해 이에 대해 답변한다. 이 뒤에 '옛날이야기가 아닌 논변(logos)'을 펼치겠다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이 나오기에, "이 부분은 아직 본격적인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말하자면 논점의 서술에 가깝다"(Kerferd, G. B. [1953]. "Protagoras’ Doctrine of Justice and Virtue in the 'Protagoras' of Plato.", 42).

프로타고라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사멸적인 종족들은 없고 신들이 있던 옛날, 사멸적인 종족들 또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진 날이 다가오자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그들에게 적합한 능력을 분배해 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에피메테우스가 다른 종족들에게 거의 모든 능력들을 줘 버려서 인간 종족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채로 남게 되자,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나에게서 기술적 지헤와 불을 훔쳐 그들에게 준다. 그러나 이런 생존의 지혜가 아닌 시민적 지혜는 아직 갖지 못했는데, 이것은 처음 나타난 인류에게 부정의하고 무질서한 상태가 드러나자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에 의해 비로소 그 기술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시민적 지혜는 모두에게 분배된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모두가 시민적 조언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정치체제의 모습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제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언급한다. (1) 아테네인들은 나라의 일에 관해서는 모두에게서 조언을 듣는다. (2) 스스로 부정의하다고 말하는 자는 미친 자이다. (3) 시민적 덕은 사람에게 저절로 생기거나 천성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과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4) 이는 형벌이 자연적 결함들이 아니라 부정의한 행동에 대해 가해진다는 점에서 보여질 수 있다(그런데 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기에, 이는 누군가 가르쳐줘야 할 것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프로타고라스 자신이 이런 가르침을 하기에 적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가 이 대화에서 마주치는 문제이다).


앞의 논의에 따르면 덕은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자연스레 인간 안에서 자라나거나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프로타고라스는 323c에서 이미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우리는 모두가 이 덕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러나 자연적인 것으로서 간주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시민적 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된 것인 동시에 자연적으로 그러지는 않은 것이다"(Kerferd, 같은 글, 43). 게다가 이것을 모두가 동등하게 분배받았다고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만약 시민적 덕이 자연적으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그 분배의 동등성이 따라 나오지 않을 뿐더러, 이런 시민적 논의에 대한 참여는 "어떤 방식으로든"(323c)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해지지, 모두가 동일한 권리와 발언의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 도덕철학적이고 정치철학적인 논의가 생각될 수 있겠다. 또한 형벌이 교육적 목적에 있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 또한 숙고해 볼 만하다. 


이제 프로타고라스가 펼치는 '논변'은 이러하다. 나라가 있으려면 모든 시민이 거기에 참여해야 하는 하나의 어떤 것이 있어야 하고, 그렇다면 이는 특수한 기술들(technai)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유되어 있는 것, 즉 "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에 관해서 (덕의 부족함의 경우) 형벌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이들을 이런 형벌을 받도록 원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지혜로운 자들은 "그걸 가르치고 돌본다고 생각해야 한다"(325c). 여기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의 묘사에서는 좋은 음악의 도덕교육적인 기능에 대한 생각 또한 보여진다. 아무튼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이런 덕에 관한 형벌의 교정하는 기능을 통해 덕이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왜 뛰어난 아버지의 아들들이 못난 경우가 많은지에 대한 설명 또한 이루어지는데, 프로타고라스는 악기 연주자에 비유해서 논변을 펼친다. 그는 뛰어난 악기 연주자의 자식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자식이든 재능을 타고난 자는 뛰어난 악기 연주자가 되었을 것이고 타고나지 못한 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악기 연주에 전혀 전문지식이 없는 문외한들과 비교하면) 모두가 "충분히 괜찮은" 연주자였을 것이기에, 그런 식으로 우리는 누구든지 그를 정의롭고 이런 시민적 일에 전문기술자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악기에 재능을 타고난' 것은 '덕의 능력에 타고난'에 대응하겠지만, 이때 타고났다는 말은 "앞에서 부정한 자연적 덕 획득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 지록 누구는 더 큰 능력을 갖겠지만 모두가 그것을 획득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Gagarin, 같은 글, 143).


소크라테스의 질문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이제 '덕의 단일성'에 관한 내용이 된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떠올리며, 정의, 분별, 경건, 그런 모든 것들을 합쳐서 하나, 즉 덕이라고 했지만 이것이 덕의 부분들인지 아니면 하나의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인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이것이 덕의 부분들이며, 서로는 금의 부분들처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얼굴의 부분들처럼 다른 기능들을 한다고 말한다. 이때 이것이 소크라테스에게 그리고 이 대화의 주제인 덕의 가르침 가능성에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로부터 "덕은 앎이 아니"라는(330b) 말이 따라 나오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와 앎은 인간에 속하는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말해야만 하기에(352d), 덕이 이들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덕의 부분들로 알려진 것들 중 정의와 경건에 대해 논증한다. 이때 중요한 전제가 되는 것은  '정의는 정의롭고 경건은 경건하다'인데, 이는 말의 의도상 (역자가 주석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범주 혼동의 오류에 이르는 잘못된 명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 정의가 정의롭다는 것은 단지 '정의로운 어떤 것이 정의롭다'는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정의는 경건한 것이 아니고 경건함도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모든 논의가 플라톤의 '이분법 전제' 즉 정의롭지 않은 것은 부정의하고 경건하지 않은 것은 불경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결국 '정의는 불경하고 경건은 부정의하다'라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둘은 '비슷한 것'이 아니겠냐고 묻지만, 프로타고라스는 매우 다른 것들도 비슷한 점은 가지고 있기에 이로부터 저 둘이 하나의 덕으로 묶일 수 있는 그런 유사성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반론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성을 보여주기로 하면서, 지혜와 어리석음에 관해 논변을 펼친다. 문제는 '지혜의 반대는 어리석음이고, 분별 있음의 반대도 어리석음'이라면, 이는 "반대되는 것들 각각 하나에 반대가 하나만 있고 여럿이 있는 것은 아니다"(332c)는 합의된 원리에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하나에는 반대가 하나뿐이라는 원리를 포기하거나, 덕의 부분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때 이런 이분법적인 원리는 '좋음의 반대는 나쁨이고, 그 외에는 없다/높음의 반대는 낮음이고 그 외에는 없다'는 점에서 합의되기에 프로타고라스는 지혜와 분별이 그리고 정의와 경건이 동일하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다.


프로타고라스가 이런 결론에 대해 취하는 입장은 좋음/덕의 상대성에 관한 논변이다. 이때 여기서는 인간에게 좋은 것과 다른 동물들에게 좋은 것, 인간의 한 부분에 좋은 것과 다른 부분에 좋은 것에 관해서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의 이 논변이 꽤나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길게 말하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한다. 이후에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훨씬 더 길게 이어짐에도 말이다. 


막간의 드라마적 상황 이후에, 프로타고라스는 이제 시모니데스의 시를 가져오면서 논의를 재개하기로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이 시가 잘 지어졌다고 생각하는지 묻지만, 사실 그의 의도는 이 시가 터무니없는 모순을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었다. 시에서는 '진실로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는 구절과, '탁월하기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는 말이 같이 있는데, 덕이 하나라면 어떻게 이것이 잘 쓰여진 시겠냐는 말이다. 먼저 첫 번째로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되기'(genesthai)와 '있기'(einai)의 구별을 통해 모순을 해결해 보고자 한다. 진실로 좋은 사람이 되기란 어렵지만, 한번 되고 나면 그렇게 있기는 어렵지 않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반론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지만, 이어지는 해석에서도 이 전략은 유지된다. 즉, 훌륭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지만 가능하긴 한 데 반해, 탁월한 상태로 (영원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강성훈 [2010]. "플라톤의『프로타고라스』에서 시모니데스의 시 해석 II-소크라테스의 세 가지 해석." 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이 해석들에 대한 해석이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 해석에서 제안된 '되기'와 '있기'의 의미 차이 가능성과 두 번째 해석에서 드러난 '어렵다'의 부정이 '쉽다'는 것만이 아니라 '불가능하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결합하면, 바로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좋은 사람으로 있기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세 번째 해석이 나오게 된다. 결국,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처음 두 해석은 세 번째 해석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강성훈, 같은 글, 14).


이어서는 덕의 단일성에 대한 논쟁이 재개된다. 프로타고라스가 '지혜, 분별, 용기, 정의, 경건'을 마치 얼굴의 부분들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자 덕의 다른 부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 상기된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는 이제 이들 다섯 중 넷은 서로 상당이 유사한 반면, 용기는 그들과 다른 것 같다고 말한다. 예컨대 지극히 부정의하고 불경하고 무분별하고 무지하지만 한편으로 용기가 넘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용기는 곧 지혜임을 보이고자 하고, 그에 관한 첫 논변이 프로타고라스에 의해 지적되자, 이제 쾌락주의적 논변을 통해 이를 논증한다. 소크라테스가 실패한 첫 논변은 용기 있는 자는 대담하다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대담한 자는 용기 있는 자라는 것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데에 있었다. 이제 나타나는 쾌락주의적 논변은 행복이 앎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도입된다. 소크라테스는 "누군가가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알기만 하면 그는 그 어떤 것에도 굴복당하지 않고 앎이 지시하는 것 외의 다른 어떤 것을 행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현명함이 인간을 구하기에 충분하다고"(352c) 말하며 이에 대해 동의를 구한다. (물론 이것의 과정인 쾌락주의적 논변은 즐거움이 좋음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중요한 것은 앎임을 보이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론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곧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것을 하려고 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352d)는 것인데, 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그는 '즐거움에 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즐거움은 좋음과 같고 괴로움은 나쁜 것과 같다고 여겨지기에(354c), 위의 것은 즐거움에 지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것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이려는 것은 "단지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모든 요소들은 합리적이며, 그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는 즐거움이나 고통 같은 다른 요인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이다(Gagarin, 같은 글, 157).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서 이런 비합리적 요인들은 모두 앎의 문제이기에, 결국 앎만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힘든 운동이 가져오는 건강처럼) '좋은 것은 나쁘고, 나쁜 것은 좋다'는 대중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한 자는 즐거움에 진 것이다. 이는 그 즐거움(좋음)이 나쁜 것들을 이길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 없음이란 곧 좋음과 나쁨의 계산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즐거움을 최대화하고 괴로움을 최소화해야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곧 "측정의 기술"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것이 가까이서는 더 크게 보이나 멀리서는 더 작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두려움도 가까이서는 크게, 멀리서는 작게 보이며 따라서 단순히 '보이는 것'은 착각의 가능성으로 인해 올바른 삶의 기술일 수 없다. 따라서 측정의 기술이 남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것을 무력하게 만들고, 참된 것을 밝혀 줌으로써 영혼이 참된 것에 머물러 안식을 갖게 해주고, 삶을 구1원"해준다(356d~e).


이런 측정의 앎은 앎이고, 이런 앎의 결여는 무지이다. 무지는 "앎이 없어 잘못 행해진 행동"의 원인이 된다(357e). 즐거움에 진다는 것은 그래서 무지이고, 이런 것이 곧 '자제력 없음의 불가능성 논증'의 모습이다. 아무튼 여기서는 누구도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이 주장된다. 이것은 이제 무서움과 두려움에 관련해서 반복 및 강화된다. 나쁜 것을 향해 그 누구도 기꺼이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무서움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무서움은 "나쁨의 예견"으로 규정된다(359a). 왜냐하면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향해 가려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용기 있는 사람과 비겁한 사람의 차이는 "무서워할 것을 무서워하는 자"와 "무서워하지 않을 것을 무서워하는 자"의 차이이고, 후자는 무지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비겁함의 반대인 용기는 앎이다. 


이제 마지막에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질문들의 의도를 드러낸다. 먼저 이것은 덕의 다양성이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덕인 용기의 앎이라는 것이 곧 가르쳐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덕은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은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주장이었고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프로타고라스가 옳았다. 그러나 덕이 단일하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동의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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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는데 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