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무장 하고 싸우는 법을 논의하는데

185d

-우리가 어떤 것을 살펴보고 있을 때 살펴보고 있는 그 목적 대상을 보살핌에 있어 전문 기술을 지닌 사람인지 말입니다.-


이렇게 영혼의 보살핌에 전문 기술을 지녔는지, 이것을 잘 보살필 수 있는지의 논의로 넘어간다.


190c에서 범위를 좁히고 있다.

-곧바로 덕 전체에 관해 살펴보지 말고 아마 그건 너무 큰일이 될 테니까요. 덕의 어떤 한 부분에 관해 우리가 그걸 알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봅시다.-


190d에 가서야 우리가 익히 아는 라케스의 주제가 등장한다.

-무장하고 싸우는 법에 대한 배움이 지향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건 용기를 지향한다고 여겨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당히 느지막하게 주제를 잡고 이야기하는데 그 과정이 긴 대화편이었다. (칸은 <라케스>의 도입부가 어느 대화편보다도 길기 때문에 칸 본인이 생각하는 <라케스><에우튀프론><메논>의 덕에 대한 논의에서 서론 격이라고 주장한다.)


라케스가 말한 용기란 도망치지 않고 싸우는 것. 게릴라 전술 생각하면 쉽게 파훼되는 주장이다. 물론 도망이란 게 무엇인지 먼저 정의를 내려야겠지만, 여러모로 살펴보았을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간다는 문장만 봐도 용기가 개입될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도망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짓이다. 그러면 용기와 '겁을 먹다'는 표현은 어떤가. 도망이 곧 '겁쟁이'와 연관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다. 그러면 실제로 '겁에 질려서 도망'간다는 말에서 용기를 불러일으킬 씨앗은 전혀 없는 것일까?

라케스는 곧이어 용기란 영혼의 인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어떤 인내심이다. 겁에 질려도 도망가지 않고 상황을 인내한다. 뭐 이런 예도 있을 수 있겠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용기란 훌륭한 것에 속하고, 현명한 인내는 아름다운 반면 어리석은 인내는 해롭다고 말한다. 예컨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겁에 질려서 도망간다. 이때 본인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 도망을 택한다고 가정해보자. 전쟁이란 상황은 분명 개개인이 죽음의 공포를 인내하길 바랄 것이다. 모랄빵이란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이때 도망감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보존했다. 이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인내가 곧 전쟁의 승리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이 행동은 분명 어리석고 해롭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인내를 생명의 보존으로 본다면 현명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그러니 라케스는 인내의 사례를 예로 들기 껄끄러워한다. 당연하게도 이때 앎이란 단어가 튀어나온다.

니키아스는 용기란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한다.

라케스는 그러면 기술 장인들도 다 앎을 가지고 있으니 용감한 자들이냐는 반론을 한다. 니키아스는 이에 기술 분야는 각각의 분야에만 적용되는 앎이고 용기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계속 둘이 투닥투닥 하고 있으니까


198b~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는 좀 더 살펴봅시다. 선생님하고 우리하고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요. 자,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선생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두려움을 주는 것들이 두려워할 것들이고, 두려움을 주지 않는 것들은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났던 나쁜 것들이나 지금 일어나는 나쁜 것들은 두려움을 주지 않고, 예상되는 나쁜 것들이 두려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장차 있게 될 나쁜 것에 대한 예상이니까요.

그런데 하나의 동일한 앎은 동일한 일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점의 일에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앞서 말한 니키아스의 장차(미래)에 국한된 용기란 이런 전문지식과 들어맞지 않는다.


용기란 한 시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즉 용기란 모든 시점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에 대한 앎이다.

그런데 너무나 포괄적이지 않은가. 소크라테스는 앞서 인용한 대로 '곧바로 덕 전체에 관해 살펴보지 말고 아마 그건 너무 큰일이 될 테니까요.'라고 말하고 대화를 시작했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도출해 낸 결과는 전체로서의 덕을 말하고 있으니 용기가 무엇인지 찾는 걸 실패한 대화인 셈이다.

난문 aporia에 봉착한 용기에 대한 탐구의 시작은 언제나 ti esti(그것은 무엇인가?)였다. 대화편 시작점에서 중무장 전투술 배우는 자의 영혼에 대해 말할 때. 용기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탐구하는 영혼을 가진 것' 그 자체로 지혜를 지닌 전투술에 임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는 생각도 든다. ti esti를 물음으로써 난관에 다다르고 '아 무지했넴 ㅋㅋ'라는 깨달음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 여기서 지혜의 봉오리는 조심스레 피어난다. 그리고 한 번 피어난 봉오리는 난관의 끝자락인 존재와 무에 섞여들어 시들어버릴 때까지 다이몬의 아름다운 감탄사를 간직한다. 앎이란 아포리아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노력의 과정 포함될 것이다. 비록 시들어버린 꽃이어도 누군가 피었던 자리의 비옥한 토지를 개척해 더 크고 아름다운 걸 피워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교육이 있고, <라케스>의 내일을 향한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외에

178a와 179c를 보면 터놓고 말하다./솔직하게 털어놓다. 라는 뜻의 파레시아가 나온다.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건 188d -그리고 제게는 그런 사람이 정말로 음악적이라 여겨지는데, 그는 가장 아름다운 선법을 리라나 놀이 악기로 조율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언행일치의 상태로 조율해 내죠.-와 같다. 소크라테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소크라테스의 언행일치의 파레시아를 갖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푸코가 말기에 플라톤 대화편을 읽으면서 이런 파레시아 (모든 말, 솔직하게, 거침없이 털어놓기)를 주목하고 권력에 대한 관계에서 진실 말하기를 실행하는 철학 방법으로 연구한 것은 유명하다. 언행이 일치하는 솔직한 발언은 도대체 무엇일까. 푸코의 분석을 따라서 정치를 말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서는 <라케스>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보자. 파레시아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상상해보라 <변론>에서 할 말 다 하면서 거침없었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하지만 그런 용기를 지녀도 소크라테스는 당시 <변론>에서 모든 말을 내뱉지는 못 했다. 이전 독회에서도 언급했던대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 너무 짜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영혼을 돌보며 파레시아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시간은 너무나 중요한 개념이다. 자유로운 발언+솔직한 발언+그리고 행동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갖춰야 이루어지는 파레시아에서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라케스 마지막에 뭐라고 했던가.


200b

-내가 제일 나이가 많기는 합니다만, 그만큼 더 젊은이들과 함께 더할 수 없이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 내일 일찍이 집으로 와 주세요. 거절 마시고요.

~

-그건 그리하겠습니다. 리시마코스 님! 그리고 내일 댁으로 갈 것입니다. 신께서 바라신다면 말씀입니다.


마지막까지 배움을 위한, 더 나아지기 위한 시간을 요청하고 있다. 모든 말, 조화로운 파레시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모든 걸 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이런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를 시간은 어디서 어떻게 얻으면 좋단 말인가. 그리고 모든 것이란 건 이미 주어져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때 주어진 것은 무엇이기에 우리가 다가서려 한단 말인가. 파레시아-조화-언행일치-지행합일-지혜-앎 이 모든 논의를 관통해줄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일까.

아직도 대화편 초기다. 급할 필요가 없다.



다음 주는 에우티프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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