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론적 논증의 희망은 한 가지다.
249p
-동일한 내적 원인이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은 동일한 원인이 의식의 극장에 여러 번 다시 나타날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러던가. <시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코웃음 치고 넘어갈 일이다.
-외부 대상은 흘러간 시간의 표지를 달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순간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는 동일한 기본 조건들을 다시 대면할 수 있는 반면, 지속은 그것의 흔적을 보존하는 의식에 실재하는 것이며 그리고 동일한 순간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동일한 조건을 논할 수가 없다.-
250p
-동일한 감정은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감정이 된다. 심지어 그것이 동일한 외부 원인에 대응하거나 유사한 기호에 의해 밖으로 번역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것의 옛 이름을 보존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주장하는 두 상태의 유사성으로부터 동일한 원인이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연역한다면 진정으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인과관계가 내적 사실들의 세계에 아직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가 자연에서 인과성이라 부르는 것을 닮을 수가 없다.-
역주 135번에서 정리해 주고 있다.
251p에서는 너무나 깊은 착각, 너무나 집요한 편견. 인과율이라는 원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252p에서 말한 대로 조건 abcd가 있는 그대로 반복해 규칙성이 발견된다면 문제없겠지만
252p
-문제는 바로 의식의 영역에서 그런 규칙성이 발견되는지를 아는 것이며, 모든 자유의 문제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의식의 사실들에 (기계적)인과율을 적용할 수 있겠는가.
책에는 안 나와 있지만 여기 인과율에 대한 보충 설명을 남긴다. 인과율을 많은 사람들이 필연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결정론자의 기계적인 인과율이다.
여기 길게 이어져서 하나인 게 있다고 생각해 보자.
네모 안은 말 그대로 이어져 있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가는데 방해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건 분명 누가 봐도 필연일 것이다. 굳이 말을 붙여보아도 A 하나일 뿐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니까. 자 그러면 가운데에 선을 하나 그어본다. 어? 그러면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 나온다.
이때 A에서 B로 간다고 생각해 보자. 직사각형 '하나'였던 거랑 비교해 보라.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가? 그렇지 않다 p라는 것도 있고 A와 B로 둘이 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결코 필연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걸 필연이 아닌 것. 즉 우연이라고 말한다.
자 이제 앞서 말했던 인과율을 생각해 보자. 인과율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미 말을 풀어낸 것에서 드러난다.
원인 A에서 결과 B가 나온다는 말은 A와는 다른 B가 있다는 말 아니겠나. 즉 원인 A와 결과 B로 하나가 아닌 둘이 나온다. 그러면 인과율은 우리가 검토했던 도형 중 무엇에 가까운가.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무슨 인과율이 우연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인과율은 분명 필연의 요소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렇게 우연의 속성도 함께 지닌다. 이것이 인과율의 본질이다. 여기서 우연의 속성을 배제하고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 결정론자의 인과율이다. 이제 255p에서 -그것은 현재 가운데에 미래가 현실적으로 미리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 인과율로부터 결론을 도출한 것에 불과하다-라는 베르그송의 표현이 무엇을 저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 필연이다. 또한 여기에는 우연이 있다. 베르그송 철학은 이러한 둘의 만남을 놓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직접 주어진 것이니까.
지금은 여기까지만 해놓고 나중에 <창조적 진화>를 할 때 소은 박홍규 선생님 <강독>을 함께 언급하면서 다시 하도록 하자.
이후 257p에서
-이렇게 이해하면 인과성의 관계는 마치 곡선이 그 점근선에 접근하듯이 무한히 동일성의 관계에 접근한다는 의미에서 필연적 관계이다.~~ 그러나 인과율이 미래를 현재에 연결시키는 것인 한, 결코 필연적 원리의 형태를 띠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위에 설명한 그대로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59p
-결과가 원인에 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수학적 결론들을 원리 속에 넣듯이 결과를 원인 자체에 넣으려 하고 그리하여 '지속의 작용'을 제거하려는 경향을 더 많이 나타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의 두 번째 그림의 B를 A에 집어넣어 첫 번째 그림처럼 하나로 만들려는 걸 말한다. 결정론자들의 행태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독회에서 계속 설명한 대로 지속의 작용은 둘의 만남이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같은 도형으로 계속 설명하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지속)을 첫 번째 그림의 직사각형 하나로 만들려고 하니 이런 지속의 작용(만남)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어서
-동일한 외부 조건의 영향하에서도 오늘의 내가 어제 행동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나는 변하고 지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지각 밖에서 생각된 사물은 우리에게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 관념을 천착하면 할수록, 동일한 원인이 어제 낳은 것과 동일한 결과를 오늘도 낳지 않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보인다.-
항상 베르그송의 글을 읽을 때는 ~처럼, ~마치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이건 베르그송 저서에서 크게 두 가지 사용례가 있다. 하나는 위에 쓴 인용문대로 착각에 대한 걸 설명할 때다. 두 번째는 지속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다. 이에 대한 예시는 ~마치 지속은 강물 ~처럼, ~마치 지속은 주전자에서 내뿜는 증기 ~처럼 같은 게 있다. 그리고 내가 독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림들. 이것도 설명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그림에 매몰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중요한 문구가 나온다.
-사실 사물이 우리처럼 지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현상들이 모두 한꺼번에 전개되지 않고 계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느끼고 있다.-
물질은 지속하는가? 그렇다 모든 건 지속의 상하에서 이야기되는 것이니까. 시간이 물질만 피해 갈 거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안에서 물질은 열심히 진동을 함과 동시에 미약하지만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 즉 우리와 같은 그런 지속이 아닐 뿐이다.
베르그송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 놓치면 물질은 지속하지 않는다는 말로 앞뒤가 안 맞는 사이비 해석을 하게된다. 아니 베르그송 철학의 해석이 맞냐 아니냐를 떠나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물질에 지속이 없으면 단번에 주어졌다는 말인데 어디 우주가 그렇게 되어 있던가? 그러면 소행성이 어디 처박는 일은 왜 일어나겠나. 다 한 곳에 응축해서 모든 게 주어져 버렸음. 뿅! 하고 끝낼 일이지. 베르그송은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면 데이터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이건 올바른 해석, 저건 잘못된 해석이 어디 있겠나. 사실은 사실이지.
260p
-우리가 인과관계를 필연적으로 결정의 관계로 세우려는 경향을 보일수록, 그것에 의해 우리는 더욱더 사물이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곧 인과율이 견고해질수록 더욱더 심리적 연쇄를 물리적 연쇄와 나누는 차이가 강조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만남을 자꾸만 뜯어서 A는 A, B는 B의 각각 하나로 만들어낸다. 심리적 연쇄와 물리적 연쇄를 나누는 차이가 강조된다는 건 그런 뜻이다.
즉
이렇게 떼어놓으려 한다는 것.
261p 두 번째 문단에서 미리 이루어짐이 나온다.
이건 미래가 현재 속에 미리 형성되어 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이미 앞서 설명한 걸 다시 반복해도 괴리감이 없을 정도로 같은 논리로 반박된다. 본문의 내용만 읽어도 무리가 없으므로 패스.
265p에서 라이프니츠를 언급하면서
이미 주어졌다는 모나드를 비판한다.
265p 하단 ~
-인과성 관계에 대한 역동적 견해는 사물에 우리의 것과 완전히 유사한 지속을 부여한다.-
물질은 분명 지속하지만 우리처럼 그런 지속은 아니다. 그런데 역동론자들은 과도하게 우리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덕분에 예정조화설이 나오는데...
결국 사물에 대한 지속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세 가지 길이 나온다.
첫 번째는 사물은 수학과 같은 필연성을 가지며 의식 세계와는 전혀 다르므로 지속과는 별개의 것 (기계론)
두 번째는 사물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한다는 것. (역동론)
세 번째는 사물은 지속하나 우리와 같은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향하는 길이다. 하지만 지금 시론의 3장은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무엇이 문제인지 밝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지 베르그송 본인이 세 번째임을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과 지속의 관계는 <물질과 기억>에 가서야 정립되기 때문이다. 또또또또또 반복하지만 <시론>은 베르그송 저서의 서론으로 봐야 한다. 초기, 중기, 후기 철학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베르그송 주저는 모두 이어져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이 270p 까지다.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 길을 비교하는 것을 중점으로.
이제 제3장의 결론이다. 복습할 겸 그대로 다시 옮겨본다.
270p~272p
-우리가 자유롭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분석되지만 진행은 분석되지 않으며, 연장성이 분해되지 지속이 분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하기를 고집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진행을 사물로, 지속을 연장성으로 변형시킨다. 구체적 시간을 분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순간들을 동질적 공간을 펼쳐 놓는 것이다.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 대신에 이루어진 사실을 놓고, 자아의 활동을 말하자면 고정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자발성이 타성으로 자유가 필연으로 해소되어 버리는 것을 본다. 그것이 자유에 관한 모든 정의가 결정론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이다.
<OX는 OY를 그리워하고 OY는 OX를 그리워하네>
-자유로운 행위를 일단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정의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주장 (그 반대의 주정과 마찬가지로)은 구체적 지속과 그 공간적 상징 사이의 절대적 등가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런 등가성을 인정하자마자, 방금 선언한 공식의 전개 자체에 의해 가장 완강한 결정론에 도달한다.-
ex)아 내 첫사랑이랑 결혼에 성공했으면 너만 한 아이가 ㅇㅇ~ 아 내 첫사랑이 캐나다로 유학 가지만 않았어도 초밥집에서 알바하는 녀석한테 뺏기지 않았을 텐데 ㅇㅇ ~ 부가 설명이 필요 없는 자유와 동떨어진 의미 없는 짓이다.
<OXY를 생각하고 그런 조건을 모두 알았어도 예견할 수 없는 것이 자유인가요? 사실 그런 조건을 생각하는 순간이 이미 결정론 아니던가요.>
-자유로운 행위를 모든 조건을 미리 알았을 때라도 예견할 수 없는 행위라고 정의할 것인가? 그러나 주어진 모든 조건을 생각한다는 것은 구체적 지속에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자리 잡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때는 심적 지속의 재료가 미리 상징적으로 표상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말했듯 시간을 동질적 장소로 취급하고, 지속과 상징의 절대적 등가성을 새로운 형태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이런 두 번째 정의를 천착해도 역시 결정론에 도달한다.
ex) 아 내 첫사랑이 캐나다로 안 가고 초밥집에서 알바하지만 않았어도!! 하긴 뭐 그래도 예상할 수 없는 거지 안 그래? 이때 (캐나다, 초밥집) 조건들을 콕 집어서 상징화하고 공간화해서 반복시키고 있다. 흘러간 것에서 자유를 찾아보겠다고 헤집어 놓는 건 앞선 결정론과 똑같은 짓. 베르그송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이 캐나다로 가지 않았고 초밥집에서 알바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때의 나는 이미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를 ‘미리 안다’거나 ‘예상한다’는 말로 자유를 포장해선 안 된다”
<M에 의해서 OX, OY가 나오는 건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자유를 말할 건가요? 그런데 그건 거꾸로 결국 M 이란 게 OX, OY 말고 다른 결과를 야기한다는 뜻을 가리키니 자유라고 말할 수 없는 거 아니던가요?>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행위를 그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정의할 것인가? 그러나 그 말이 모든 종류의 의미를 잃거나, 아니면 그것은 동일한 내적 원인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야기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유로운 행위의 심적 선행조건들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이러한 자유는 순간들이 모이는 지속 속에서 펼쳐지며(순간들이 모인다 하더라도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걸 돌려 말하고 있는 것. 시론 독회를 지금까지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쉽게 독해할 수 있는 문장) 시간은 공간과 같이 동질적 장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 자체에 의해 지속과 그 공간적 상징 사이의 등가성의 관념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해 내릴 정의를 쥐어짬으로써 거기서부터 다시 한번 결정론을 나오게 할 것이다.-
ex) 첫사랑에게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그래 자유란 같은 내적 조건에서도 고백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야.
이러한 예는 베르그송 입장에서 명백히 틀려먹은 자유다. 이건 얼핏 보기에는 자유를 주장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동일한 내적 원인이란 것 자체가 지속의 상하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오늘 본문에서 말했던 선결문제의 오류다. 심리 상태를 고정시키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자꾸만 무얼 찾게 된다. 그래서 결국 고백을 안 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순간에는 왜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 차일까 봐 두려웠던 탓에? 우리는 또 다른 내적 원인을 만지작댄다. 사랑 고백의 자유는 같은 조건에서도 고백했을 수도, 안 했을 수도 있음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는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일 수 없게 되었다. 가 올바른 자유다. 지속의 상하에서 그때 그 시절은 다시 소환될 수 없다. 그때인 나는 그때의 나이며 그때가 아닌 나는 그때가 아닌 나일뿐이다.
-요약하면, 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생각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환원된다. 즉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 여기에 우리는 대답한다. '흘러간 시간'이라면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
-그런데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들 중에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다음 주는 결론으로 시론을 끝냅니다. 뒤에 이어진 역자의 해제는 이미 그동안 했던 독회 본문에 포괄적으로 다 반영했으므로 따로 다루지 않겠지만 꼭 읽어보시길.
고생하셨습니다
결정론자는 결과를 원인으로 속에 넣어 원인과 결과 하나로 이으려 하지만, 베르그송의 지적대로 원인과 결과 간 상호 작용(혹은 그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과정)을 무시한다고 지적함. 이는 사물의 현상이 반드시 사람의 의식 속의 현상과 동일할 수 없으며, 이를 사물의 지속과 사람의 지속 간 차이를 두어 지속의 개념을 구체화하는 대목이던 것 같음. 이번 주차는 오묘한 불교 냄새가 나던데, 나가르주나의 연기론이 생각이 남... 이를 두고 만류귀종이라 하는 듯...
오늘 부랴부랴 베르그송 책 읽고 글 써서 질 자체는 그리 좋지 않음에 양해를 구해요.. 재독 기간 때 좀 꼼꼼이 읽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