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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복 멈춰~!

이것은 독서 갤러리의 문제아이자 영원한 아이돌, 미시마 유키오를 대표하는 밈이다. 주로 ‘거사’ 당일의 미시마의 사진과 함께 쓰이는데, 눈썹 짙은 중년의 결의에 찬 표정과, 흰 머리띠 때문에 더욱 도드라지는 동그란 두상, 허공에 어색하게 내뻗은 팔이 담긴 그 사진은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익살스럽지만 ‘할복 멈춰~!’라는 직접적인 조롱의 텍스트까지 더해질 땐 보는 이로 하여금 도저히 실소를 참을 수가 없게 만든다.

어린아이가 똥! 방구! 같은 원초적인 단어를 들을 때 푸하핫 웃어버리듯이, 할복! 같은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실소하게 만들고 마음을 놓게 만든다. 그렇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시마 유키오’나 ‘할복’은 제 신선도를 유지하는 유통기한이 다한 것들이고, 더없이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만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미적 감각과 거대한 자의식으로 이루어진 자화상, 그 오래된 자화상을 살핀 자는 느꼈을 것이다. 한 사나이의 원대한 야망을, 변화해가는 인간 세계에 대한 탄식을, 그리하여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를 향한 대담한 도발을. 그것은 독자를 사로잡는 미시마만의 위험한 카리스마이고, 나는 얼마 전에 읽은 <나쓰코의 모험>에서 그 풋풋한 편린을 맛보았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철부지 아가씨, ‘나쓰코’의 충격 선언 [나, 수도원에 들어갈래] 로 시작되는 <나쓰코의 모험>은 미시마의 초기 소설 중 하나로, 진지한 주제 의식 전개나 심리 묘사보다는 흥미 본위로 쓰인 이른바 통속소설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마음에 남기는 흔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 시대에는 도저히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모험과 낭만에 대한 향수를, 나쓰코는 품게 만든다. 소설의 대략적인 전개는 다음과 같다.

진정한 정열을 가진 사내를 만나기를 꿈꾸는 나쓰코는 아름다운 미모로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이상형을 찾을 수 없었고, 그저 그런 결혼을 할 바엔 차라리 어느 남자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수녀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수도원으로 떠나던 중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이 찾던 진정한 정열을 지닌 사내, 이다 츠요시를 만나게 되고(츠요시는 자신의 전 애인을 죽인 흉악한 식인 곰을 사냥하기 위해 배낭을 메고 총 한 자루를 쥔 채 홋카이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쓰코는 츠요시와 함께 모험을 떠나고자 결심한다. 츠요시는 곰 사냥에 거슬릴 게 분명한 나쓰코를 떼어내기 위해 여러 계책을 세우지만 나쓰코의 수완에 깔끔하게 백기를 들고, 서로에게 나름의 정열이 있음을 인정한다.
모험담이 으레 그렇듯 수많은 역경들이 주인공을 괴롭히지만 두 사람의 곧은 인품과 이웃들의 따뜻한 호의가 둘의 앞길을 지켜주며 서로는 애정과 정열을 키워가고, 이야기를 뒤흔드는 거대한 고난 앞에서 두 사람은 멋지게 위기를 극복하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아름다운 결말을 맞는다…….

이 얼마나 전형적이고도 아름다운 모험담인가?
하지만 이런 모험담을 맛보는 것이 나를 들뜨게 만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다. 만약 내가 소설의 분위기에 취해 총을 둘러메고 단단히 무장을 한 채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볼 나쓰코를 기대하며) 기차역에서 진지한 표정을 흉내 낸다면, 몇몇 사내가 슬쩍 다가와 어느 코스프레 행사장으로 가는 중인지를 물을 것이리라. 아니면 사랑의 도피는? 저 하늘의 위성이 데이터 연결을 보증하는 한, 과년한 딸이 도주를 했는데 전전긍긍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문자메시지는 보내지 않아 줄 느긋한 가족은 없을 것 같다. 곰을 잡으러 갈 시간을 내는 것은 또 어떠한가? 츠요시는 회사 재직 중 성실하게 일하며 신뢰를 쌓은 뒤 자세한 사유를 밝히지 않은 2주간의 휴가를 당당히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고, 거기에 더해 상급자로부터 ‘유사시엔 며칠 더 병가를 내도 괜찮다’는 따뜻한 호의까지 받았지만 이 또한 바쁜 21세기와는 도저히 맞지 않다.
여차저차 곰을 멋지게 사냥했다고 치자. 난데없는 총성을 들은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내게 다가온다. 유해조수 사냥 허가증은? 총기 소유 허가증은? 아마도 남은 이야기는 서에서 해야 할 것이다.
…… 아니 애초에 요즘 시대에 누가 곰에 물려죽는데?

이처럼 21세기를 살아간다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아무도 낭만을 모른다. 누구도 모험을 떠나지 않는다. 사회 구석구석을 책임지는 인프라가 우리의 안전하고 쾌적한, 그리고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준다. 다시 말해, 도무지 사람을 내버려두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남아 있던 모든 낭만과 모험, 그리고 위험한 사상은 20세기가 잡아먹었고 우리는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만 그것들을 은근하게 더듬어 볼 뿐이다. 누군가는 미시마에게 물을 것이다. 할복을 멈춰 세우고서.

20세기는 재밌었습니까? 정말 우리가 멸칭으로, 또 애칭으로 부르듯이 낭만의 시대였습니까? 이제 여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식인 곰을 사냥하겠다며 무모하게 뛰어드는 사나이도 없고, 그런 야성적인 정열을 흠모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어디까지고 따라갈 귀여운 아가씨도 없고, 바다를 보며 뜨거운 야심을 기르는 나르시시스트도 없고,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국가 전복을 모의하는 젊은이도 없습니다. 일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위험한 사상인 ‘할복’도 당신이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체 21세기에는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다가올 시대에 더 이상 낭만과 모험을 기대할 수 없기에, 당신은 삶을 저버린 겁니까?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소설 속 나쓰코의 독백으로써 미시마의 대답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남자들은 입만 열면 시대가 틀렸다느니 사회가 문제라느니 말이 많지만, 자기 눈 속에 정열이 없다는 게 제일 나쁘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

사실은 그랬을 것이다. 아마 미시마 유키오의 시대에도 젊은이의 가슴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충격적인 2차 대전 패전으로 삶에 대한 허무감과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했을 당시의 일본에서, 낭만이나 모험, 야심 같은 철부지스러운 단어의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으리라 생각된다. 젊음이 젊음을 상실한 시대적 혼란 속에서, 미시마를 포함한 당대의 청년들은 자기 존재의 위태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20세기란 그런 시대였기에, 미시마는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나 사회라는 이름으로 변명하지 않는 자신의 낭만을 가져야 한다고.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그래서 그것을 끝까지 좇고 좇다 보면 마침내 자기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뜨거운 정열을 품어야 한다고. 미시마는 그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기 자신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낭만과 정열을 품는 일이 반드시 유쾌하고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일은 인생에 대한 나의 태도를 조금 더 진지하게 만들어준다. 매 순간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자,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살피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낭만과 정열이 깃든다면, 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쳐나가는 일도 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끝으로, 내가 적은 <나쓰코의 모험>의 줄거리엔 사실 한 가지 작은 거짓말이 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 귀여운 반전을 밝히는 건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겠다. 아직 <나쓰코의 모험>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상쾌한 기분으로 모험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싶다. 힌트를 하나 남기자면, 미시마는 사실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정열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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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월간독갤 투고용으로 쓴 글이라 여기는 안 올리려고 했는데
장문의 감상글을 올리기를 주저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걸 깨닫고 갤주의 추종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해 작성한다.

남들의 비난과 조롱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미학」만을 우직하게 추구하는 것이 방패회원의 긍지이기에.

지켜봐 줘... 미시마 유키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