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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는 두 손이 다 비어 있는 듯 보일지 몰라도 나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이 있다. 내 삶에 대해, 그리고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다. 그래, 난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진실이 나를 받쳐주는 만큼 나도 그 진실을 받치고 있다. 나는 옳았고, 지금도 옳고, 영원히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을, 내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이 새벽녘을 내내 기다려왔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고, 왜 그런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도 알고 있다. 내가 이 불합리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내내 미래의 저 깊은 곳에서 어두운 숨결이 나를 향해 올라왔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엄마의 사랑이 나와 무슨 상관있나. 그의 신, 사람들이 택하는 삶들, 사람들이 선택한 운명들이 나와 무슨 상관있나. 어차피 단 하나의 운명이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나뿐인가. 나와 더불어 내 형제들이라고 자처하는 수십억 명의 특혜받은 자들도 같은 운명의 선택을 받는 건데. 그러나 이해하겠는가? 이해하는가? 모든 사람은 특혜를 받았다. 특혜받은 자들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도 언젠가는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이다."




알제리의 소설가, 카멜 다우드의 다시 쓰기 작품, 《뫼르소, 살인사건》이다.


당연히 카뮈의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으로, 이야기 전체가 이방인의 줄거리를 전복하고 따라가는 방식이다.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기존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은 평면적인 작품은 아닌가 생각이 들 수 있지만(어떤 점에서는 실제로 그런 점도 있을 수 있고) 그러나 그 실상은 단순하지 않다.


이 작품에서 《이방인》은 핵심이자, 사실은 맥거핀이다. 작품이 주요하게 말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상과 뫼르소의 제국주의 행태를 고발하고 그 자리에 아랍인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의 뫼르소와, 이 작품의 주인공, 하룬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이방인이다. 여기에는 알제리의 복잡한 역사가 끼어 있다.


책을 조금만 살펴 보면 이 책이 이방인이 아닌 알제리 자체를 다시 쓰려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이방인에 묘사된 알제리 풍경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살펴야 한다.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로서 알제리는 그곳이 진짜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 아니라 외딴 공간, 프랑스이면서도 프랑스가 아닌 공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가능할 것이다. 즉, 부조리는 일어나지만 그건 인간의 것이지, 알제 자체는 뫼르소에겐 그냥 소유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인공 하룬에게 이곳 알제리야말로 삶의 부조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하룬의 실존은 뫼르소와는 분명 다르다. 그는 이곳에서 일을 해야 하고, 아랍인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인식하고, 프랑스인 구역과 분할된 아랍 지구를 항상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곳의 생활상도 그에겐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해변 도시가 자아내는 덕지덕지하고 지저분한 풍경. 여기에는 순수한 애향심보다는 꽉 닫혀버린 고향에 대한 애증이 깃들어 있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저자는 아랍권 특유의 공동체주의와 가족제를 비판하는 데에 서슴이 없다. 프랑스지구가 얼마나 실존을 보증해 수 있었던 간에, 아랍지구의 삶은 너무나도 봉건적인 공간이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하룬은 뫼르소에게 죽은 형 무싸와 그에 대한 어머니의 히스테릭을 견뎌내야 하는 무거운 공간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렇다면 이제 뫼르소의 총질과 대비하여 쓴 하룬의 총질도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단순히 형을 무감하게 살해할 수 있었던 제국 프랑스를 향한 것뿐만 아니라, 진물이 넘쳐 흐르는 닫힌 사회 알제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문에 도리어 뫼르소와 하룬은 동일한 선상에 서게 된다. 그들은 프랑스, 알제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자다. 뫼르소가 아랍인이 아닌 프랑스인들에게 기소된 것처럼, 하룬 역시 프랑스인이 아닌 아랍인으로부터 기소받는다. 여기에서 사건을 맡은 판사가 보여주는 냉소가 아주 인상적이다. "내가 프랑스인을 죽인 알제리인을 심판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이 냉소에는 어떤 역사적인 의지가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때 알제리는 혁명의 열기로 사실상 항시 전투 상태였기 때문에, 살인이 성립되지 않았다. 적을 죽이는 걸 우리는 살인이라 하지 않기에, 프랑스인을 죽이는 건 알제의 역사에 기원하는 숭고한 행위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하룬은 이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가 전투가 아닌 살인이 된 것은 소설 속 표현처럼 그가 적절한 시기에 그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의 혼세통에서, 어느 날 하룬의 집에 프랑스인이 침입했고, 하룬은 앞에는 프랑스인, 뒤에는 엄마 사이에 낀 채 결국 복수를 강요 당한다. 결과적으로 하룬은 "그런 일을 할 거면 일주일 전(독립기념일 7월 5일 전)에 했어야지!" 라는 말로 꾸짖음 당한다.


하룬의 행위는 결국 뫼르소와 같은 선을 걷는다. 그는 신의 대행자로서도, 알제의 투사로서도, 복수의 대리자로서도 대행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에서 비껴나간 그 틈새에서, 모두의 맹렬한 야유를 기대 받을 수밖에 없는 '살인'을 완성한다.


작품은 이방인의 대척점으로 서 있기보다는, 동일한 나선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택한다. 그리고 역사가 저지르는 무수한 전투 사이에서, 진실로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제국과 피식민자의 끝에서, 그렇게 묻는 것이야말로, 어떤 대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한 지점에 빠지지 않은 채 쭉 선을 그려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어쩌면 다시 쓰기가 아니라, 계속 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