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7fed8270b5836af651ed86e5428474736911f2011384e3d4ae9c31eb80e1a3f3


7fed8270b5836af651ed86e5438176738f6b375b2959d4bb173272fde121e5ed



[구토]에 대하여 메모.





 관념에서 출발하는 문학은 어떠한 개인의 삶에도 도달하지 못 한다. 



개체들의 완전한 특수성은 어떠한 개념이나 명제에 따른 정의에도 합당하게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촌로에서부터 현자에



이르기까지, 삶에 대한 무수한 설명이 있었음에도 계속 새로운 설명이



나오는 것은 그들 말이 개념에는 일견 적합하나 개인들 각각을 완전하게



포착하는 데 실패하기에 그렇다. 관념적 문학이 실패하는 지점은 개인의



삶에 침투하여 뿌리내리지 않는 데 있다. 관념이 설득하고 설파하는 당위에는



삶을 이용할 뿐 개인을 긍정하지 않는다. 내가 '못'과 '않'을 구분한 점은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는 표상에 한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파멸적인 결론, 곧 독자로부터 냉소와 힐난을 각오해야 한다.



 


 최인훈의 [광장]은 낡고 닳은 관념적 찌그레기를 고수한다. 작중 인물은



관념 그 자체이기에 어디에도 뿌리가 없다. 그는 어떤 선택도 않는다.



삶에 의한 어떠한 지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생명이 끝남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실소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삶은 그가 등을 지고 떠나온 곳에 있기 때문이다. 삶은 그가 상징으로 호소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 눈물, 피땀을 요구하면서 계속된다. 차라리 오영수의 



[메아리]가 더 설득력 있는 것은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남아 할 바를 썼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로캉탱이라는 현대인의 표상을 제시했다.



의미-무의미 사이에서 기계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을 축약하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신이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지칭해야 할 것이다. 무신론적



세계에서는 인간 개개가 대부분을 결정한다. 의미와 무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때로 그 일은 단순한 작업처럼 될 수 있다. 자기 방에 있는 등을



켤려고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하듯 말이다. 그렇지만 스위치를 올렸다고



해서,  방 안이 환하다고 해서 다음 행동이 스위치를 내린다라는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때로 주저한다. 소설 [구토]가 갖는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곧 관념이 닿지 않는 부분이다. 로캉탱이 부빌에서 파리로 가듯, 의미-무의로의 전환은 간단




하지 않다. 많은 현대인들이 스위치의 온-오프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그중 일부는 



주저 앉거나 죽는다.




"내 안에 실제로 남이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



존재뿐이다." -391p. 임호경 옮김-




현대인이 감당하는 사태에 비하면 사르트르가 내린 결론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결코 지향없이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결국 스위치를 움직여야 한다. 다만 



동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르트르가 설명 않는 것은 로캉탱이라는 순수한



표상이 일그러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