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이 글은 문학이 현실의 개별적 삶(부분)과 사회·역사적 맥락(전체) 사이의 균열을 매개하는 활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부분을 보려 하면 전체를 놓치기 마련이고, 전체를 보려 하면 구체적 현실을 놓치기 쉽기 때문에 이 둘 사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균형이 무너질 때 현실 인식은 왜곡된다.
우리가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이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에 부딪힌다. 그러나 이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은 문학에 있어서 특히 핵심적인 사실을 이룬다.
문학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부분과 전체 사이를 이어 인간의 영웅적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는 차원을 향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이 전체를 향한 발돋움이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다.
이 관점에서 일제하에 쓰여진 한국 문학은 반드시 식민지라는 전체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식민지 체제는 사회생활 전체를 규정하는 ‘얼어붙은 전체성’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식민지의 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성을 띌 수밖에 없다.
사회의 변화는 이미 제도와 질서 속에 구현된, 드러난 전체와 여러 가지 관계 속에 감추어진 전체가 서로 파괴하고 또 보완하며 생겨나는 갈등과 균열을 통해 일어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식민 지배와 함께 멈춰 버린다. 식민지 삶의 전체적인 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개별자와 전체성의 관계가 얼어붙은 전체/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개별자의 관계가 된다.
또한 일제 이전에 활발했던 여러 분야에서의 개혁과 외견상의 변화와 내부로부터의 파괴 공작이 섞이며 식민주의의 영향을 포착하기 힘들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식이 고조되는데, 개인의식은 새 사회 질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 개인 의식의 문제가 한국 문학에서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부분도 식민 지배라는 전체 상황의 테두리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광수는 <무정>으로 전통 사회의 속박으로부터의 개인 해방을 내세웠다. 그의 개혁안은 당대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필요를 표현했으며, 그를 신문화의 교사로서 크게 각광받게 해주었다.
이광수가 내세운 개인의 해방은 "개인이 해방되지 않으면 민족도 해방될 수 없다"는 의도를 가진 것이였으나, 그와는 별개로 그의 개인 옹호 사상은 집단의식의 쇠퇴를 원한 통치자들에게 무척 편리했을 것이다.
이광수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개인주의적 문화의 귀착점은 공동체 의식의 퇴화를 불렀다.
염상섭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했다. <만세전>에서는 식민 통치 하에 썩어가는 한국 사회의 실상과 타락한 전통 질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사회의 혁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가를 얘기했고,
<삼대>에서는 전통 사회의 부정과 죽어 버린 제도의 보수주의 사이의 중도적 길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의 중도적 길은 전통 가족 집단주의의 도덕적 혁신에 있었다.
그러나 염상섭은 전통 가족 제도의 구조적 문제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개인주의는 이광수의 도덕적 자아주의가 아니라 소외와 아노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예술가들은 전통적으로 소외된 내지는 반항아 같은 존재이지만, 그들의 소외는 구사회와 신사회간의 계승 사이에 나타나는 사회 자체의 균열을 대표하기에 완전히 소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민지 사회에서 예술가는 사회 변동의 매개자가 되지 못하고, 정복자의 문화와 피지배 문화 사이의 회색지대에 고립된다.
이상은 날카로운 자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식민지적 소외를 가장 예민하게 형상화한 작가로, 그의 소외는 그의 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해경이 이상이 된 이유는 몇 가지 일화가 있으나, 김우창은 건축 기사로 일하던 당시 한 인부가 金상을 잘못 읽어 李상으로 부른 것에서 창안했다는 설을 채택했다. 김 씨 성을 버리고 이 씨 성을 택한 것은 성씨로 표현되는 가통 의식의 무의미함을 표현하려 한 것이고, 인간의 자아가 극히 우연적 사정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는 냉소적 인식, 즉 한국 성 '김'은 의미를 상실했고 일본의 '상'이 되어 가는 것, 그 미묘한 자기 인식을 필명으로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날개>는 자유롭지만 무력한 식민지 문화인의 모순과 화폐경제 속 권태를 드러내는 소설이다. <날개>의 주인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의 자유는 세계와의 감정적, 실존적 절연에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의 조그마한 자기 방에서만 살아간다. 그의 삶의 문제는 '권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권태란 단순 심심하다는 감정보다는 나와 세계의 근원적 에너지 사이의 관계가 희미해졌다, 그것에서 나오는 심리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쾌락을 얻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쾌락은 돈에 의해 매개되는데, 돈이 없으면 쾌락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날개>의 주인공처럼 공적 공간에의 참여를 거부당한 인간이 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매춘 행위나 기생충처럼 사는 것, 자신의 바른 모습을 희생하는 수단밖에 없다. 그러나 이 타락한 생존 방식에서는 쾌락도 의미를 잃는다. 그러면서도 <날개>의 주인공은 그 타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사람과 사람을 묶어 놓는 것은 돈도 아니고 윤리나 도덕도 아니며, 오직 그것은 자유와 사랑이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현실 앞에 부딪혀 추락하고 말았다. 이상은 새 출발을 위해 동경으로 떠났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죄로 수감, 석방, 그리고 죽었다. 이러한 식민지인의 운명은 방향은 좀 다르나 윤동주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윤동주는 내면의 윤리적 완성을 추구했으나, 식민지에서는 내면이 외면화될 통로 자체가 차단되어 있었다. 시집조차 출간하지 못하고 죽은 그의 인생은 내면의 외면화가 불과한 식민지적 생존을 상징한다. 그 또한 서양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옥사하였다.
한편 이기영과 같이 식민지의 농민과 민중의 현실에 눈을 돌린 작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우창은 이기영의 <고향>이 봉건제도와 식민지 통치하의 농촌 문제를 극적으로 다루지 못했고, 사회 전반이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 극적 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전통적 교양을 지닌 시인들, 특히 한용운과 이육사는 각기 불교와 유교의 사유를 바탕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응했다.
현대시의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용운은 불교의 무의 변증법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진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는 식민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부정하며 진상을 파악하려 했다.
식민지 시대는 '님'이 침묵하고 부재하는 때이며, '님'은 부정과 비진리의 세계에 굽히지 않으려는 투쟁 속에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부정은 개인에게 자유를 인정했지만, 그 자유가 억압과 속박을 거부하는 것, 불의에 저항하고 잡히지 않는 진리를 갈구하려는 것이라 이해했다.
이러한 사회와 자아에 대한 이해는 한용운을 가장 철저한 개인 인격의 옹호자이면서 가장 강인한 독립운동자이게 했다.
이육사는 유교, 선비 전통에 기초해 침략자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적 요구를 가졌던, 그러면서도 그의 저항이 효과적인 것이 될 만큼 자신의 힘이나 민족의 힘을 집약할 수 없다는 불행을 안고 갔던 시인이다. 그러면서도 전통적 선비의 윤리에 내재하는 내면 억압의 추상성 때문에 이육사 시의 상상력엔 경직된 무엇인가가 느껴진다는 것이 김우창의 의견이다.
결국 식민지 내에는 내면화된 욕구를 위한 자리가 없으며, 내면화된 인간의 식민지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 허상과 타락으로 끝났다는 것, 그것이 국문학사의 곡절 많은 진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이다.
이 글은 김우창 전집 제 1권 <궁핍한 시대의 시인>중 <일제하의 작가의 상황>을 읽고 남긴 글이다. 이 글을 감상문으로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김우창의 글이 복잡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처음 쓴 글은 그의 글을 정리한 수준이었다. 이 글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이런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시간을 더 쓴다면 감상문까지도 나아갈 수 있겠으나 여기서 더 붙잡았다간 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냥 올리기로 했다.
이상의 작품과 그의 필명에 대한 해석은 읽으면서 감탄했지만 이광수나 염상섭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내가 그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바로 다가오진 않았다.
존 밀턴의 <실낙원>도 나름의 정치적인 배경이 있고, 그 외 다른 작품들도 거대한 맥락을 한번 봐야 깊이 있는 분석이 가능할 듯 하니, 감추어진 전체성이나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 등의 개념은 다른 문학 작품을 읽을 때에도 도움이 될 듯 하다.
아직 1권의 첫 번째 글밖에 읽지 못했다. 가야 할 길이 멀다.
개추!!
이분은 왜 고은을 편들어서 같이 나락을 가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