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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재밌어서 순식간에 다 읽었네

sf도 아니고 중세 판타지나 총사들의 모험소설도 아닌 위어드 픽션이네

근데 재밌는데 작품적으론 애매함

일단 프롤로그랑 1장 내용과 등장인물이 전혀 이어지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는데 1장 후반부에 자초지종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안톤(프롤로그)=돈 루마타(본문)고 "공산주의가 승리를 거두어 이성적이고 자비로운 사회를 건설 중인 미래 지구에서 온 정보원"이다

이 외계 행성이 "진보"하게 돕는다는 명목으로 첩보활동을 나와있는데, 정작 주인공이 소속된 시험역사연구소의 행동방침은 불개입이 원칙이라 하는 일이라곤 귀족 행세하면서 카메라로 지구에 영상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권력자인 돈 레바가 지식인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중세다운 잔혹함이 판을 치는 현실에 주인공은 개입해야한다는 유혹을 느끼며 고뇌하는데...

흥미로운 장면이 3개 있었는데

첫번째는 7장에서 돈 레바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붙잡혀온 루마타가 돈 레바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놀랍게도 돈 레바는 주인공이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눈치채고 있는데

주인공의 신분이 이미 죽은 인물이라는 것, 주인공이 지나치게 많은 결투를 벌이지만 사망자가 한명도 없다는 것, 주인공한테 돈이 나올 구석이 없는데 금화를 펑펑 써대고 그 금화의 순도가 인간이 만들었다기엔 너무 높다는 것 등을 통해 유추한 것이다

이 장면이 특히 재밌는건 돈 레바가 주인공을 붙잡았지만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겁에 질려있기 때문이다

악마를 대하는 듯한 돈 레바의 반응이 신선했는데 생각해보니 돈 레바 입장에서 보면 주인공이 랩틸리언 같은 거라 쫄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ㅋㅋ

또 캐릭터로서 주인공보단 돈 레바가 더 마음에 들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오셀롯보다는 이아고가 더 매력적인 법이다



두 번째는 8장에서 루타마와 지식인 부다흐가 "신에게 진언할 수 있다면 뭘 요청하겠나"란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부다흐는 여러 답변을 내놓지만(충분한 빵을 주어 분열을 없애주소서 등) 루타마는 그것들을 모두 반박한다(강자가 약자한테서 신이 준 것을 앗아갈것이다 등)

보다시피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참조하는 이 대화에서 소설 설정의 빈약함이 드러나는데 주인공은 설정상 공산주의가 승리한 지구에서 왔지만 정작 어떻게 승리했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런 탓에 "신적인 힘을 가지고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할 것인가"란 작품을 지탱하는 질문의 전제가 잘못된거같다고 느끼는데

애초에 역사의 진보를 관찰한다는 명분으로 외계 지성체의 문명에 숨어들어 야만적 생활상을 관찰하는게 굉장히 음습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이다(이상적인 공산주의 낙원을 달성했다는 인류가 이런 짓을 할수 있단 말인가? 아주 요상하다)

이건 결국 소설을 기획하면서 발생한, 노변의 피크닉에서처럼 핵심 테제는 인류의 구1원인데 그게 먼저 있고 그걸 다루기 위해 이 세계관 및 설정을 덧붙이느라 생긴 오류일것이다

(어차피 작가도 이런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데타로 수도자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카프카적 관료주의 행정이 돌아가는걸 보면 작가가 우선시한건 이 장치가 현실적인가보다 그 장치의 효과다. 그래도 무대 뒤쪽의 허술함이 엿보이니 짜치는 건 어쩔수없다)



세 번째는 9장에서 주인공이 아라타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아라타는 현지인 자유주의 혁명가인데 예전에 주인공이 돈 레바에게 붙잡혀있던 그를 구출해준적이 있다

문제는 그때 주인공이 헬기를 사용해 아라타를 구출했다는 것이고, 주인공의 신적인 힘을 아는 아라타는 주인공에게 혁명을 위해 신들의 번개를 빌려달라고 청한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이전처럼 무기를 달라는 제안은 거부하고 금화만 지원한다

여기서 아라타는 주인공에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당신은 우리에게 해만 끼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아주 공감이 갔다


두번째 장면 부분에서 이야기하던 것에 이어서 말하자면

노변이 신적인 존재에게 보편적 구1원이란 기적을 부르짖는다면

신이 되기는 어렵다에서 논하는 건 그 구1원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현실적 차원의 질문이다

8장에 이어 9장에서도 다루는 건 신적인 힘이 역사에 개입함으로써 구1원을 성취할 수 있냐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몸소 깨우쳤듯이 결국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에(이러한 작가의 입장 역시 아라타와의 대담에서 주인공의 생각을 통해 드러난다)

결국 소설도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난다.

"본부와 상의해야 합니다. 상황을 살펴야 해요. 일주일 후에 만나서 결정하도록 합시다."

(어쨌든 신의 본질은 힘이 아니고 오히려 힘은 악령의 본질이다.)



또 프롤로그에서 안톤이 일방통행 표지판을 넘어 결국 소설 마지막에 루마타가 파멸하는(키라의 죽음과 루마타의 살인) 구도는 전형적으로 그리스 신화의 휘브리스를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한 명에게 비극적 영웅이랑 구1원자-신 입장이 동시에 있는데 이 결합이 깔끔하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라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웠다

인류의 구1원=이상적 공산주의 실현이란 전제도 깔고들어가긴한데... 여튼 재미는 있었다

4/5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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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구1원 좀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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