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시론>을 잘 따라서 읽은 사람이라면 오늘 할 부분에서 막히는 건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결론에서 1장~3장을 정리해 주기보다, 1~3장을 서술하는 동안 어떤 문제의식으로 써 내려갔는지 설명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278p 역주 8번을 읽어두고.


279p

-여기에도 또한 타협이 개입한다. 외부 세계를 이루며 서로로부터 구별될지라도 오직 우리에 대해서만 계기하는 그런 동시성들에게, 우리는 그 자체로서 계기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거기서부터 우리가 지속하듯이 사물도 지속하게 하고 시간을 공간에 넣는다는 생각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그와 같이 계기를 외부 사물에 도입한다면, 역으로 사물 자체는 우리의 내적 지속의 계기하는 순간들을 서로에 대해 밖에 있도록 한다. 하나가 일어날 때 다른 하나는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물리적 현상들의 동시성은, 계기가 상호 침투를 내포하는 내적인 삶을 또한 구별되고 서로의 밖에 있는 파편들로 잘라낸다. 마치 시계의 추가 태엽의 동적이고도 나누어지지 않는 긴장을 구별되는 조각들로 조각내고 길이로 전개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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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일어날 때 다른 하나는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물리적 현상들의 동시성은

위에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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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잘라놓는 걸 말한다.


-문자 그대로 삼투압 현상에 의해, 동시성인 한에 있어서는 공간이며 계기인 한에 있어서는 지속인, 측정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혼합된 관념, 즉 동시성 속의 계기라는 근본에서 모순된 관념을 형성한다.-


문자 그대로 삼투압 현상의 p는 이쪽이면 이쪽으로 앞서 본 대로 잘라낼 것이고, 저쪽이면 저쪽으로 잘라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 혼합되어 있다는 건 모순된 관념이 아니던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어느 한 쪽만으로 넘어가서 잘라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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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나있는 상태로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 모순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이어질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의 뼈대가 된다. 그걸 시론에서 딱 이만큼만 설명하고 있는 것. <시론>을 읽었기 때문에 여기서 바로 설명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시론>을 하고 있는 것이니 진도도 딱 그만큼으로 멈추는 게 올바른 독해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나머지 저서를 다 읽고 돌아오면 새롭게 읽히는 부분이구나 하고 넘어가자.


279p ~ 282p는 여기서 B를 A로 혼동하는 것에 대해 재차 설명하고 있다.



쭉 넘어가서

281P

-과학은 그 주요한 목적이 예견하고 측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 현상은 지속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예견되며, 측정되는 것은 공간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질과 양, 진정한 지속과 순수 연장성 사이의 단절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의식의 상태들에 관한 것일 때, 그것들이 외부 사물의 상호 외재성에 참여하게 되는 그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이롭다. 왜냐하면 그런 구별 그리고 동시에 그런 고체화는 그것들의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이름을, 상호 침투에도 불구하고 구별되는 이름을 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구별과 고체화는 그것들을 객관화하고, 말하자면 사회적 삶의 흐름에 들어가게 해준다.-



베르그송은 첫 저서인 <시론>부터 과학이 왜 중요한지 말해주고 있다. 이를 보고 카미유 리키에는 이렇게 말한다. '베르그송은 공간에 대항하여 지속을 획득하지 않는다. 그는 공간과 결탁하여 지속을 획득한다.' 참으로 명쾌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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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어디 공간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가. 둘이 만나있는 걸 항상 기억하자.


282p가 사실상 <시론>의 결론이다. 한 문장씩 살펴보자.


-따라서 결국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가 있게 될 것이다. 그중 하나는 다른 것의 외적 투사, 즉 그것의 공간적인 그리고 말하자면 사회적인 표상과 같을 것이다.-


B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깊은 반성에 의해 다른 자아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반성은 아직 <시론>에서는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직관을 말한다.

다른 자아는 당연히 A를 말한다.

A와 B 둘은 닿아있다. 둘을 찢어놓는 것은 공간적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닿아있기 때문에 B에서 깊은 반성을 통해 A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으면 불가능.


-그런 반성은 우리의 내적인 상태들을 끊임없이 형성 도중에 있는 살아있는 존재자로서, 즉 서로를 침투하고 측정에 저항하며 그 지속 속에서의 계기가 동질적 공간에서의 병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상태로서 파악하게 된다.-



P를 넘어서 A로 갔음을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측정과 측량에 저항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처럼 우리 자신을 다시 잡는 순간은 드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운 때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에 대해 외적으로 살고 있으며, 우리 자아에 대해 그것의 탈색된 유령만을, 순수 지속이 동질적 공간에 투사하는 그림자만을 볼 뿐이다.-


직관은 너무나 어려운 길이다. 습관처럼 공간적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운 때는 드물다고 하는 것이다. 이전 회차 마지막에 정리했던 몇 가지 거짓 자유에 대한 사고들을 떠올려보자. 거기서 벗어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 문장 '순수 지속이 동질적 공간에 투사하는 그림자만을 볼 뿐이다'는 플라톤의 동굴이 연상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시간보다는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서라기보다는 외부 세계를 향해 산다. 우리는 사유하기보다는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행동하기보다는 작용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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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깨닫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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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에만 사로잡히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B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은 B가 아니던가? 전혀 거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B만이 있는 세상이 아니다.

'사유하기보다는 말한다' 이건 독회 2주 차에서 했었다. 기억이 안 난다면 다시 돌아가서 살펴보자.


자 이제 대망의 결론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소유를 되찾는 것이며 순수한 지속에 다시 자리 잡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여기서 A에 자리 잡는다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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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말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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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둘의 만남을 알고, B에서 A로 가는 직관을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로 향하는 길이다.



이후 283P부터 짧게 칸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칸트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지금까지 <시론>을 읽었으면 막힘없이 이해되는 문장만 있으니 따로 설명은 필요 없겠다.


나도 원래 칸트를 전공하겠다고 나댔지만 이걸 읽고 대가리가 깨진 게 봉합되었다. 아니 <시론> 자체가 그렇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걸 다시 펼쳐보기 버겁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대부분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10장처럼 될 것이다. 손발 부들부들 떨면서 그러면 칸트가 틀린 것이냐!. 진정하세요. 틀린 건 아니고~~...이렇게 된다.


소은 박홍규 전집에서 자기들끼리 체계를 만들어놓고 그 틀에서 사색해가지고선 금방금방 논문 쓰고 교수하는 거~ 라고 박한 평가를 하신 게 생각난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정작 칸트 본인도 그런 강단 철학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철학을 하는데 칸트 철학을 한다. 무슨 철학을 한다. 하면서 울타리를 세워놓은 체계로 마치 철학에 여러분과가 있고 제각기 다른 걸 하는 것처럼 구는 걸 경계한다. 유명한 세 가지 질문을 떠올려 보자.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난 칸트철학의 훌륭한 가치는 이쪽에 있는 것이지 체계적으로 꾸며진 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데카르트 송과선 때문에 그가 저술한 모든 책을 불쏘시개 취급하는 건 당연히 멍청한 짓이다. 베르그송도 칸트철학의 위대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칸트를 오마주해 <정신적 에너지>의 '의식과 생' 강연문에서 세 가지 삶의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삶의 물음들이며, 우리가 체계를 거치지 않고 철학 했다면 즉각 이 물음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아아 난 그럼에도 칸트의 너무나 아름다운 책인 <판단력 비판>에 손을 못 놓고 있다. 그 이유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하면서 풀어볼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베르그송 1차 문헌 한 권을 끝냈다. 결론이니 <시론>을 한 번 더 정리하고 가야 되지 않냐고 생각했다면, 굳이 정리할 필요가 있나. 있는 그대로 1차 문헌을 다시 읽어보면 되는 거지 그러니 정리보다는 <시론>의 수미상관을 위해서


제목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란 제목.

<베르그손 고고학>을 번역한 역자를 포함해 몇몇은 <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라고 말한다. 소여라는 말은 우선 집어치우고 말머리인 의식에. 의식의. 이 부분을 살펴본다. 카미유 리키에 <베르그손 고고학>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베르그손 고고학> 366p

-지속은 의식과 거리를 두기에 더 잘 보이는 의식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지속은 마치 의식을 이루는 세포조직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의식의 소여다.-

말이 어려운 데 결국 의식과 얼마나 더 가깝냐의 뉘앙스다. 의식에~는 뭔가 의식이 있고 그다음에 생각할 무언가로 들리지만, 의식의~는 마치 시작부터 이미 의식과 일심동체처럼 들린다.

의식의~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나? 그러면 이어서. 소여라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의식의~로 번역했을 때, <의식의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 문장이 어색해지기 때문에 ('주어진'이라는 말이 의식'에'라는 말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림.) 그런 것도 있거니와. 마지막에 후술할 이유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집어넣으면

뭐라고 번역해도 아무런 상관없다. 정작 중요한 건 의식의~나 의식에~나가 아니다. 이런 뉘앙스는 책의 본문을 본 사람들이라면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까. <시론>을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제목을 읽을 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깨닫고 넘어가야 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의식에[의식의] 직접 주어진 것들에[소여에] 관한 시론>


여기서 직접 주어진 것[소여]은 '만들어진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시론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을 보고 얻을 수 있는 최종 결론이다.


소여라고 번역하는 이유도 '주어진 것'이라는 말로는 이런 '이루어지고 있는 중'의 의미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소여가 순수한 그대로의 자료를 뜻하는 걸 중점적으로 파악하신 류종렬 선생님은 또 다른 말로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직접이란 의미는 매개·재현·개념·상징·측정·비교가 개입되지 않은. 이라는 뜻이지, 단순히 “빠르다”거나 “즉각적으로”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무매개적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더군다나 무매개적은 직관으로 파악해야 됨을 암시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쪽이 더 좋은 번역일 수 있겠다. 소은 선생님의 말을 잠깐 빌려온다.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사실은 단순하며 단순한 사실은 직접적이다. 여기서 사실의 단순성은 사실의 객관성을 은폐하거나 변질시키는 모든 인위적인 것의 배제를 지칭한다. 이러한 인위적인 것에는 전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각 시대의 편견과 오해, 민족과 전통과 산회의 인습으로 인하여 형성된 통념, 개인의 특수한 성격과 경험의 소산인 억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

그래서 어떤 번역이 옳은가? 칸트처럼 논쟁이 필요한 사안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로 베르그송이 1910년 직접 검수한 영역본의 제목은  <Time and Free Will>이다. 부제로 An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

이제 다르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 번역이 마음에 드는가?

<시론>을 다 읽은 사람은 상관없다고 할 것 같다. 아무렴 어때.


다음은 목차를 봐보자.


머리말

제1장 -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제2장 -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 지속의 관념

제3장 -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 : 자유

결론


제1장에서 둘의 착각, 다름을 먼저 설명하고

제2장에서 둘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지속이 나온다.

제3장에서 이런 지속의 상하에서 자유란 무엇인지 설명한다.

다 읽고 나서 보면 책이 굉장히 짧게 느껴지고, 얼마나 정리하기 쉽게 잘 쓰인 책인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시론> 독회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2월 22일까지 베르그송 독회는 휴식입니다. 쉬는 동안 독회 탭에 (휴주) 말머리로 드문드문 다른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이건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될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올리겠습니다.

8주 동안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