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여성주의 작가라고 불리는 저자의 책이다. 주인공과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등 4대에 걸친 인생 유전을 이야기한다. 물론 시대 배경이 꽤 멀지만 내용이 깊진 않다.
이 책에서 남자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데 바로 여성의 착취자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에 위치한 것이다. 이들은 남성들의 억압에 맞서다기보단 그저 체념하며 삶을 살아간다. 물론 화자인 주인공은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하는데 성공하긴 한다(그것이 승리를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혼한 여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가 어릴 적 이후 연락이 끊긴 할머니와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간간이 연락하며 친밀감을 쌓는다. 여기서 할머니는 절대 귀찮게 안 할 거라면서 손녀에게 매우 조심히 구는데 그 부분이 꽤 인상적이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하는 말은, 베드로보다는 바울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 스피노자
손녀가 원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줄 아는 할머니에 대한 묘사는 여주인공(혹은 작가)은 편의적인 개인주의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인공은 필요한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의무감 없는 인간관계를 즐기면서 자신의 '모계' 조상들이 남자(부계 조상)들에게 지속적으로 고통받은 과정에 효과적으로 공명한다.
이러한 가학-피학 시뮬레이션이 주인공의 치유의 과정이었는지 몰라도 소설은 꽤 희망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여러모로 여성 인권의 최대 수혜자로 21세기를 사는 글로벌 노스의 대한민국 여성들이 갖는 피해 망상의 기원에 대해 탐구할 수 있어 꽤 흥미로웠다.
<인상 깊은 구절>
-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도리어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 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지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 통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 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 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증조부가 데려간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심 깊은 바오로가 세례도 받지 않은 여자에게 미쳐서 부모와 고향을 등졌다는 이야기가 개성의 성당에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증조모는 순진한 남자애를 꼬 드긴 죄인이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 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다.
- 너랑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손녀딸에 게 아픈 이야기나 하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접안렌즈에 눈을 대 고 달과 목성을 보던 할머니의 표정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걱정 끼치는 사람, 돌봐야 하는 사람, 짐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저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나를 웃게 해주고 말이 통하는 대화 상대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내가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그러면 금요일에 퇴 근하고 오라고 선뜻 답했다.
- 증조모가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두려웠다. 헛간에서, 마당에서, 뒤뜰에서 잘 때, 때로는 운이 좋아 사랑채나 행랑채에서 잘 때에도 두 려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난길을 가는 여자에게는 인민군, 국군, 미군, 중공군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밤마다 민가를 다니면서 여 자를 강간하는 군인들이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으니까.
- 증조부의 말은 할머니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았다. 나를 원한다면 그게 어떤 남자든 나는 수용해야 한다. 할머니에게 증조부의 말은 그저 농담이 아니었다. 술기운을 빌려 할머니와 결혼하고 싶다 고 말한 남선에게 증조부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면서 딸을 가져가라고 말했다.
- 남선은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시장에서도, 동네에서도 마음씨 좋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새댁은 좋겠어. 저런 신랑 얻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래요, 저 희 신랑이 사람 좋지요. 대답하고서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앞장서 술값을 내는 사람.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그 모든 지출을 아내의 돈으로 하는 사람. 나중에는 아예 액수를 정해서 그만큼을 미리 마련해달라고 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무엇 하나 주는 법이 없었다. 감정적인 부분에서도 단 한 순간도 할머니를 채워주지 않았다. 그 목마른 느낌은 할머니가 증조 부와의 관계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증조모의 말이 맞았다. 그는 여러모로 증조부를 닮은 사람이었다.
- 그즈음 남선은 자주 친구들을 끌고 집에 들어와서 다 같이 담배를 피우며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정당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받이 얼마나 부어 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 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
- 대놓고 할머니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가 감쪽같이 속였을 리는 없다면서, 할머니도 분명 그에게 조강지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으리라는 것이었다. '여자도 잘한 건 없다.' 그것이 사람들의 중론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했으니까. 남편이 아내를 때려도 여자도 잘한 것 없다고 했고, 남편 이 바람을 피워도 여자도 잘한 것 없다고 했으니까. 남자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여자가 부추겼으리라는 생각이 그런 말의 핵심이었다.
-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 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