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a
-소크라테스 님,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훌륭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또는 가르쳐질 수는 없고 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배우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선천적으로 생기게 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생깁니까?
이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71a~b
-나도 동료 시민들과 마찬가지이거니와, 훌륭함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고 스스로도 나무라고 있다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ti esti)를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그게 어떤 것인지를 실상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알고 있는 것은 탐구할 필요가 없고 모르고 있는 것은 탐구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탐구할 수 없다. 그래서 탐구 자체가 불가능하다. 메논이 제기한 이러한 역설은 소크라테스 본인도 무엇이 훌륭한 건지 모르면서 어떻게 왈가왈부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메논이 생각하는 학습을 부정한다. 메논은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 알지 못함을 먼저 깨닫고 끊임없이 탐구해 나가는 새로운 교육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교육이 가능한 이유는 상기 때문이다.
81c~d
-따라서 혼은 불사하며 여러 번 태어났고, 또한 이승의 것들과 저승의 것들을 모두 다 보았기 때문에, 무엇이나 배우지 못한 것이 없다네. 그래서 훌륭함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혼이 역시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들이기에,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닐세. 온 자연이 동족 관계에 있고 또한 혼은 모든 것을 배웠으므로, 하나만이라도 상기하게 된 (바로 이걸 사람들이 배움이라 일컫는데) 이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알아내는 걸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만약에 누군가가 용감하고 탐구함에 있어서 지치지만 않는다면 말일세. 탐구한다는 과 배운다는 것은 결국 전적으로 상기함이기 때문일세.-
82a
-가르침이란 없고 상기함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날더러, 지금도 자네를 가르쳐 줄 수 있겠는지 묻는데, 이야말로 나 스스로 곧바로 내 자신과 모순되는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짓이지.-
이후 상기의 기하학적 예시가 나온다. 아이에게 정사각형을 가지고 열심히 캐물어가며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예시가 진정 상기에 관한 올바른 예시일까? <메논>에서 언급되는 상기설은 당연히 여러 가지 허점이 있다. 마치 기억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영혼이 망각하는 과정이 어째서 현재 상기한 다음에 또다시 반복될 수 있는가? 물어보면 답을 하기가 상당히 애매해진다. 신화를 끌고 온 설명은 우리 인식 밖,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풀어낸 걸 말한다. 우리 영혼이 망각하게 된 걸 분명 신화로 풀어내었다. 하지만 현재 숨 쉬고 있는 와중에 한 번 상기했던 것을 또 망각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이때도 신화로 풀어내기엔 굉장히 어색하다. 우리는 이미 숨 쉬고 있으니까. 그래서 상기설은 쓸모없는 말이었던가?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 플라톤은 이후 <파이돈> <파이드로스>에 상기에 대한 보충 설명을 집어넣는다. 우선 메논에서는 좀 더 소극적으로 대답한다.
97e~98a
-참된 판단들도 곁에 머물러 있는 그 기간 동안은 훌륭한 것이며 온갖 좋은 일을 해내니까. 하지만 이것들은 좀처럼 오래도록 머무는 법이 없고, 사람의 혼에서 달아나 버리지. 그래서 누군가가 이것들을 원인의 추론에 의해서 매어 두게 되기까진, 이것들은 그다지 많은 가치가 없으이. 한데 여보게 메논! 이게 상기함일세.
상기에 관한 교육도 허점이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차근차근 이끌어주기 때문에 소년이 대답한 것이지. 만약 조금 뒤떨어지는 교육자가 시도했다면 상기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더군다나 똑같은 설명으로 누구는 이해해서 대답하고, 누구는 뒤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이때 훌륭한 교육을 해내지 못한 건 누구의 책임이 되는가. 교육자? 아니면 떠올리지 못한 아이? 둘 다? 그것도 아니면 한심하고 게으른 영혼의 탓일까.
뒤이어 <메논>의 논증은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쪽으로 향한다.
정암 해제의 정리를 빌려와
-탁월함은 뛰어난 것이다.
-뛰어난 것은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유익한 것이다.
-그런데 유익한 것은 앎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앎이다.
즉 탁월함은 앎이니 가르쳐질 수 있다. 다만 이때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의미를 소피스트식 '지식의 전달과 수동적 수용'으로 이해하면 열심히 논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고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즉 탁월함이 doxa가 아닌 참된 인식일 때에만 누군가 깨닫게 유도하고, 배울 수 있다(능동적)는 말이다.
좀 더 풀어보면 탁월함, 훌륭함은 주입식으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걸 또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그런 배움을 유도해낼 수 있는 교사들이 있냐면 (소크라테스 본인도 무지하다고 하니 논외)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교사가 없으니까 결국 배울 수도 없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논의는 한 바퀴 빙 돌아와서 원점으로 복귀하고 만다.
<라케스> <에우티프론> <메논>까지 ~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탐구했다. 이런 물음은 '확실하게 정의한다.'란 목적을 갖지 않는다. 물음은 목적보다 그렇게 물음으로 무언가 시작됨에 집중한다. 철학의 시작은 주위에 있는 걸 묻는 것이었다. 아 내가 사는 세상의 원리는 무엇이지?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왜 나와 다르지? 왜 사람은 늙어가지? 이런 물음에 대한 중요성은 훗날 <국가>와 <법률>에 가서도 다시금 꽃을 피운다. 플라톤의 교육이란 묻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물음으로써 우리가 알게 된 앎은 애초에 있었던 앎이지 없었던 것에서 튀어나온 앎이 아니다. 앎은 앎이 아닌 것으로부터 앎으로 나올 수 없다. 플라톤이 상기설을 제시한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존재와 무다.
플라톤은 애초에 무는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이건 다른 대화편에서 더 자세하게 논의) 앎(있는 것)이 무(없는 것)에서 뿅 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앎은 우리의 혼에 이미 있었고, 그 혼에게 있어 앎은 축적된다. 그러면 이런 영혼불멸에서 최초의 앎으로 소급하면 결국 무엇에서 생겨난 거냐? 그건 또 다른 대화편으로~
다음 주는 카르미데스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란 무엇인가? 에서 시작하는 앎의 여정은 변증법적 논술로 계속 반대의견을 충돌하여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인데, 반대'의견'으로 충돌한다는 것은 결국 '앎(episteme)'이 아닌 '의견(doxa)'으로 부딪혀서 앎에 다가간다는 것 같음. 진정한 앎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니, 그걸 시험대에 올려 분석하는 도구들도 사실 앎이 아닌 의견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는 함.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은 진정 앎을 기반하여 아는게 아니라, 각자가 가진 의견을 토대로 앎을 향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단지 '의견'을 '무'라고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음. - dc App
왜냐면 의견 또한 경험에서 나온 귀납적 결론일 것인데, 그 의견 내에 있는 가짜를 변증술로 제거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앎을 도출하는 것이 어찌보면 우리가 앎으로 향하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음. 선분의 비유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감각의 것을 초월하여 지성의 것을 알아가는, 일종의 인식의 상승 단계인데, 지성의 것에는 엄연히 수학적인 것(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음에도 이해되었다 가정하는 것)이 있고, 그걸 토대로 지성에 의한 앎의 단계까지 진출하는 것 같음. 결국 무에서 유로 나아가는 과정처럼 될 것 같은데, 없음이 있어야 있음이 존재하듯이, 의견을 마냥 가짜 앎이라고 치부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봄 - dc App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인식단계가 상승하여 알게된 이데아로 인식 감각의 가장 낮은 단계부터 사물을 본질적으로 재정립할 지성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의견이란 돌멩이 속에 어쩌면 이미 우리가 상기해낸 앎이 숨어있고 그 황금을 변증술로 골라내는 것이 ~란 무엇인가? 질문의 본질 같음. - dc App
이 대화편의 차별화된 부분은 '메논의 난제'와 함께 시작되는데,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언뜻 보기엔, 앎과 무지 사이에, 앎도 무지도 아닌 확신(doxa)을 도입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구태여 '상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확신이란 것은 그것이 참된 경우에도 앎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 듯합니다 물론 여기서 피타고라스의 윤회 사상을 끌고 오는 것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가져온 격이 아닌가 싶지만, 이것을 실증하는 방식이 더 문제인 듯합니다 소크라테스와 노예의 문답을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사실상 유도신문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질문만을 하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그 질문이란 것들은 형식적으로만 의문문일 뿐, 평서문으로 바꿔보면 그저 노예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판만 했지만, '상기' 개념은 근현대 철학에서 등장하는 선험성에 대한 논쟁에 대해 선구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고평가하고 싶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적 사상을 가져온 것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중에 거론될 JTB 조건에 대한 논의의 밑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선험성을 부정하는 로크 등의 사상을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