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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제각기 기능하는, 서로 조율되지 않는, 미세한 기계들의 다발로 생각하는 사람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 기계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기계이기도 하고, 또 다른 기계의 일부이기도 하며 반대로 다른 기계를 포함하는 기계이기도 한데, 기계 내부에서도 서로 삐걱이며 동작하는 이들이 하나의 몸이라고 삐걱대지 않을 일도 없다. 그러한 몸을 상상하는 것은 더 이상 몸의 일상적인 상태를 평온하고 정적인 상태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며, 스스로의 몸을 다른 사람의 몸을 포함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딱히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뜻일 테다. 그 몸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의식 역시 이 따로 노는 기계들 위에서 부유하는 기계에 불과한데, 심지어 더 불쾌한 것은 자신이 단지 기계적인 장치에 불과할 뿐이라곤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신의 생각이 그 기계적인 장치의 동작에 아무렇게나 조작되다가 자신이 조작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한 채 사고의 방향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나는 쇼펜하우어와 들뢰즈를 좋아하는데, 이들이 그 어떤 통일체도 인정하지 않고서 하나라고 여겨지는 단일체 안에서 벌어지는 서로 다른 힘의 미시적 작용을-다소 극단적으로-강조하기 때문이다. 비록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구조를, 들뢰즈는 사회의 구조를 분열적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분석은 모두 사람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분열적인 구조로 구성되는지에 대한 분석에 기초해 있다. 바타유는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아마 바로 이 부분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분열적 구조의 기초는 머나먼 조상의 출생과 후손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신비주의적인 흐름 속에 있는 듯하다. 그러니 클로소프스키를 동일한 이유로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편식일수도 있겠지만, 짧게만 생각해도 바로 떠오르는 선호 편향을 언급하지 않는 건 그리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클로소프스키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감상을 적을 만하다. 클로소프스키에게는 글 속에 깃든 불안감을 끄집어내는 감각이 있다. 그 불안은 자신의 몸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지만, 이 몸을 이해할수록 점점 불안의 범위가 커져간다. 클로소프스키에게는 니체의 글을 내 기억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니체에게는 부당한 취급일 수 있지만,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글을 결코 이성의 글쓰기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충동의 글쓰기, 니체의 몸에서 부글대며 끓는 개별적인 기제 중 하나가 급작스럽게 분출할 때 그것을 '마치 자신이 갑작스럽게 떠올린 것처럼' 합리적인 껍데기를 씌워서 내놓는, 충동의 글쓰기다. 그 글의 의미를 니체의 이성에게 묻는 것은 무의미한데, 그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1) 그러나 그 의미를 니체의 몸에게 묻는다면 당신은 막다른 길에 도달한 셈이다 - 거기에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강도로 동작하는 기계 다발만 있을 뿐이니까.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기계장치로서의 의식을 상상한 것보다 더 끔찍한 심상인데, 의식 있는 거대한 기계장치의 안에 들어간 사람이 그 안에서 무엇이 '마음'을 담당하는지 찾을 수 없었던 것과 별개로 그는 최소한 각각의 기계장치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의 글쓰기 아래의 몸에서 각각의 글에 어떤 기계가 직접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기계장치는 모두가 함께 움직이고 있으며, 이따금 개중 몇몇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것만을 알 수 있는데다, 그 몇몇은 심지어 어떨 때는 전혀 다른 충동을 일으킨다.
니체의 일기나 서신을 참고하며, 클로소프스키는 이러한 분석이 니체 본인의 자각과 실제로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보다 분명하게 실질적인 존재로 다가오는데, 그 의지는 어떤 형태로도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어떤 형태로도 고정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조작한다. (그러니 모든 사회적 구성물 역시 오로지 의지의 강도에 따라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무기물의 의지에게는 어떤 유기적인 의미도 없는 듯하며, 주변을 둘러볼수록 그 무기물의 의지가 더욱 더 편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무기적인 기계 위에서 매우 우연적으로 태어난 유기적인 의식의 성찰이며, 심지어 자신이 무기적 기제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라는 믿음조차 연이은 발작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클로소프스키의 손에서 니체의 글은 에드거 엘런 포의 단편 <함정과 진자>가 된다. 그는 누워서 눈을 부릅 뜬 채, 자신의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리며 스스로를 베어버릴 진자를 응시해야만 한다. 그 속에서 그는 죄수가 그렇듯, 하나의 희망을 깨닫는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끔찍한 깨달음의 순간이, 그렇기에 축복할 만한 것이라는 깨달음 - 영원회귀를.
애석하게도 영원회귀는 결코 긍정적인 깨달음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의 부유하는 표상으로서, 자신의 무기적인 몸뚱이와 무기적인 세계 속에서 매번 결코 예상할 수 없고 필연적이지도 않은 결과를 맛보는 동안에도, 그는 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불안을 계속해서 경험할 것이고,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이것을 단순히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의 긍정적인 피학성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거창한 구석이 있으며, 심지어 클로소프스키가 지적하듯이 개념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 이 '깨달음'은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찾아왔는가? 이것이 니체가 논하듯 필연적인 깨달음이라면, 그 필연성에 대한 근거를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생각해내는 순간 그는 다시 의식에 대한 의지의 우세에 속아넘어간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만약 그가 이 깨달음을 이해했을 뿐 아직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깨달음은 언제도 올 수 없다. 심지어 이 깨달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이미 한번 지나갔을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 대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악순환은 영원히 그의 몸을 할퀴고 있을 것이며, 원환의 순리 위에서 그는 자신이 원환의 순리 위에서 행복하다고 믿을 수도 없다. 도대체 누가 '그'란 말인가? 언제고 다시 무기적인 기제 위에서 뒤바뀔 의식의 그림자?
단언컨대, 클로소프스키를 좋아한다는 것은 니체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병적인 것이다. 바타유와 함께 이 종잡을 수 없는 역동적인 혼돈을 사랑한 그는, 그러나 바타유보다 더 골치 아프게도 이 혼돈을 통한 초월을 꿈꾸지 않았으며, 그 혼돈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꿈꿨다. 자신을 계속해서 갈아대는 의미 없는 고깃덩어리 속에서 불안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빨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 이빨이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리가 이빨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클로소프스키를 좋아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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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리학이 어떻게 사람의 의식이 자신에게조차 기만적인지를 보여주는지를 함께 생각하면 참 묘한 일이다. 다양한 뇌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없거나 원하지 않았을 무언가를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 이유를 질문받았을 때 마치 자신이 의식적으로 이를 선택한 것처럼 이유를 급조해내면서도 그 급조를 눈치채지 못한다. 시각 기관에는 문제가 없지만 시야 왼쪽을 의식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왼쪽에 장애물이 있어 이를 무의식적으로 피할 때 그 이유는 결코 왼쪽에 장애물이 있어서는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 이유도 없는 것도 아니다.
얘는 영원회귀에 대해 뭐라고 해?
디알로그였나? 들뢰즈가 바타유더러 너무 프랑스적이라고, 장막 너머와 작은 비밀에 집착하는 해석강박증이라고 평한 거 생각나네
와 어려운데 천천히 읽어보니까 글을 상당히 잘쓰네;; 독갤에 쩌는 애들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