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에 출판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자전적 소설로,
흔히 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비극적 자살 이야기로만 소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비극적인 연애 소설로만 읽는다면,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그 파국적 한계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사랑의 실패를 다루고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론, 즉 9원 없는 인간의 내면이 어디까지 붕괴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베르테르는 발하임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는 ‘우울’의 감정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우울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의 평화를 해치는 일종의 ‘죄’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언뜻 보기에,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절제와 책임 있는 삶의 자세를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기준 삼아 타인을 재단하는 도덕적 엄격주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절대적 기준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정서적 안정 여부에 따라 선과 악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등장하면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자살을 주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데,
이때 그는 자살을 도덕적 선택이나 죄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불가피한 결과’, 혹은 병리학적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객관적 진리를 따르려는 태도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처지에 맞게 진리를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사고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베르테르에게 있어 ‘우울이 죄’였던 이유는,
그가 달콤함에 취해 누리고 있던 현재의 행복한 감정을 방해하는 요소였기 때문이었고,
'자살’이 정당화된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로테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은 이후).
그의 노동관과 대인관계 역시 이러한 자기중심적 가변성을 반복적으로 드러냅니다.
소설 초반, 그는 사랑보다 일과 책임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냉소적으로 비판하지만,
로테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자 돌연 공무에 몰두하며 노동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신성시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속되지 못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군 입대'나 광산 노동, 예술 활동 등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일들을 시도해 보지만,
그 어느 것도 끝까지 실행하지 못합니다.
베르테르의 내면은 점차 공허와 허무로 잠식됩니다.
“그녀를 단 한 번만이라도 안아볼 수 있다면 이 공허함은 메워질 것”이라는 고백은,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의 구멍을 메우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실패를 상징합니다.
이후 그는 인간 존재 자체를 덧없고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하며, 타인과 자신을 향한 폭력적 충동까지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로테여!
나의 이 상처 난 가슴속에 늘 미친듯 날뛰며 맴도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남편을 죽이고 싶은 생각!
아니면 로테 당신을!
그것도 아니면 나 자신을!"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제시하는 절망의 세 단계―무지적 절망, 회피적 절망, 반항적 절망―을 적용해 본다면,
베르테르는 로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무지적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패 이후 그는 자신의 절망을 감지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서는 대신 또 다른 도피처를 찾는 회피적 절망으로 빠져듭니다.
<회피적 절망이 자신의 절망을 인식하면서도 신앙의 실존적 결단을 회피한 채, 책임을 회피하는 상태라면,
반항적 절망 역시 삶의 부조리와 고통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 절망의 해답을 하나님에게서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와 자기초월에서 찾으려는 절망의 상태이다.
이는 신적 9원을 거부하고 인간 자신을 9원의 주체로 세우려는 점에서, 니체의 위버멘쉬(초인) 사상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베르테르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는 회심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자기 연민에 잠긴 독백에 가깝습니다.
“나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 달라”는 그의 간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아니라,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항변에 가깝습니다.
베르테르는 사랑에 실패해서 죽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9원 없는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절대화할 때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설령 로테와의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인간이 처한 절망과 비참함이라는 근원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인간은 어떤 성취나 관계로도 궁극적인 공허를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죽음에는 고통을 끊으려는 의도 외에도 로테를 향한 잔인한 ‘복수심’이 깔려 있습니다.
“총알을 두 발 장전해 놓았습니다. 행복하세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비극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행위는,
상대에게 영원한 죄책감을 남기려는 극도로 이기적인 자아의 모습입니다.
베르테르가 끝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자아의 감옥 안에 갇힌 채 사랑의 부재라는 부조리에만 침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이라는 광야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최종적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려는 영적 교만에 빠졌습니다.
베르테르는 결국 사랑이라는 낭만적 외피를 두른 채, 끝내 자기 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의 장례식에 성직자는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괴테가 바라본 제도화된 기독교, 형식은 남아 있으나 실질적 9원 능력을 상실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내는 장치로 읽힙니다.
괴테는 결국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의 진실성과 감정에 충실함으로 자기 삶을 9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9원이란 자아로부터 발현되는 자기성취적 의지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인가?
공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