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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베르그송 파트 그리고 절판된 책을 제외하면, 아래에 서술하고 있는 목록이 국내에 나온 베르그송 관련 서적 전부라고 할 수 있다.(2026년 1월 기준)

철학사 책에도 온전하게 베르그송을 할당해서 설명하는 작품은 국내에 그렇게 많지 않다. 이정우, 코플스턴, 제임스 피저, 램프레히트, 그리고 베르그송을 좀 전문적으로 서술한 철학사로 주재형 교수님이 번역하신 보름스의 현대 프랑스 철학사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품절이다. 거기다 개론서도 아니라서 이걸로 베르그송을 파악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아주 아주 많이 유명한 러셀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아주 많이 유행한 시르베크 철학사도 내가 보기에는 좋은 철학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을 빼놓고 서술해서 시르베크를 싫어하냐고? 아니 그렇다기보다 그저 디자인만 이쁘고 다른 철학사에 비해서 나은 점이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이건 언젠가 국내 출간된 모든 철학사를 싸그리 모아놓고 소개 할 생각이므로 지금은 넘어가자.


그러면 외국은 어떤가요? 안타깝게도 영미권에서 '개론서'로 볼 만한 책도 그리 많지 않다. 추려내면 4권인데 그중 하나는 최근에 나왔는데 좀 찐빠가 있고, 또 한 권은 생물학과 연관시켜 창조적 진화를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 나머지 두 권은 베르그송 평전/전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강력추천하지만... 정발이 없으니까 뭐. 이거 누가 번역해서 정발하면 잘 팔리고 베르그송에 많관부 할 텐데 누군가 하지 않으려나. 이 외에도 뭐 많은데 구하기가 빡세다. 아 검색해서 나오는 키스 안셀-피어슨은 <베르그송 선집 key writings>을 제외하고는 전부 들뢰즈 책이니까 논외다.


불란서 본토의 개론서는 어떤가. 장켈레비치의 아름다운 에세이, 마돌의 해설서로 위장한 카톨릭 전도지와 카미유 리키에의 고고학은 이미 정발했고, 이에 관해서는 어차피 후술할테니 넘어간다. 그리고 페기가 쓴 거, 구이에, 라푸자드, 보름스(+@ 최근 2024년에 출간된 책도 있는데 아직 못 봤다. 보름스는 상당한 다작가.)등등 또 베르그손 연대기라고 진짜 있는 거 없는 거 다 때려박은 연구집. 이건 개론서가 아닐 뿐더러 8권 분량. 그리고 기타등등 연구서가 많이 있다. (지금 논의하는 외국서적은 아마존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으로 한정.)


뜬금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웃나라까지 살펴보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불란서 철학 특유의 사조가 일본에서는 굉장히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일찌감치 고대 그리스 철학이 탄탄하게 보급된 덕분이라는 소은 선생님 스타일의 견해를 떠나, 일본 사람들에게 베르그송 철학은 우리가 느끼는 어색함과 다르게 친숙해 보인다. 이건 베르그송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모든 철학이 그렇다. 그건 뭐랄까. 일본인은 서양 사상을 가져와 자기만의 색체를 입히는 능력이 굉장히 탁월하다고 해야되나. (어쩌면 소은 박홍규 선생님도 와세다 대학을 나오셔서 그런 학풍에 영향이 있으셨던 건 아닐까. 물론 그분은 애초에 독어, 불어, 영어, 일본어, 라틴어, 헬라어를 하셨던 괴물이어서 가능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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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도 있다. 역시 라노벨 고장답다.

1960년대에 이미 베르그송 잡문집까지 포함된 전집을 번역했고, 현재는 베르그송 강의록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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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최근에는 서한집까지 전부 번역해서 1500p 분량으로 출판했는데 이건 미국도 없다. 프랑스 본토 다음으로 베르그송이 잘 차려진 건 일본이다. 재밌어 보이는 책들도 많아서 일본어만 가능했으면 사서 보고 싶을 정도.


어쨌든 이것저것 다 주워모아놓고 별짓 다해도 다른 철학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왜 그럴까? 이유는 베르그송이 1차 문헌을 더럽게 잘 썼기 때문이다. (이건 작성자의 주관적이고 편협한 소견일 뿐입니다.)



옛날에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떠오른다.'베르그송 좋은 책은 베르그송이 쓴 책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뒤이어 나온 강의록들. 얼마나 와닿고 이해되게끔 말을 하고 있는지.(특히 꼴레쥬 시절.)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여서 자기 철학하는 데 사용하지 베르그송 본인에 관한 좋은 개론서는 별로 없다. (논문은 별개)


허나 대한민국은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그 책이 있었으니...(물론 더럽게 어렵고 개론서가 아니지만)

함께 공부하셨던 분들과 이야기 나눌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모국어가 영어면 얼마나 좋을까'였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나 불어보다 한국어가 모국어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소은 박홍규 전집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영어, 불어야 배우면 그만이고, 하지만 영어나 불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한국어 배워서 소은 박홍규 전집을 읽는다? 이건 거꾸로 생각해보면 진짜 피 토할 노력이 필요할 텐데 생각만해도 소름이다. 박홍규 전집은 AI 딸깍 번역도 안 된다. 이북 없음, 없어도 사진이나 스캔으로 하면 되지.~ 그렇게 말한 프국 놈이 있어서 내가 직접 눈앞에서 해줬다. 한국어에서 불어로, 영어로 번역된 박홍규 전집은 읽어보면 이해불능이다. 모국어로 몇번을 읽어도 긴가민가 하는데 그 독회, 강독 구어체를 번역해서 읽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 찬양이 길었다. 박홍규 쌤 이야기만 시작하면 정신줄 놓고만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래서 두서없이 주절주절 본론으로 뭘 적는다는 건데?


지금부터 베르그송으로 검색해서 구할 수 있는 책들을 빠짐없이 '소개'(리뷰가 아님)하고(알라딘 2026년 1월 기준), 추천할 만한 입문서가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품절/절판은 제외) 그리고 중간중간 다른 주저리가 있을 수 있는데 그냥 썰 읽듯이 보면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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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리키에의 베르그손 고고학.

독회가 끝나면 나중에 가장 먼저 펼쳐보길 권하는 2차 문헌 연구서다. 번역도 불어 번역 믿을맨 엄태연 쨩이 너무 너무 잘했으니까 믿고 사보자.

베르그손 고고학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베르그송에 대한 오해를 반박, 아니 오해를 해석해서 반박하는 게 아닌 1차 문헌을 그대로 옮겨와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려운 내용이 없다. '당신들 사실 책을 안 읽은 거 아닙니까?' 하면서 무덤덤하게 1차 문헌을 꺼내 보여주는 모습이 연상된다. 다만 아무리 쉽게 쓰여있어도 베르그송 사상을 설명해주는 책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1차 문헌을 선행하고 봐야된다. 1부의 주된 목적이 그렇다 할지라도 정초와 용해로 베르그송 철학을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명쾌하다. 철학은 전체 속으로 용해되기 위한 노력이다. 법칙 위에 정초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체계들 각각에 대해 성공이 미리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제삼고, 체계로 실재를 하나의 유일한 원리를 중심으로 결집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2부는 베르그송 주저 4권을 통일적으로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서문에서 베르그송에게 더 충실한 들뢰즈 독해의 대안을 제공한다~라고 말한 게 여기서 드러나는데 마치 들뢰즈 <차이와 반복>의 시간의 세가지 종합을 저격한 것처럼 느껴진다. 할 말이 많은 책인데 어차피 독회에 반영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반복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정말 좋은 책이니까 사서 봐주세요. 좋은 책을 가져오는 번역자에게 힘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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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진성 선생님의 글을 제자인 류지석 선생님이 엮은 책이다. (옛날에 김남두 선생님이 한 번 엮으신 책이 절판되자 다시 편집해서 출판하신 것) 김진성 선생님에 대한 소개는 독회 시작 전에 잠깐 했던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다시 적어보겠다. (참고로 다시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전공하신 김진성 선생님과는 동명이인이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제자이자 대한민국 프랑스 유학 1세대이신 분인데 타지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텔 도어맨과 식당 접시닦이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가셨다는 이야기, 이후 박종원, 김연숙, 류지석, 백춘현, 정순현, 류종렬, 차건희, 황수영 선생님들로 이어진 영향.


그리고 이하 다른 썰은 류종렬 선생님이 다음 카페에 쓰신 글을 옮겨오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시절 감성과 더불어 대한민국 불모지에서 정암학당까지 이어지는 학문의 계보 중 가지 하나가 뻗어나가다 잠시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김진성(金振聲, 1947-1984)(서른일곱) 선배는 불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세상을 뜨기 전에 읽은 경전이 유마경(維摩經)이라 한다.

선배님은 81년에 귀국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귀국할 때 정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그는 광주봉기에 대한 비판으로 학위를 한 그 전해에는 귀국하지 못하였고, 독일에 가서 현상학을 공부하면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 고등학생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에는 너무 어렵고,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독일고등학생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6개월을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수 없어서 책 검열을 받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서명을 하고서 귀국했다고 한다. 그리고 강사를 하다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나는 83년 한해는 거의 빠지지 않고 그의 대학원 베르그송 강의를 들으러 갔다. 가끔 문제거리가 있으면, 박홍규 선생님은 어떻게 설명했느냐고 나보고 설명해보라고 했는데, 알지도 못하는 것을 재설명하곤 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면 성대에서 걸어 나와서 중간에 식사를 하고, 인사동의 여러 술집을 달리 섭렵하며 한해를 보냈다.


    그는 서울대 박홍규 선생님의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빠져 나오는 동안에 수차례나 “선생님, 지금 설명하시는 대로 베르그송 해설서를 하나 써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자네가 쓰게.”하는 대화를  몇번이나 들었다. 선배님은 선생님의 독해가 특이하여 프랑스에서도 이런 독해가 없다고 하였다. 한잔 집에서 윤구병과 김진성의 대화에서도 베르그송에 대한 새로운 독해에 대해 들었지만, 당시 나로서는 고승들의 선문답과 같은 이야기처럼 들렸다. 선배님은 내가 석사를 마쳤을 때, 프랑스로 나가라고 많이 권했다. 그리고 주제는 무해무익(désintéressement)과 공감(sympathie)을 초기 입장에서 정리하고 나중에 사회학과 인류학으로 연결해보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 당시 나로서 창조적 진화도 소화 못시켰고, 박홍규 선생님께서 창조적 진화 4장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자네 시론을 꼭 읽게, 거기에 문제의 해답이 있네”라고 했을 때도 무슨 말씀인지 몰랐다. 나로서는 선배님이 선생님의 두 원천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배님도 두 원천의 연구는 나중에 하고 공감에 연관들을 꼭해야 한다고 하면서, 성대 강의후에 인사동에서 밥도 술도 매주 얻어먹었다.



인사동에서 술집을 택할 때에도 개성집 등 북쪽 지명과 연관 있는 술집에서 마셨던 것 같다. 가는 곳마다, 모이는 애주가들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다. 선배님은 어느 술집에서는 합석하면 문학을 이야기 했고, 어느 술집에서는 철학을 이야기했고, 어느 술집에서는 노래를 부르면 선배님도 가곡을 한 곡 뽐낼 실력이 되었다.


어느 술집에서 사회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면 프랑스를 빗대어 함께 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어느 뒷골목에서 껄렁한 어깨들과 부딪쳐도 당당히 치고 나갔는데, 내가 형님 그래도 됩니까 하니까, 내가 그래도 태권도 4단이다. 껍데기 같은 애들한테 쭈빗거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단지 하나 형님은 당시 형수님과 거리가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그에 대해 그는 후배에게 내색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선배님의 장례에 강의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박홍규 선생님은 학교 행정직도 한 번도 맡으신 적이 없다. 그리고 주변의 길흉사에 참석하지도 않는 은둔지시였다. 그런데 뒤에 들은 이야기로 차를 한 대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기어이 제자의 장지까지 가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겉으로는 제자들에게 살갑지 않게 대하는 것 같지만, 제자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였다. 그 차로 같이 갔던 분의 이야기로, 이제 우리나라 프랑스 철학이 한 세대 늦을 것이라고 한탄하셨다고 한다. 박홍규 선생님은 공부에만 열중한 이유가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희랍어를 공부한 사람이 연구를 시작하여 플라톤 전집이 나오는데 150여년 걸렸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는 50년만에 이루시겠다고 하셨다.


선배님이 세상을 뜬 해, 그 해는 박홍규 선생님의 정년퇴임해 이었는데 희랍어를 심으신지 35년 정도이다. 50년 만에 플라톤 전집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 않았지만, 제자 이정호가 설립한 정암학당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프랑스 철학이 – 물론 데카르트와 사르트르 연구자들이 있다 - 우리나라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은 이정우(李正雨 1959-)가 푸꼬로 서울대에서 1995년 박사학위 논문을 내면서이다. 그리고 다른 연구자들과 더불어 프랑스 철학의 논의와 탐구가 확장된 것은 2000년도가 지나서였다...>>



김진성 선생님은 그렇고 엮은이 류지석 선생님은 김진성 선생님의 제자이자 릴 대학에서 베르그송 문헌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하셨다. 베르그송 편지 434편을 찾아 박사 학위논문으로 쓰셨는데 이에 관해서 한국에는 대동철학회로 간략한 논문을 내셨으니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현재 베르그송 서한집은 본토에서 두 권으로 총 3200통의 편지가 묶어져 있다. (일본 역본은 서두에서 이야기한대로 세 권)


이제 책 본문을 조금만 소개하면

책은 크게

1부-지속에서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까지 빠르게 훑어보는 글.

2부-<물질과 기억>을 중심으로 김진성 선생님의 생각을 적어놓은 글

3부-베르그송을 중심으로 기타 프랑스 철학을 살펴본 글


2부는 <물질과 기억>을 먼저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글이다. 물질과 기억을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글은 아니고, 연구에 가깝기 때문.

결말에 한가지 재밌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끝맺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베르그송을 다 읽고 보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도 다른 방식으로 난제라고 말씀하셨던 부분이고, 최화 선생님도 비슷한 문제를 물질과 기억 역자 서문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건 여기서 풀어내기엔 너무 길고 이른 감이 있어서 나중을 위해 아껴둔다.


3부 첫번째 글인 무관심이란 무엇인가도 베르그송을 읽고서 봐야한다. 이외 다른 글은 노베이스로 봐도 괜찮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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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은 박홍규 선생님과 관련된 책이지만 부제에 베르그송이 들어가 있어서 알라딘 '베르그송' 검색에 걸려버린 책.


우선 이 책은 논문집이다. 베르그송을 다 읽고나서도 꼭 보라고 말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플라톤과 베르그송을 읽고 소은 박홍규 전집을 봐야되기 때문에 그냥 논문을 읽으면 어려울 것이다. 이 책 말고도 다른 소은 박홍규 선생님 관련된 건 <박홍규 철학의 세계>,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동일성과 차이생성>, <철학을 다시 쓴다>, <박홍규의 철학>이 있다. 언젠가 박홍규 선생님으로 글을 쓸 날이 있을 테니 나중에 소개하는 걸로 미루겠다. 그래서 지금 내용을 리뷰하는 게 아닌 이상... 뭐 딱히 쓸 말이 없다. 그냥 넘어가긴 그렇고 소은 박홍규 선생님 자랑이나 좀 더 하자.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제자는 묘비명에 쓰여진 분들만 해도

박전규, 박종현, 김완수, 이창대, 이태수, 윤구병, 김남두, 양문흠, 손동현, 남경희, 송영진, 기종석, 박희영, 이정호, 조인래, 김내균, 박홍태, 최우원, 염수균, 박윤호, 최화, 류종렬, 이정우, 우은주, 김인곤, 강상진, 이경직 선생님이 있고, 여기에 김진성 선생님에 그 유명한 박홍규 스터디에 참여하셨던 분들만 봐도 엄청나다. 이부영 선생님도 그렇고 이태수 선생님이 시작하실 때 김우창 선생님이 한창 스터디 하고 계셨다고 하니... 이외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분들이 박홍규 선생님을 거쳐가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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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 전공하신 분이 쓴 책이다.


88p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그는 이러한 창조의 근원을 '신'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1p

-즉 그는 이 세계와 생명의 근원을 '신'이라고 말하고 있답니다. 종교인(가톨릭)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역시 예사롭지 않게 베르그송을 신 짱짱으로 몰아가고 있다.


123p를 포함해서

자꾸만 물질을 = '생명을 잠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고정된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물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명곤 선생님은 비교적 최근 2023년에 쓰신 논문 [베르그송의 생명사상에서 ‘생의 약동(élan vital)’을 완성하는 ‘사랑의 도약(élan d'amour)’에 관한 논고]에서도 위의 잘못된 이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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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세계란 고정되어 있고 무감각한 물질(질료)안에 요동치고 약동하는 생명이 가능태의 형식으로 내재하고 있는 세계이다.~'

당연히 국내 베르그송 관련 논문(100편도 안 된 다.)에서 이렇게 물질을 쓰신 분은 이명곤 선생님뿐이다.

베르그송 말고도 다른 1시간 시리즈가 있는데 푸코는 내가 잘 모르니까 넘기고 레비나스랑 칸트는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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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도 가톨릭 학술재단에 종사하면서 종교학 전공이신 분이다.

시작부터 베르그송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마리탱식 썰을 사실처럼 풀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역시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설명하는 막바지에 가톨릭으로 너무 몰아가는 설명을 하고 있다.

물론 베르그송 <두 원천>이 가톨릭과 짙은 연관이 있는 건 사실이고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게 베르그송의 모든 것이자 결론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편견이지만,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경험이 있는데 바로 종교에 몸 담고, 전공한 분이 쓴 저서의 결론은 그쪽으로 귀결시킨다는 것.


'결국 베르그송은 사랑과 창조의 존재이며 힘인 신이 생명에게 부여한 의의와 인간에게 부여한 위치에 의해서, 인간은 생명 진화의 궁극점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제대로 된 부연 설명없이 이렇게 결론 짓고 있어서 자칫 잘못 하면 입문자는 베르그송 그거 결국 신 짱짱이라고 했던 사람아냐? 라고 오해할만하다.


<지속과 동시성>을 1920년이라고 쓴 생애 부분은 오타로 보인다. 뒤에서 다시 1922년이라고 고쳐서 쓰고 있으니. 하지만 베르그송은 지속이고 아인슈타인은 동시성이라고 가볍게 풀어낸  건 너무 빈약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설명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말해놓고 동시성이 무엇인지 설명 안 하고 넘어가니 너무 무책임한 거 같기도...


전반적으로 장켈레비치가 말한 '이 아침의 환희, 이 저녁의 평화'처럼 낙관주의 느낌이 있다.

다른 것도 좀 있는데 저자가 서문에다가 '본인이 이해한 베르그송'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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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아주 아주 유명한 책이다. 베르그송 부흥을 다시 일으키는 신호탄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다른 들뢰즈 저서에 비해서 쉽게 쓰여진 건 덤.


들뢰즈를 보고 싶으면 반드시 봐야되는 책이다. 그때도 읽으면서 '이게 베르그송이구나.'가 아니라 '베르그송에게 영감을 받은 들뢰즈의 생각이구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물론 베르그손주의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베르그송과 아예 다른 것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유난히 다른 방식으로 읽은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처음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지속과 동시성>의 설명은 나중에 다시 언급해야 될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쓰여진 부분. 그런데 뉴비가 이런 걸 구별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고 자칫 잘못하면  <베르그손주의>의 내용만으로 베르그송을 공부하게된다. 그러니 베르그송 1차 문헌을 선행하는 게 필수다. 이걸로 베르그송을 알려고 펼치면 들뢰즈를 아는 것 말고는 얻을 게 없을 테니.


이 책을 토대로 연구서를 쓴 게 바로 아래 책이다.<베르그손주의>에 대한 짤막한 설명도 후술하는 책의 내용과 중복되니 아래에서 함께 서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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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본 베르그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선생님의 책. 이 책은 그런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좀 길게 풀어서 쓰셨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베르그손의 잠재적 무의식>이라는 제목보다 <들뢰즈 베르그손주의의 잠재적 무의식>으로 바꾸는 것이 올바른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이미지와 지각-이미지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다고 말한다. 물질과 기억의 본성상의 차이는 긴장과 이완의 관점에서 보면 이완된 것이 물질이고 긴장된 것이 기억으로서, 단지 긴장과 이완의 정도차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다른 글에서는 '차이의 정도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는' 말로 다양체, 내재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이건 이거대로 베르그송과 다르다.)


어쨌든 이건 들뢰즈 생각이고, 우리가 <시론>부터 봐왔던 그림을 생각해보자.(독회 3주~4주 차 참고) 가운데 p는 만나는 지점이다. <물질과 기억>은 시종일관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둘이 이어져 있다니? 이건 다른 선생님이 비판한대로 긴장과 이완을 한 줄로 이어서(접하는 부분 없이) 이쪽으로 가면 긴장이고 저쪽으로 가면 이완이라고 공간적으로 표상한데서 불러온 오해다.

여기서 더 자세한 내용은 들뢰즈 독회에서 나중에 할 것이니 지금은 그러려니


예컨대 양과 질을 생각해볼까.

들뢰즈는 양을 가장 낮은 질이라고 말한다. 쭉 이어져 있어서 정도차라고 본 것이다. 물론 들뢰즈가 이러는 이유가 있다.


짤막하게 말하자면 저런 정도의 차를 관통하는 들뢰즈식 지속이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차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강도라는 단어를 사용해 '질과 양의 이항대립에 선행하는 초월론적 사태이자 자신이 낳은 질과 양들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초월적 사태'라는 더럽게 복잡한 말을 하고있다. 그러고나서 '정도상의 차이들은 다만 가장 낮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고, 본성상의 차이는 다만 가장 높은 본성의 차이일 뿐이다.' 라면서 베르그송의 이원론을 일원화 시키는 본격적인 작업을 시도한다. 잠재적 다양체나 자기-차이화 라는 말도 다 이런 맥락.


그리고 들뢰즈가 베르그송 기억을 해석하는 방법도 살짝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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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을 잠깐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원뿔 도형의 아래 꼭짓점은 현재와 닿아있는 신체의 이미지 s로 표기된다.

(이걸 빼먹고 그렸는데 다시 그리기 귀찮으니까 그러려니하자.)


대충 그림을 기억해두고


들뢰즈의 설명을 보면 '우리는 현재(꼭짓점) 자체가 단지 과거의 가장 응축된 수준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본문을 잠깐 봐보자.


<물질과 기억> 원문 188.

-각각의 절단면은 밑면(뒤집어 졌으니까 넓은 쪽)에 가까운가, 꼭짓점에 가까운가에 따라 더 풍부하거나 덜 풍부하게 된다.-


이 부분을 주재형 교수님이 해설하신 게 있는데 잠깐 보고가자.


'원뿔 도식의 맨 밑 바닥(위 그림에서 넓은 면)은 가장 빈약한 지각 자극에 상응하여 나오는 가장 비일관적이고 잡다한, 하지만 가장 풍부한 기억 연상들과 관련되며, 반대로 꼭짓점과 가장 가까운 평면은 지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가장 빈약한 기억에 해당한다.'


밑면(거꾸로니까 위로)으로 갈수록 더 풍부해지고 꼭짓점(아래)으로 갈수록 덜 풍부해진다는 말이다. 이때 긴장과 이완은 꼭짓점과 밑면의 위치와는 관계가 없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긴장은 주어진 상황에서 도움이 되도록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불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긴장 상태에서 밑면으로 가면 필요한 기억을 꺼내오는 것이고, 이완된 상태에서 밑면으로 가면 현재 필요하지 않은 기억이 환기됨을 뜻한다.


베르그송이 <사유와 운동> 역본 195p 에서 이런 예로 설명한다.

'이 순간에 나의 현재는 내가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내가 관심의 영역을 내 문장에 한정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관심은 컴퍼스의 두 점 사이의 간격처럼 넓혀질 수도 좁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 관심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으므로, 앞의 문장들을 따라서 이 강연의 이전 문장들 모두와 본 강연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포함할 것이며, 그리하여 과거라 불리는 것을 원하는 부분만큼 포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분리하는 것이 자의적이지 않더라도 적어도 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포착할 수 있는 범위에 상대적이다.'


더 쉽게 말해서 꼭짓점에 닿는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건 긴장일 수도 있고, 이완일 수도 있다. 물론 꼭짓점이 현재와 닿는 부분에서 유독히 긴장과 연관을 맺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에서도 이완되면(얼마든지 이완될 수 있다!) 꿈과 같은 잡다한 기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예컨대 죽음의 파노라마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잠자면서 꾸는 꿈(이완)은 현재가 아니던가?


즉 들뢰즈의 현재=과거의 가장 응축된 것이라는 말은 베르그송과 다르다.


이제 위에 그려진 그림에서 어느 쪽이 베르그송이 한 말인지 비교해보라.


정답은 왼쪽 원뿔그림이 들뢰즈의 해석이고, 오른쪽이 베르그송이다.


(참고로 들뢰즈가 <베르그손주의>에서 사용한 것과 <차이와 반복>에서 사용한 수축의 개념은 다르다. <차이와 반복>에서 시간의 역설을 설명하며 말했던 '현재란 과거의 가장 수축된 수준'이라는 말에서 수축은 '반복'개념과 함께 읽혀야 되기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것과 조금 다르다. 어쨌든 이래나 저래나 베르그송 철학은 아니라는거.)


이어서 들뢰즈는 앞에서 말한 정도의 차이를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까지 관통시켜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베르그손주의> 84p

-순수 물질과 순수 기억(생명)은 이완과 응축의 차이들만을 가지며 그렇게 존재론적 단일체를 재발견한다. 따라서 회상 기억의 바닥에서 더 깊은 응축 기억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일원론의 가능성을 정초했다.-


즉 목적은 새로운 일원론을 향해서~~


이제 '순수 기억'에 관한 들뢰즈 특유의 해석도 짚고 넘어가야되는데 이건 여기서 요약해서 말하기엔 아쉬우니 <물질과 기억> 독회 시간에 보는 걸로 하자.


들뢰즈는 이외에도 직관을 베르그송과 다르게 이해하였는데


베르그송은 지속에서의 직관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 시작부터 유명한 회프딩의 서신을 언급하며 여기서 직관이 두 번째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베르그손 고유의 의미에서 방법으로서의 직관이 없었다면, 지속은 단지 일상적인 의미에서 직관적인 채로 남아 있었으리라.'라고 말한다. 즉 직관이 없었다면 지속은 단순한 심리적 경험 무언가로 남았으리라는 독자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직접 말한대로 '직관의 이론은 지속의 이론으로부터 유래되며 오직 지속의 이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들뢰즈의 과격한 뒤집기를 비판한 논문은 당연히 동서양 통틀어 많이 있는데 이쯤되면 별로 논의할 주제가 아닌 것 같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에게 '영감'을 받아 자기 철학을 쓴 것이니까. 들뢰즈의 다른 서적과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게 더 생산적이다. 그래도 이왕 설명한 거 계속 해보겠다.



들뢰즈는 경험 그자체는 복합물, 혼합물 비실재적인 것과 지속 그 자체가 혼합된 무언가이다. 정확히는 '경험 그 자체는 우리에게 복합물만을 제공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들뢰즈는 우리가 독회시간에 했던 1~3번 중에서 오직 2번을 중점적으로 보고있다. 들뢰즈는 심지어 이때 혼합물인 2번은 만남을 기점으로 형성된 p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부 이어져있으며 오직 차이로 관통되는 연속성이라고 본다. 그러니 여기서 순수함을 꺼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져서 아래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어서 들뢰즈는 직관을 나눔의 기능이고, 순수지속은 나눔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틀렸다. 직관은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사유와 운동>에서 베르그송이 뭐라고 말 하는지 봐보자. '직관이란 대상의 유일하고 따라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일치하기 위해 대상의 내부로 옮아가는 공감이다.' 그러니 꺼내고 자시고 할 게 아니다. 그리고 순수지속은 나눔의 결과물이 아니다. 들뢰즈는 처음부터 전제를 직관이 먼저!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직관으로 혼합물을 나누어서 지속을 꺼내는 것으로 베르그송과는 아예 다른 쪽으로 논의를 이어간 것이다.



니체를 좋아했던 들뢰즈가 베르그송까지 침범시켜서 엮은 것도 있다. 이를 마돌 할머니가 잘 비판해주셨는데 굳이 여기 적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를 보면 들뢰즈가 니체의 영향을 받고 본인의 어떤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변호하고 있는데 어쨌든 베르그송을 베르그송으로 보지 않은 게 확실하다는 거. 어차피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들뢰즈 독회를 하면서 볼 테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들뢰즈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다만 들뢰즈식 베르그송과 베르그송은 다르다는 걸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야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무엇을 어떻게 수용해서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칸트, 니체도 마찬가지.)


김재희 선생님의 저서는 이런 들뢰즈로 베르그송 다시 쓰기를 하고 있으니. 입문서를 찾는 사람이라면 부디 피하시길.


이 책이 어떤 시점으로 쓰여졌는지는 대충 말했으니 중복되는 내용은 스킵하고 몇가지 눈에 띄는 점만 살펴보겠다.


22~23p에서 이미 들뢰즈의 관점을 수용하여~라고 밝히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는 베르그송을 베르그송으로 보는 게 아니라 들뢰즈의 관점으로 본 베르그송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읽으라는 머리말이다.


26p 주석 7번에서 위에서 잠깐 언급한 들뢰즈의 직관 해석이 어떻게 비판받고 있는지 차건희 선생님의 논문을 빌려 말하면서 <베르그송주의>에 대한 비판을 저자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 해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며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니 내가 처음에 말한대로 이 책 제목은 <들뢰즈 베르그손주의의 잠재적 무의식>이 더 어울린다.


98p ~ 105p까지 현대 신경과학과 베르그송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들뢰즈식 해석이라도 이 부분의 방향은 동일하다.

106~110p, 259~271p, 357~366p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비교하는 설명이 나오는데 들뢰즈식 해석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유효하다.


274p에서 바디우가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를 비판하고 있는 게 나오는데 이렇게 부분만 떼어서 인용하면 완전 러셀식 비판이라서 좀 한심하게 보일 수 있다. 바디우가 들뢰즈를 비판한 걸 반박하는 내용을 보고 싶으면 키스 안셀-피어슨의 책을 추천한다.


280p 이후는 본격적으로 <차이와 반복> 설명이다. 4장의 결론을 저자는 이렇게 내고 있다.

290p

-따라서 베르그송의 원뿔 도식은 결국 들뢰즈의 영원회귀를 설명해 준다. 앞에서 이미 논증했듯이, 현재는 순수 과거의 한 수준이다. 그리고 현재는 매번 다른 수준의 순수 과거로부터 현실화한다. 다시 말해서 현재는 매번 다른 수준의, 다른 차원의 과거이다. 현재는 매번 다른 수준에서 반복되는 과거다. 그리고 반복되는 그 과거의 수준들은 수축과 팽창의 정도에서 상이한, 그 자체로 차이들의 평면이다.-


베르그송의 사상이 들뢰즈를 설명하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다. 그냥 들뢰즈 책이라고 보면 된다.


책의 결론을 보자.

450p

-베르그손의 물질은 거대한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생성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생성의 잠재성이 현실화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에게 지속은 기억이고 생명이지 물질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야말로 베르그손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물질 자체의 지속을 얘기하며 미시적인 차원으로 존재론적 층위를 다양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미 <시론>을 읽은 사람은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시론>만 읽었어도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문장을 바꿔야 한다. 현대과학도 베르그손과 발 맞추어 물질 자체의 지속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은 김재희 선생님의 다른 저서를 소개할 때 덧붙이겠다.)


전반적으로 들뢰즈 입문에는 참 좋은 도서다. 위에 언급한 들뢰즈와 베르그송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결국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아 본인의 철학을 하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로 들어가는 초입단계에 읽으면 상당히 좋은 책이다. 특히 <차이와 반복>을 읽기 전에 선행하면 분명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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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입문서라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다.

위 책 저자 김재희 선생님의 다른 책인데 부제에 쓰여진 단어부터 예사롭지 않다. -반복과 차이의 운동-


제1장은 베르그송 생애를 간략하게 간추려 놓은 글이라 누구나 읽어봐도 좋다.


전반적으로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만 주 텍스트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라 <시론>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잘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들뢰즈가 본 베르그송이다.


79p

-물질은 기억력이 없는 '순간적인 의식'과 같아서 '동일한 것'을 거의 반복한다. 그래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 사이에 질적 차이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다.-


80p

-물질은 거의 자기 동일적으로 이전 상태를 반복하지만 정신은 끊임없이 다양한 수준에서 자기 변신을 거듭하며 자기 차이화한다.-


물질은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는 말을 주의해서 봐야한다. 물질은 진동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기억력이 없는 순간적인 의식과 같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돌멩이가 돌멩이로 그대로인 것은 물질 또한 약간의 지속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속의 상하에 있으니까. 이때 지속이란 말이 무엇인지는 <시론>을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간략하게 다시 정리하고 넘어가면 물질은 지속한다. 그러나 생명과 같은 지속은 아니다. 물질은 분명 반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반복이지 '자기 동일적인 이전 상태'의 반복이 아니다. 물질은 끊임없이 흩어지고, 진동하고 있다. 이러한 진동은 과거를 반복하거나 본인의 상태를 온전히 반복하지 않는다. 한 번의 진동과 두번째의 진동은 완전히 다르고, 그 뒤에 '반복'되는 모든 진동이 매번 '다른 것'이다. 중요하니 문구 하나 가져와서 반복해서 설명하겠다.


<물질과 기억>-원문236

-현재 속에,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어떤 현재 속에 있는 것, 그것이 물질의 근본적인 법칙이다.-


이렇게 베르그송에게 물질의 반복이란 흩어지는 진동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재 속에 있는 것이다. 첫 진동과 물질의 마지막 진동이 온전하게 과거를 보존한 채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다. 결코 이전과 동일하지 않게 아주 미세하게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는 것. 이해하기 쉽게 세월의 풍파를 연상해보라. 피라미드가 그때 그 시절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명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아 과거를 그대로 보존할 수 '없는 것'이 물질이다. 다만  '우리가 보는' 형태가 '온전'하게 보이는 것은 물질도 어느정도 지속을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이런 지속은 우리의 지속과 다르게 흩어짐에 가깝다. (독회 7주 차 참고)


해설은 68~146p로 짧게 끝나고 나머지는 <물질과 기억> 1차 문헌이 요약해서 옮겨져 있다. 그래서 이미 1차 문헌 <물질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니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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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부록을 살펴보자.

330p

-들뢰즈의 <시네마 1>, <시네마2>는 각각 <물질과 기억>의 1장과 3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제 어떤 책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여러모로 유익한 책이다. 초반에 나오는 베르그송 이름 표기법 설명부터 시작해서 <물질과 기억>의 철학사적 배경을 서술한 31p~52p는 얻을 게 많은 부분이다.


<물질과 기억>을 옆에 펼쳐두고 안내서로 쓰려고 한다면 1차 문헌과 조금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가중 중요한 결론에서 인용한 <물질과 기억>의 원문 인용도 (...)으로 처리해서 그냥 넘어가고 있으니. 병행해서 읽은 사람은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어쨌든 나중에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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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황수영 선생님의 또 다른 책이다. 이 책 말고도 <근현대 프랑스 철학의 뿌리들>이라는 책도 있는데 이건 베르그송 검색에 걸리지 않아서 스킵했다. 하지만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책과 비슷한 맥락이니 참고하자.


당연히 들뢰즈를 경유한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장켈레비치의 관점과 들뢰즈의 관점을 베르그송과 따로 분류해두었다. 그렇다고 베르그송 입문으로 적절한 책이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정작 베르그송은 1부에서 잠깐 살펴보는 정도이고(그래서 베르그송 책이라고 하기 좀 그렇다.), 2부는 비샤와 깡길렘, 3부는 시몽동과 들뢰즈다. 깡길렘 시몽동을 입문하는 용도로 사용하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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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베르그송 책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잘 쓴 들뢰즈 책이다.

애초에 키스 안셀-피어슨은 베르그송 전공자가 아니라 들뢰즈 전공한 사람이다. 본인 입으로 베르그송을 했다고 해도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작 들뢰즈보다 베르그송을 많이 언급하고 베르그송 선집을 내서 착각할 수 있는데 모든 해석을 들뢰즈로 경유하고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시작하기 전에 494p 옮긴이 후기부터 보고가자.


-대니얼 스미스가 서평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명목상 베르그손 연구서이지만 해석의 관점에 있어서는 사실상 들뢰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베르그손을 들뢰즈 철학과의 연속성 안에서 독해하는 데 관심이 있거나~~-


어떤 책인지 알았으니 가볍게 본문을 살펴보는 것으로 끝내겠다.

그래도 베르그송 1차 문헌을 다 본 사람이 구석구석 읽을 경우 얻어갈 게 꽤 있는 책이다.


19p

-'차이의 정도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이 말은 즉 정도의 차이로 들뢰즈를 오해하지 말고 차이의 정도로 잠재적 다양체를 생각해달라는 의미다. 이건 베르그송 입장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구별이다.


22p 서문에서 들뢰즈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들뢰즈는 생명 철학의 조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변화의 경향성이 우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일 수도 없는 내적 차이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점, 둘째로 변이들은 분할의 관계를 맺는다. 셋째, 변이들은 잠재성과 연관~-


그리고 249p에서 들뢰즈 지속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들뢰즈는 지속을 '스스로에게 차이 나게 하는'것으로 물질은 반복의 영역으로 본다.-


1장에서 30p

-지속은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분할하면서 본성상 변화하는 것이다-

라는 들뢰즈식 지속이 나온다. 이건 <시론> 독회를 했으면 베르그송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을 테니 설명이 필요없겠다.


47p 주석 29번에서 헤르만 바일과 베르그송 연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참고로 헤르만 바일 책은 추천 추천. 국내에 정발된 건 <대칭> 한 권이지만 찾아서 읽어보시길. 저자도 러셀의 신랄한 견해와 수학과 베르그송 철학의 연관성을 강조한 바일의 입장이 대조된다고 하고 있다. 올바르게 읽은 수학자와 올바르게 읽지 않은 수학자였던 철학자...


66p~75p

러셀의 비판을 반박하는 부분이 있는데 들뢰즈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어서 어색한 부분이 좀 있지만 좋은 글이다.


135p에서 베르그손과 상대성 이론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베르그송의 '가속' 이슈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이걸 베르그송이 의도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관점이 아예 달라질 수 있는데 여기서는 실수로 보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를 옹호하던 저자는 들뢰즈 <베르그손주의>에 나왔던 지속과 동시성 설명을 따르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중에 한번쯤 읽으면 좋은 부분이다.


책 중간에 데넷의 사유를 비판하기도 하고, 이건 베르그송 입장에서도 유효하다.


바슐라르가 베르그송을 비판한 걸 반박하고 있는데 이 부분도 유효하지만, 바슐라르는 애초에 베르그송 오독한 걸로 유명해서 키스 안셀-피어슨이 설명하고 있는 방향 이외에도 많다.


217p에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베르그송을 비판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이건 소은 박홍규 선생님도 비슷한 의견으로 자크 모노의 비판이 미숙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담이지만 국내 번역된 <우연과 필연>을 보면 조현수 선생님이 역자 후기로 베르그송을 전공한 입장에서 자크 모노의 비판에 너무나 무기력했다고 쓰셨는데...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바디우가 들뢰즈를 비판한 부분을 검토하는 것도 재밌다.


7장에서 마지막 정리는 들뢰즈의 크리스탈 이미지로 하고 있다.


참고로 책의 원 제목은 <철학과 잠재성의 모험>이다.


그만큼 들뢰즈의 잠재적 다양체가 주인공이다. 이게 베르그송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잠재적 다양체란 개념이 베르그송과 어떻게 연관이 있고,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쓰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그리고 지금 할 필요도 없다. 나중에 들뢰즈 독회를 하면 그때 하면 되고 베르그송을 독해하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넘어간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