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실 선생님은 메를로 퐁티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제2부에서 현상학과 메를로퐁티에 집중하고 있다.
1부는 베르그송 철학을 개관하는데 사실 이 서술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좀 빈약하다. 2부로 들어가기 전에 아주 살짝 언급은 하고 가야겠는데~이런 느낌이다.
2부는 현상학과 메를로 퐁티를 이야기하고
3부는 짤막한 에세이로 끝낸다.
217p에서
-베르그손에게서 육체는 오로지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의식의 한 절단면을, 그것도 지속의 유동적인 흐름 앞에서는 인위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절단면으로서 이해된다. ~~~~ 육체가 베르그손의 이해처럼 현재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성을 아우르기 때문에 신체의 지각행위에 의하여 기억이나 회상이 가능한 것이라는 메를로퐁티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절단면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물질과 기억>을 보면 무엇이 어색한지 알 수 있다. 그 뒤에 홍경실 선생님은 메를로퐁티의 시간을 옹호하지만 그건 사실 당연한 거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베르그송을 비판한다고 적은 부분은 피상적인 이해임은 둘째치고 대안으로 제시한 시간관이 결국 베르그송이 했던 말이랑 똑같기 때문이다. 즉 베르그송을 비판하고 대안으로 베르그송을 다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지각의 현상학 (2025년 번역본 774p)
-순간 c와 순간 d는 아무리 근접해 있더라도 구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시간은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서로 속으로 이행하고 c는 d가 된다.-
서로 속으로 이행한다는 건 베르그송이 한 설명 그대로고.
그 뒤에 설명으로
-정의상 현재는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을 초월하여 미래와 과거로 향한다는 것이다.-
아니 베르그송과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의 설명과 비교해보시길
<물질과 기억> 원문 153
-내가 나의 현재라 부르는 것은 동시에 나의 과거와 미래를 침범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베르그송의 시간관이 현재로 닫혀 있다고 생각한 오해를 벗겨내면 결국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재형 교수님의 논문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에 대한 재고찰]을 보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니 필요한 사람은 찾아보시길
다른 건 마지막 장에서
274p
-이러한 인간 생명의 창조적인 진화의 시간 그 안에서, 지속의 흐름 그 속에서 생명을 거스르면서 이에 저항하는 물질적인 경향성~-
이건 선생님이 실수하신 거 같은데 '물질을 거스르면서 이에 저항하는 생명적인 경향성'이 더 적합하지 않나 생각된다.
절판이지만 마돌의 책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서 가져왔다.
마돌 할머니의 베르그송. 생애부터 시작하는 전형적인 입문서 스타일의 책이다.
그렇다고 마냥 처음 보는 사람이 달려들 수 있는 책이냐면 그렇지 않다. 우선 잘 안 읽히는 문체 (이건 원문을 보지 않아서 번역 탓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역시나 불친절한 불란서 철학자 특유의 설명방식(중간중간 여러 다른 학자를 끌어들임)이 입문자에게 좋지 않게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문자에게 추천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마돌 본인의 두드러진 종교적 관점이다.
마돌은 샤르댕을 좋아하는데 베르그송과 가톨릭, 그중 특히 가톨릭과 은연중에 끼워 맞추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아니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베르그송 1차 문헌을 다 읽고나서 보도록 하자. 그때는 얻어갈 것이 조금 있는 책이다. 물론 그때도 저자가 하는 이야기를 떠나서 역자 고유의 생각이 담긴 일부 주석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마돌은 베르그송이 1월 4일에 사망했다고 써놓았는데 주석으로 구이에가 1월 3일로 정정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폴 발레리의 1월 9일 추도사를 보면 지난 토요일 떠난~(1941년 1월 4일은 토요일이다.)이라고 명시해놨기 때문에... 구이에가 틀린 게 아닌지. 아니면 폴 발레리 본인이 착각했거나? 그런데 프랑스 아카데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데 설마 그랬을까. 우선 영미권은 에밀리 헤링을 제외하면 대부분 1월 3일로 알고 있다. 스탠포드 철학사전과 키스 안셀 피어슨도 <Key Writings>에 1월 3일로 표기하고 있으니까.
38p
-수를 센 소리들은 모두 서로 닮았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소리는 그것을 앞선 소리와는 다르다.-
그리고 역주에 '반복은 동일반복이 아니라 내적 차이를 갖는다.'라고 설명한 부분이 있다. 좋은 설명이다. 하지만 <시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다 알 테니.
51p
역주 95번은 흥미롭다. 류지석 선생님이 연구하셨던 분야가 설명되어 있다. 베르그송이 쓴 많은 편지들에서 플로티노스라고 쓴 게 있는데 이 부분이 플라톤이라고 잘 못 알려져 있었다는 걸 발견하시고 정정하는 논문을 쓰셨다는 내용이다.
<웃음>까지 챕터를 할당해서 개론을 해주고 있지만 별로 도움 되지는 않는다. 이부분은 그냥 1차 문헌을 한 번 더 읽는 게 나을정도.
이밖에도 역자가 주석을 통해서 마돌이 베르그송을 카톨릭 신비주의로 곡해하고 있는 것을 꼬집어주고 있다. 여기서 웃긴 건 <처음 읽는 베르그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출판했는데 정작 책 내용이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오해하기 딱 좋은 설명임을 역자 본인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모르는 어른의 사정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팔려야 되기 때문에 <처음 읽는>이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런데 또 <처음 읽는 베르그송>, <깊이 읽는 베르그송>(장켈레비치)을 먼저 번역해서 내놓고, <달리 읽는 베르그송>을 역자 본인이 쓰려고 계획 중이시라는 걸 보면...
마돌의 책을 역자가 221p 467번 주석으로 잘 요약하고 있다.
'저자는 크리스트교를 위한 마사지 전문가이다.'
부록으로 비교연대표가 실려있다. 이건 우리 독회에도 도움되는 내용이니 올려두겠다.
유명한 장켈레비치의 베르그송.
이 책의 초판은 1931년 베르그송이 살아있을 때 나왔다. 그리고 나중에 <두 원천>과 <사유와 운동>이 나오고 베르그송 사후에 추가해서 쓴 것이 지금 이 책이다. 그래서 입문서냐? 그건 절대 아니고. 베르그송 7권을 모두 읽은 다음에 봐야 얻어갈 것이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전문 연구서냐? 그건 또 아니다. 에세이에 가까운 책인데 다만 <두 원천>을 설명한 후반부와 마지막 부록으로 첨부한 짧은 글 두 편이 연구 성향을 띠고 있다. 이 부록이 사실 장켈레비치 베르그송을 읽는 커다란 이유를 차지하고 있다. 본문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두 원천>을 토대로 유대인의 시선으로 본 베르그송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록에서 본문 내내 숨겨왔던 저자 본인의 성향을 폭발해내고 있다.
역자가 평한 걸 옮기면 '장켈레비치는 베르그송을 새로운 유대 선지자로 만들려는 듯하다.'
당연히 이 부록 두 편은 베르그송이 죽은 다음 1959년 개정판을 낼 때 포함된 것이다. 그러니 장켈레비치가 쓴 내용을 베르그송이 온전히 동의하고 가장 적합한 해설이었다고 오해 하는 건 금물이다. 그리고 이건 본문의 내용도 마찬가지. 장켈레비치는 셸링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 스피노자도. 장켈레비치가 셸링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곁다리로 쓴 책이 베르그송이라서...그러니 이광모 선생님의 <기로에 선 이성>을 읽으면 장켈레비치 베르그송을 좀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맞냐 틀리냐는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고 생각된다. 장켈레비치가 28살에 쓴 초록은 분명 베르그송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었으니. 그리고 읽어보면 좋은 문구들이 많이 보인다.
47p
-직관은 결정적으로 자기에 반환된 정신일 것이고, 즉 자기 자신에 완전하게 현전하는 지식의 완전한 확신일 것이다.-
지식을 어떻게 보냐에 따라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해석이 소은 박홍규 전집에도 나와있다.
231p
-실체의 일원론, 경향의 이원론처럼 우리에게 나타난다.-
아마 장켈레비치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일 것이다. 이 책이 아직도 인용되는 건 딱 이 부분인데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베르그송을 모두 다 읽고난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무작정 베르그송은 일원론인 거 아니냐~라고 말하면 그건 베르그송을 떠나서 장켈레비치 <베르그송>조차 오해한 거라고 생각된다.
233p
-더욱 비극적인 것은 치명적 경향성이 생명성 그 자체의 심장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특이한 비웃음에 의해, 생명은 자기를 죽일 물질에 대해 스스로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생성의 연속된 운동 속에서 해소되는 생겨나는 찢어짐이, 그리고 공간적 원리의 악영향과 동시에 유용성을 설명하는 그 찢어짐이, 생명 속에 있다.-
<시론> 독회를 참여한 사람은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쁘게? 묘사한 내용이 많아서 글이 어려워 보이고 그런다. 한 마디로 책이 안 읽힌다. 하지만 읽으면 재밌으니까 나중에 베르그송 책을 빠짐없이 다 읽고나서 보도록 하자. 원문은 내가 안 읽어봐서 번역이 어떤지 말을 못하겠는데 읽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
368p
-베르그송을 따른다는 것, 그것은 개방된 정신만큼 열린 도덕도 아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열린도덕은 이미 다시 닫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 번 열린도덕은, 우리가 그것을 계속해서 열고 끊임없이 다시 열지 않는다면, 다시 닫힌 도덕이 되기 때문이다. 항상 운동 중인, 열고자 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두 원천>을 중심으로 슬슬 전문서의 느낌이 나온다. 후반부와 부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핵심을 놓치는 게 되는데 이건 좀 길어서... 우리 독회는 아직 <시론>만 했으니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독회 시간에 보는 것으로 하자.
( 사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읽고 안 읽었으니 지금 햇수로 8년? 그래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위에 인용한 내용도 읽었을 때 필기한 부분이라 쉽게 후루룩 펼쳐서 적은 것이고 지금 이 책의 소개도 기억에 의존해서 썼다. 장켈레비치는 다시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부담스러우므로, 여유가 생기면 나중에 다시 읽어보는 것으로 미루겠다. 어차피 <두 원천>하면서 복습해야되니까.)
어느 스님이 <시론>에 대해 쓴 글이다.
26p
-변화와 변하지 않음이 동시에 모순적으로 얽혀있는 것 같으면서도 질적으로 항상 새로운 생명체가 되어가는 것이 생명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시론>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와 베르그송의 지속을 함께 봐야만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저자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무슨 헤라클레이토스의 판타레이로 보고, 다른 이면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를 고정된 무언가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생명 활동 그 자체에 양적으로 분할된 듯한 것 속에 질을 담고 있고 질적인 흐름 그 자체가 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식으로
요상하게 풀어내기 시작한다. 이건 베르그송이 아니라 양명학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후 설명을 보면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구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109p에서는 '공간을 배제한 시간과 시간을 배제한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으므로 베르그송이 이 둘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라고 쓰고 있다. 알고보니 이 스님 <시론>도 제대로 안 읽었다.
뒤로 갈수록 전부 베르그송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칸고트 순수이성비판만 읽고 실천이랑 판단력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칸트의 철학에는 윤리도 없고 미도 없다고 하는 식이다. 불교 철학 공부하신 분이 어쩜 이리도 형이상학을 모르실 수가 있는지
예컨대 103p부터
-베르그송의 이야기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시공간은 분할 되지 않는 하나로서 사건마다 고유한 시공간의 좌표를 갖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공간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의 시간 흐름, 곧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베르그송의 시간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고 있다. 이거 더 읽는 게 맞아?
그리고 신경회로 뭐시기를 언급하면서 이제는 전기 화학적 양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베르그송이 말하는 질은 알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수학과 과학에 아주 능통하신 분인가 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실망한 크기를 전기 화학적으로 분석해서 숫자로 측량해주셨으면 좋겠다. 아무렴 그렇게 떡하니 나온 100이라는 숫자가 내가 느낀 실망감과 '온전하게' 일맥상통한지 진단도 해주셨으면 좋겠다. 음... 재보니까 100만큼 실망하셨군요? 이럴려나. <시론>내내 그 짓거리가 왜 문제인지 말하고 있는데 도돌임표를 하고 있으니.
아아
이건 개론서, 입문서도 아니고, 연구서는 더더욱 아니다. 무슨 책인지 모르겠다. 서문을 통해 수유너머에서 이진경의 추천으로 강의를 한 강의록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 베르그송이란 도대체 무엇이 되어버린 걸까.
정말 안타깝다.
저자는 영문학 박사다.
엘리엇이 베르그송을 어줍잖게 비판하고 다닌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정작 엘리엇 본인이 영향받은 걸 감추려고 했던 게 조금 우스웠는데 그런 내용을 콕 집어서 저자는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취지는 좋은데 베르그송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한 게 흠이다.
38p
-기억은 유용한 것만을 떠올리고 행동에 필요하지 않는 순수기억은 억제한다. 그러나 순수 기억은 인간이 현재의 삶에 무관심해질 때 작동한다.-
원뿔도형을 설명하는 <물질과 기억> 3장을 아예 무시하고 지나간 설명이다.
62p부터 엘리엇이 베르그송을 비판한 논점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데
여기서 저자는 주석으로 '베르그송에게 있어 의식과 물질 사이에는 환언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그는 물질과 정신 간의 분리인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베르그송이 이원론인 건 맞지만 의식과 물질을 칼 나누듯이 나누어서 이원론인 게 아니다. 우리 독회에서도 함께 시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물론 저자도 이를 의식하고 뒤에 <창조적 진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시론>에서는 그랬었다 라고 넘어가는 게 문제다. 이건 엘리엇이 베르그송을 잘못 비판하고 있는 내용 중 하나와 동일한데 <시론>에서 전개한 사유와 <창조적 진화>의 사유가 일관되지 않다며 웅얼댄 것이다. <시론>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사유를 본인이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억지 비판을 하고 있다.
책 3장은 엘리엇의 초기 시에 끼친 베르그송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도 저자의 잘못된 이해가 나온다.
83p
-베르그송 용어로 심층자아는 시간에 속한 자아이며 지속하는 직관적 체험을 하는 자아이다. 그러나 표층자아는 공간으로 표현되는 자아이며, 언어로 구현된 인식의 관습적 범주를 통하여 나타나는 굴곡된 자아이다. 표층 자아는 사회적 자아로서 사회생활에 유용한 관점에서 보이는 자아이며 굳어서 딱딱한 생명이 없는 자아이다. 그러나 심층 자아는 풍요로워서 정의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자아다.-
118p
-이런 기억이 부활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는 실용성과 효용성이라는 그물에 가려서 볼 수 없는 것이 현재에는 과거에 초연해져서 행동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과거의 온전한 것이 온전히 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이다.
이런 <물질과 기억>의 잘못된 이해가 책 전반에 퍼져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봐야될지 모르겠다. 과거의 온전한 것을 재생한다는 순수기억 설명을 잠깐 봐보면. 베르그송에게 기억은 부활이 아니다. 부활이란 말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가 온전하게 꺼내지는 것. 하지만 그딴 건 없다. 예컨대 1+1=2. 이런 지식이 나중에 온전히 재생될 수 있지 않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게 바로 잘못된 이해다. 오전에 학교에서 배운 산수를 오후에 학원에서 복습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꺼내진 1+1=2와 당신이 오전에 연상한 1+1=2와 온전하게 같은가? 이걸 이해 못하면 시간을 이해 못하는 것과 같다. 물론 수식과 결과는 동일하다. 그걸 부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 생각해보니 이 설명은 <시론> 독회에 몇번이나 했으니까 또 할 필요 없겠다. 손가락 아프니 그만 넘어가자.
96p 연구에는 어김없이 그 이름이 나온다.
버트런드 러셀.
-버트란드 러셀이 베르그송을 비판한 것에 엘리엇이 영향을 받았다는 차일즈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역시 여기저기 강의하러 다니면서 베르그송을 비방했던 효과가 있다. 당시 러셀의 강의를 들었던 엘리엇까지 꼬드긴 거다. 무서운 인간.
영문학 지식이 전혀없는 나같은 인간도 재밌게 볼 수 있었으니, 베르그송을 전부 다 읽고 슉슉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사실 송영진 선생님이 쓰신 베르그송 개론서가 따로 있지만 이건 품절이라 구할 수 없으니 이번 글에는 빼버렸다.
송영진 선생님이 쓰신 모든 논문과 책을 읽어봤지만 <직관과 사유>가 가장 읽기 쉬우면서 얻을 게 많다. (선생님 전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 논문은 동의하지 못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선생님 본인이 쓰신 논문을 다시 정성스럽게 가다듬으셔서 그런듯하다.
(잠깐 딴소리를 하면 송영진 선생님은 특이하게 유학생활을 하시다가 정작 박사학위는 전북대에서 하셨다. 그런데 당시 전북대에는 이미 박홍규 선생님의 또 다른 제자인 박전규 선생님이 교수직으로 계셨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냐면 책 한권 추천하려고...
박전규 선생님이 쓰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정말 다 읽고 찐한 감동을 받은 책이었는데 2년 전만 해도 4천원에 새걸로 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구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좋은 책이 나온지 30년이 넘었는데 최근까지 초판 1쇄 그대로 팔고 있었으니, 품절이 안되고 2024년까지 버티고 있었던 게 기적이었다. 이렇게 하나씩 잊혀진 훌륭한 연구서가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아직도 중고서점에 돌아다니는 이유다. 참고로 중고서점 사장님이 이 책을 평하길 80년도에 국한문혼용을 하지 않고 순수 한글로 모두가 읽을 수 있게 쓴 멋진 책이라고.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이렇게 한글로만 쓰신 건 뇌피셜이지만 살짝 비하인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건 기종석 선생님이 <박홍규 철학의 세계>에서 하신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박홍규 선생님이 학과 내에서 고생 끝에 간신히 중세 철학 전임 자리를 확보해 그 자리에 지금은 고인이 된 박전규 선생님을 초빙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전임을 뽑을 때 대학 내 여러 선생님과 대학원생 앞에서 미리 강의를 해보는 게 상례여서 박전규 선생님도 그 자리에 서게 되었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강의 내용을 누구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박전규 선생님은 오랜 기간 파리에서 체류한 데다가 사모님이 베트남 분이라서 집에서도 전혀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으셨던 터라 우리말이 서툴렀어요. 그러니까 말이 앞뒤가 안 맞게 되고 해석이 되지 않아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어요. 박홍규 선생님도 어쩔 도리가 없으셨고요. 박홍규 선생님은 박전규 선생님이 프랑스에서 학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업적을 이루고 돌아온 사람인데 그것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너무 안타까워하셨지요. 그 후에 박전규 선생님은 전북대로 가신 후에도 우리말 문제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죠.')
다시 직관과 사유로 넘어와서
이 책은 생긴대로 당연히 개론서는 아니고 멋진 연구서다. 베르그송 1차 문헌을 1회독 하고와서 읽으면 정말 '쉽고 재밌게 쓰인 좋은 책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박치기하면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는 책이다. 그러니까 연구서라도 개론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예컨대 이광모 선생님의 <기로에 선 이성>, 윤대선 선생님의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이나 이남인 선생님의 <현상학과 해석학>같은 친절한 스타일이 아니다. 베르그송을 알고 있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니 반드시 나중에 읽도록 하자. 물론 우리 독회를 함께 하면서 <시론>을 읽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밀레의 <베르그송 미적분> 요약으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굳이 10유로 주고 프랑스 아마존 킨들로 사볼 필요성을 줄여줘서 감사할따름이다.
책 2장 논의는 따로 표기해놓은 건 없지만 내가 보기에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에우튀데모스 강의의 일부분에서 시작된 것 같다. 잠깐 옮겨보면
소은 박홍규 전집 1권 91p
-多가 있다면 동일한 것들이 동시에 한정된 것이 되며 동시에 한계가 없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만약 다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현재 있는 것과 동일한 수의 다이며, 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그런데 그것이 있는 만큼 있다면 그것은 수에 있어서 한정된 것이다. 또 한편, 다가 있다면, 그것은 수에 있어서 무한하다. 왜냐하면 현재 있는 다 사이에 다른 수가 언제나 있으며 그리고 이 수들 사이에는 또 다른 수가 있다. 즉 다는 수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 위와 같은 제논의 논리에 의하면, 다는 한편으로는 유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하다. 이 두 규정은 동시에 다에 수반되며, 또 서로 모순된다. 물론 제논은 다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상반된 규정을 모순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제논의 논리는 다가 유한하다고 주장한 사람에게는 다가 무한하다고 반박하고, 다가 무한하다고 주장한 사람에게는 다가 유한하다고 논박하기 위해서 이용될 수 있다.-
이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무에서 모순율과 동일률로 시작되는 설명은 송영진 선생님의 스승님인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가르침이 연상된다. 그리고 직관과 사유 3장에서 설명되는 이 개념이 송영진 선생님의 다른 저서까지 관통하는 기본이 된다. 마치 독자가 직관과 사유를 보고 왔을 거라는 전제하에 쓰신 것처럼. 그래서 다른 저서에서 모순율을 말할 적에는 별다른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신다.
99p에서 들뢰즈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나온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생명의 약동 개념에 기초한 창조적 진화의 관념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존재론적 기초 개념인 차이와 반복 개념으로 환원하여 말하고 있다.'
7장에서 본격적인 직관을 다루는데 송영진 선생님은 일원론 그중에서 플로티노스에 입각한 일원론으로 연구하고 계신다. 사실 이건 근거가 있다. 베르그송 강의록을 읽어보면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플로티노스로 이어진 사고가 명확하게 나온다. 물론 그렇다고 이원론이 아니고 일원론이냐면. 이건 또 다른 이야기.
직관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기 때문에 <사유와 운동>을 하면서 다시 언급할 일이 있을 것이다.
1) 방법론적 직관, 2) 자아의 지속에 관한 직관, 3) 외적 사물에 대한 직관, 4) 타인에 대한 직관, 5) 생의 약동에 대한 직관, 6) 신의 직관으로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직관과 사유> 연구 목적은 '베르그송의 직관이 결코 합리주의에 국한될 수 없음을 밝힌다.'이다.
그리고 나도 이에 동의한다. 베르그송을 읽으면 읽을수록, 합리만으로는 도저히 완벽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걸 밝히는 게 베르그송 본인의 궁극적인 생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소은 박홍규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완벽한 형이상학은 있을 수 없다는 거지. 그리고 베르그송 본인도 이를 알고 있어서 지성과 직관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뭐건 간에 총동원해서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합리적인 탐구로 무장한 상태로 설사 비합리의 영역일지라도, 거기까지 손을 뻗어서라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식론이자 존재론을 말하는 것. 그렇다고 누구 누구가 비합리주의자 새끼라고 비난하는 그런 비합리를 말하는 건 아니고, 이 책에서 송영진 선생님은 본인이 교회 다니셔서 기독교 신비주의로 향하는 귀결을 택하시고, 샤르댕도 마찬가지 그 나름의 생각으로 <인간현상>을 쓴 것이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연구 끝자락에서 언급한대로 베르그송의 신비주의는 '열린' 신비주의이므로 체험에 대한 해석을 기독교적 계시체험과 반드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그래서 송영진 선생님도 그런 것을 보았기에 베르그송의 <웃음>에 주목하는 것으로 연구를 마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62p에서도 '어떻게 진리 인식행위와 윤리적 실천 그리고 예술행위가 같아질 수 있는가? 사실과 가치, 이 양자의 동일성과 차이성은 어디에 있는가?'로 이미 칸트가 문제시 했던 것을 베르그송 식으로 새롭게 풀어내면 어떻게 되는지 재밌는 연구 주제를 시사하고 있다. 아 더이상은 논문 주제라 짧게 말하기엔 좀 그렇다.
아무튼 멋진 연구서이지 입문서는 아니다. 참고로 책 후반부 신의 직관과 베르그송의 웃음에 대한 내용은 저자가 [베르그송에 있어서 신의 직관], [베르그송의 직관론에 따른 희극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별개의 논문으로 더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찾아보자.
연구서는 아니고 개론을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하지만 너무나 내용이 빈약하다. 정작 중요한 건 다 빼놓고 쓸데 없는 말을 길게 하고 있어서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서 지속이 무엇인지 직관이 무엇인지, 물질은 무엇이고 기억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105p 유명한 똥께덱과의 편지를 언급하면서 일원론과 범신론에 관한 베르그송의 논박을 서술해 놓은 건 좋은 부분이다.
스피노자 번역을 하셨던 강영1(영12계 금칙어 뭐임) 계 선생님이 쓰신 책이다. 잠깐 딴 이야기. 스피노자 번역은 국내에 크게 강ㅇㄱ 선생님이 하신 것과 황태연 선생님이 (학위가 있으신 분은 아니지만 스피노자를 아주 아주 많이 사랑하시는 분. 참고로 정외과 황태연과 동명이인) 하신 게 있다. 난 강ㅇㄱ 선생님이 번역하신 것만 읽어보고, 진태원 선생님이나 내들러가 쓴 2차 문헌을 읽는 것으로 스피노자 공부는 그만 두었다. 그래서 스피노자에 대해서 국내 추천 번역서가 무엇이라고 함부로 말은 못 하겠다. 그런데 황태연 선생님은 굉장히 열정적인 분이다. 기존 강ㅇㄱ 선생님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글도 구글링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어쨌든 번역은 다다익선이다. 누가 내놓나 상관없이 독자 입장에서 선택할 폭이 넓어지면 무조건 좋으니까.
다시 돌아와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음과 모음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나온 시리즈인데 어릴때 집에 잔뜩 쌓아놓고 읽은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시리즈다. 그때 나름 수집한다고 열심히 챙겨 봤었는데 이건 못 봤었다. 기대를 갖고 첫장을 펼쳐 본다.
'엄마 아빠가 싸운다. 아빠의 꿈은 철학자다. 엄마는 아빠의 철학적 생각을 쓸모없는 짓이라고 무시한다. 엄마의 말을 듣고 있으면 아빠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 같다. 엄마와 아빠가 좋은 사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상상력을 멈춰야 한다. 누나는 문제의 원인이 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베르그송과의 대화는 멈추기 싫다.'
'베르그송은 아빠가 밖에서 주워 온, 네 발만 하얀 검은 고양이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너희 식구는 시간이 필요해. 1초, 1초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닌 참다운 시간 야옹.'
시작부터 골때린다.
아 생각해보니 이거 동화책에 가까웠지.
넘어가자.
정말 대한민국에 베르그송 입문서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 푸념하고 있을때 마지막으로 본 아래의 책이 빛을 발했다.
중고등학교 과학교사 쓴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만화책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베르그송을 읽어 온 나름 긴 세월동안 그냥 만화네 ㅎㅎ 하고 지나친 책이었다. 주위에 어떤 선생님도 이걸 추천하시는 분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분들도 안 읽어봤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책들은 옛날에 나오는 족족 한 번씩 읽어서 리뷰가 곧 빠른 재독이었지만 이 책은 빠짐없이 리뷰해야겠다는 작은 의무감 하나로 이번에 처음 펼쳐본 것이다. 그런데 웬걸 근본 개론서였다.
개론서란 빠지는 건 있어도 틀린 내용이 없어야 한다. 내용이 부실한 건 당연하다. 입문자용이니까. 심오한 내용은 당연히 부족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개론서의 목적에 알맞지 않으므로 빼는 게 맞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틀린 내용으로 채우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사칙연산을 설명하는 수학책을 읽으면서 1+1=2가 정답이 아니고 3이라고 쓰인 책이 있으면 개론서라고 할 수 있나?
이 만화는 빠진 내용이 있을지언정 틀린 내용 없이 저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이는 훌륭한 개론서다. 그렇다고 만화책이라서 내용이 부실하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200p만화면 10분 컷 아님? 우습게 봐선 안 된다. 한 번 붙잡으면 족히 2시간은 걸려야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들어있는 정보량이 많으니까. 이 만화가 <창조적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그렇지 김재희 선생님이 쓰신 <물질과 기억>보다 베르그송 사상 전반에 걸친 설명이 몇배는 풍부하고 알차다. 그리고 무엇보다 훨씬 전문적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이 없는 물질도 의식과 마찬가지로 지속한다고 보았어'
어떤 다른 책들이 물질을 이상하게 설명한 것과 다르게 근본이 느껴진다.
좀 추가하면 상단 주석 부분인데 베르그송에게 물질matière, 신체,물체corps, 사물chose, 무기물matière inorganique등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물질이 지속한다는 것에서 flux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그런 내용은 빠져 있다. 다루기에는 어렵고 분량도 길어지면서 개론의 범위를 넘어서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위에서 거친 비유는 만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와닿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니 문제없다. 중요한 건 '생명이 물질 속으로 들어갔어~'라는 말이 보이는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지만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근본있는 설명인지.
변화의 연속과 보존. 캬
아 뭐지 이 만화.
서울대선정 인문고전 시리즈라서 이태수 선생님이 감수라도 해주셨던 걸까.
대학교 교양 수업으로 베르그송을 다룰 일이 있다면 이 만화책을 교재로 사용해야 한다.
누가 베르그송 입문서 뭐 봐야됨? 이라고 질문하면 뭐가 있었지?라는 생각하지말고 기계적으로 이 책을 추천하면 된다.
철학을 만화따위로 보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실제로 내용이 너무 부실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들었던 허접한 '만화로 보는 철학~' 스타일의 책을 여러번 봐왔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그런 편견이 깨졌으니 자신있게 추천한다.
1차 문헌을 그대로 읽어서 풀어낸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개론서다. 그리고 엄청나게 잘 쓰여져 있으니, 심지어 들뢰즈 전공자가 뭉쳐서 쓴 스탠포드 철학사전의 베르그송 항목보다 더 자세하다. 이걸 보고 스탠포드 읽으면 한숨만 나올 정도다. 그만큼 이 만화는 훌륭하다.
결론. 베르그송 연구서를 제외한 개론서는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창조적 진화 만화>가 현재까지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책이다.
선개추 후감상 - dc App
와 기대를 뛰어넘네 소개글이 왤케 재밌냐
독회 같이 따라가고 싶은데 요근래 정신이 없어서ㅠㅠ 글이라도 잘 보고 있읍니다.
이게 머임? 독서 토론 모임에서 나눈 내용?
갤 독회탭
철학과임?
이야~좆병신 똥글 싸느라 수고 많았다
근데 혹시 철학과냐? 좆백수 테크 타게 생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