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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모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쓰러져 주립병원의 죽음의 방 구석 침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떨어진 것은 나 스스로를 과대 평가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만족시키는 삶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삶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호흡 中
그것은 황홀한 기쁨이었고, 나는 이 기분을 즐겼다. 그러나 나는 이 기쁨이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한 아이 中
베른하르트의 문학 세계는 일관된 주제들의 다양한 변주들로 이루어져있다. 동일한 관념들은 작품마다 다른 구조에 새로 끼워 맞춰지면서 —뒤틀리고 변형되어— 다시 새로운 형태로 창조된다. 베른하르트는 서사에 의존하지 않는 스타일을 구사하지만 그의 자서전 5부작은 나름 선형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각 편마다 서사의 완결성은 있지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에도 1편은 유년 시절 기숙사 학교와 전쟁에 대한 기억, 2편은 청소년기 학교로부터의 탈출과 상인 견습 생활, 3편은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뭐 이런 식으로 일관되게 순행적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4편 <추위>는 출간이 엎어져서 읽을 방법이 없기에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없다. 5편이자 마지막 편인 <한 아이>에서 베른하르트는 가장 독특한 변형을 시도한다. 지금까지의 서사성을 무너뜨린 후, 작가 이전에 그저 어린 시절 ”한 아이“였던 자신으로 회귀해 자서전의 중간 부분 즈음에 위치해 있을 한 추억을 축으로 삼은 다음 자서전 이야기의 마지막의 완결성을 삭제해버린다. 마치 과거에서 그 한 부분만 통째로 도려낸 듯이. 하지만 이 마지막 이야기는 또 한편으로는 자서전 5부작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베른하르트의 앞선 작품들은 전부 자신에게 일어난 실제 사건을 다루지만, 그 사건들은 부차적인 것이고 존재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내재적 혐오가 주를 이루었다. 그랬던 그가 <한 아이>에서만큼은 다시 순수성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순수성은 어두웠던 유년의 우울 그 자체이지만, 베른하르트가 자서전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 역시 이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자서전 5부작은 후기로 갈수록 짙어지는 모든 사물, 관념, 체제에 대해 퍼붓는 파멸적인 냉소보다는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며 그 당시의 특정 사건에 의해 비롯되어, 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여러 요인과 거기에 엮인 인물들을 살펴본다. 5부작 중 3편인 <호흡>의 주테마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가족이다. 베른하르트에게 이 셋은 긴밀하게 엮여있고, 현실에서 복잡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베른하르트는 감기를 방치하다가 늑막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다. 병원에서 죽음의 경계까지 도달하고 시한부 환자들만 모아놓은 ‘죽음의 방’에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무수히 많은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게 된다. 여기서 그는 ‘사색‘하는 법을 익히는데, 죽음을 관조함에 있어서 비로소 평소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던 생에 대한 갈망을 확인한 것이다. 후에 요양소로 이동하며 병원에서의 죽음과 근접한 경험으로 인해 제2의 삶,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죽음의 경험과 아픔을 서술하기에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 표독한 면이 덜한데 그러나 예외적으로 병원과 그곳에 있던 의사들을 멸시한다. 병원은 죽음을 치료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공간이라고 까는 동시에 의사들은 환자를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죽이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판적으로 말하는데 여기에는 물론 개인적인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의사의 진단으로 인해 그는 병원에서 요양소로 옮겨가지만 그곳에서 원래 없던 폐병에 걸리기 때문에 그가 의사를 혐오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폐질환으로 고통받으면서 심장이 망가진 그는 자신의 꿈이었던 음악, 즉 성악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작품의 제목인 호흡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은 호흡 불가능한(단지 병에 대한 관점에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그리고 관계에 대해서 다룬다.
베른하르트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병든 자들을 위한 예술이다. 단지 신체적,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지 않더라도 병적인 감각은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이 ”질병“이 바로 베른하르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비관적인 서술과 관념, 서사 없이 진행되는 시니컬한 대사들의 연속은 이 감각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이 느끼기에 그저 단순히 정신병자의 끝없는 중얼거림일 뿐이다. 문학에서 병적인 것을 다룬 작가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병적인 것을 묘사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대상의 치부를 파헤치는 일이다. 이 작업은 기피되고 사회적으로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무엇보다 강하게 살아움직이는 삶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소수의 독자들이 파괴적인 문학에 이끌리는 현상은 이 이유 때문 아닐까.
(다만 이 병적이라는 의견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우선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기에 베른하르트 소설들을 읽으며 공감하고, 따라서 정신병적인 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과연 정상적인—정상적이라는게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사람들의 시점에서도 베른하르트의 글이 정신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통은 병적인 부분보다는 비관/염세주의 쪽으로 기울듯하다.)
폐질환을 넘어선 총체적인 호흡 불가능성은 가족 관계에도 존재한다.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인물인 외할아버지,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비로소 그는 자유롭게 된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관계는 바로 가족이다. 그러나 가족이라고 반드시 관계가 좋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 관계로 인해 불행한 케이스들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자신괴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인물이라고 언급한 외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가족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그의 훌륭한 스승인 동시에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를 억압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사랑한 외할아버지지만 비로소 외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한 대목을 보면 타인의 영향력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짓눌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상실의 슬픔을 초월한 해방의 자유로움…
*기존 감상문의 결론, 이 단락은 <한 아이>를 읽기 전에 쓴 단락이므로 무시해도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자서전 5부작이 결말을 맺는 방법이 서로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의 위기들을 이겨낸 후, 그 반동으로 한순간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 베른하르트는 즉시 앞에서 말한 대부분의 생각과 행동을 부정한 채 다시 절망과 자기파괴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이 전개는 읽는 독자로서 다소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는 동시에, 또한 이 역시 베른하르트스럽다고 납득하게 되는 면모가 존재한다. 어쨌거나 그의 작품이 대놓고 희망찬, 삶의 긍정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역설적인 방식으로 삶에 대한 애증을 표현하기에. 베른하르트의 스타일에 관통 당한 독자는 다른 작가를 통해서 이 같은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나 역시 이 독자 중 한 명에 포함되기에 아직 미번역인 다른 작품들, Korrektur, Ja, Beton의 번역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려본다. )
이로써 본인은 베른하르트 자서전 5부작에 대한 감상 쓰기를 전부 마쳤다. 물론 1편 <원인>은 과거에 읽고 쓰인 탓에 감상문 자체가 많이 부족하고, 2편 <지하실>은 미완성, 그리고 5편 <한 아이>에 관해서는 쓰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쓴 감상은 이 <호흡> 하나 밖에 없다. 이를 개인적으로도 아쉽게 생각한다. 마지막, <한 아이>와 관련해서만 사족을 덧붙일까 한다. 우선 감상을 쓰지 않은 이유, 이는 내 취향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다. <한 아이>는 작품 자체가 하나의 완결을 위한 장치이다. 장치가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 자체는 별게 없다. 병적인 부분을 많이 들어내고 ‘과거‘, ’추억’ 등 진짜 자서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기에 유독 유한 편이다. 따라서 기존 베른하르트의 독설적인 문체나 관념론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꽤나 허망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그 독자에 속하는 나 자신은 읽지 못한 4편, 실망했던 5편 대신 3편까지의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무튼 베른하르트 자서전 독해의 긴 여정은 24년 9월에 시작해서 25년 11월에 끝이 났다. 이 글은 26년 2월, 갑자기 베른하르트가 생각나 기존 감상문의 서론과 결론부에 <한 아이>에 대한 단상만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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