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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의 간판격인 학자라서 나름 기대했는데, 기대가 컸어서 그런가 실망도 컸음.
전반적으로 자기가 가진 근거들의 양에 비해 지나치게 야심찬 주장을 한다는 느낌임.

라투르는 이른바 "파스퇴르화"로 대표되는 일련의 위생과 의료에서의 혁신들이 실은 파스퇴르 개인의 천재성에 기대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수많은 "동맹자"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위생주의자들과 내과의들, 군의들 등은 파스퇴르의 혁신을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내적 논리 안에서,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번역, 수용해냈으며, 마치 장군과 병사들의 관계처럼, 실제로 "파스퇴르화"의 전투를 실행한 것은 대개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스퇴르가 한 것은 무엇인가?
그가 가능케 한 것은, 기존에 무수한 원인들을 갖던 것으로 여겨지던 각종 문제들을, 미생물이라는 하나의 작인으로, 실험실이라는 통제된 환경 속에서, 설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실험실의 원리를 사회 다방면에 적용했으며, 파스퇴르주의자들과 위생주의자들, 뒤늦게는 내/외과의들 또한, 파스퇴르를 본받아, 그들의 분야를 파스퇴르화했다.

여기서 실험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보기에, 라투르가 실험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은 이언 해킹이나 낸시 카트라이트 등의 "현상의 창조"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해킹과 마찬가지로, 라투르는 실험실이 어떤 자연적인 것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공적인, 실험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발견해낸 특정한 현상 - 예컨대 미생물의 증식 - 은 실험실이라는 특정한 환경에서만 가능하며, 그 현상의 재현 가능성은 앞선 실험실의 환경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복제해냈는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해킹은 그렇다고 해서 관찰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실험의 결과가 변화 가능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광전 효과는 아주 특정한 실험실 환경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광전 효과에서 튀어나온 전자들은 실제한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을 갖추어 주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자연에 의해 이미 내용이 결정되어있다.
다시말해, 전자는 광전 효과 실험 이전에도 실재했다.

그런데 라투르는 이 지점에서 해킹과 갈라선다.그리고 이게 내가 가장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인데, 라투르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미생물은 파스퇴르 이전에 존재했는가? 실천적 관점에서 볼 때 - 나는 이론적이 아닌, 실천적을 말한다 -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 확실히, 파스퇴르는 엷은 공기에서 미생물을 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몇몇 이전 작인의 가장자리를 바꾸어놓음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을 실험실로 이동시킴으로써 그것을 형성시켰다."(p. 130)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1.라투르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 반실재론적 태도를 취하는가? 예컨대 반 프라센처럼?
아니다.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은 시간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시말해, 미생물은 언제나, 돌멩이와 똑같은 정도로 실재하지 않으며, 그건 파스퇴르의 발견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2.라투르는,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이 과학자들이 관찰하는 세계 자체를 바꾼다고 말했던 것처럼, 관측 세계의 공약 불가능성을 말하는가?
아니다. 라투르는 불연속적 변화와 같은 관념을 거부한다. 내과의들은 파스퇴르에 의해 이전의 모든 치료법들을 폐기하지 않았다 - 단지 그것에 "파스퇴르화"를 추가했을 뿐이다.

3.라투르는 그저 미생물이라는 관념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를 문학적으로 과장할 뿐인가?
그렇다면 왜 그런 소박한 주장에 굳이 이런 과장된 수사를 써야만 했는가?

..솔직히 다시 봐도 잘 모르겠다. <실험실 생활>같이 라투르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굳이 읽어볼 생각은 안든다.

이러한 사소한 존재론적 문제들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방법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라투르는 자신의 작업이 과학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글 말미에서 시인하듯, 이는 파스퇴르의 발견이 어떻게 프랑스를 바꿔나갔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 일종의 과학사이자 사회사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라투르에 따르면, 이 작품의 야심은 과학과 사회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방법론적으로 이를 실천하고 있나?

놀랍게도, 라투르는 오로지 과학 학술지 문헌들만을 사료로 활용한다.
과학과 사회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종래의 과학사를 거부하며, 과학과 사회 사이의 영향관계를 규명한다면서, 정작 그가 보는 것은 아주 전통적인 과학사적 사료 뿐이다.
과학과 사회의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참조하는 사료는 과학의 그것 뿐이다.

그는 기존의 "토대와 상부구조" 모델이 그 중간 단계를 비약한다고 비판한다.
아마도 그 비판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토대"를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개인적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파스퇴르의 정치적 입장은? 위생주의자들을 추동한 인구학적 문제는? 라투르는 파스퇴르를 탈신비화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마치 당구와 같다.
파스퇴르라는 하나의 공이 다른 공들, 곧 과학자들을 맞추자, 공들은 저마다의 궤도로 굴러가서 새로운 그림을 만든다 - 대체 여기 어디에 개별 "행위자"가 있다는지 난 잘 모르겠다.

실제로 라투르가 참조하는 것은 과학자들 자신이 자신들 스스로에 대해 말한 내용들 뿐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여, 라투르가 쓴 것은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그것의 역사가 아니다.
라투르가 쓴 것은 파스퇴르주의자들, 위생주의자들, 내과의들의 자기의식의 변화의 역사이다.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가치있는 연구겠지만, 적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비유하자면, 이는 1920년대 경제지들의 기사만을 가지고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을 알아내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1920년대의 경제지들은 당대의 행위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경제에 대해 어떻게 표상했는지를 나타낼 뿐, 실제 경제가 어떻게 돌아갔느냐를 밝히지는 않는다.
예컨대 192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공황의 원인으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언급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사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오랜 가르침처럼, 보이는 것과 실재가 항상 일치했다면, 과학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글쎄, 라투르가 성공적으로 과학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밝혔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내용을 위해 책을 읽는다면, 그보다는 피터 겔리슨이나 스테판 샤핀이 더 낫지 않을까. 아무튼 실망스럽다.



덧) 번역이 정말 구리다..
번역자는 뒤섞는데, 말들의 순서를, 그리하여 문장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이렇게 만든다. 또한 비문들의 존재. 그리고, 왜, 넣었는지, 모르겠는, 쉼표들이, 많다. 이로써 방해되는 것은 읽기인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읽어내려감과 성공적인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덧2) 사실 이 책은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앞의 것은 1부 <미생물의 전쟁과 평화>고, 뒤의 것은 2부 <비환원>이다. 그러나 후자는 <실험실 생활>의 확장판 격인데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을 뿐더러, 써있는게 아포리즘식이라 읽기 싫다. 그래서 그냥 안 읽었다

니무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