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적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대단히 가식적이다. 그것은 피사체가 어떤 포즈를 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물은 어떤 주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끼자마자, 의미의 빛 속에서 포즈를 취한다.
우리는 우리 없이도 지속될 세상에 대한 깊은 환상을, 그 오랜 옛날부터 늘 가지고 있지 않았나? 인간을 떠난 세상, 너무나 인간적인 의지에서 벗어난 세상, 우리가 없는 그 세상을 보고자 하는 시적인 유혹을 늘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시적인 언어가 주는 강렬한 쾌감은 언어가 그 물질성, 글자 그대로의 해석 속에서 의미를 통과 하지 않고서,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매혹하는 것이다. 아나그램과 아나모르포즈*에서든 '양탄자 속에 감춰진 형상'[헨리 제임스의 단편 소설 『양탄자 속에 감춰진 형상 The Figure in the Carpet』(런던, 마틴 세커,1919). (영문판 주)]에서든 마찬가지이다. 언어의 소실점인 것이다.
[* 아나그램 anagram은 글자 속의 글자를 뜻하는데, 시어에서 여러 단어의 글자 순서를 뒤바꿔 새로운 글자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 하나의 예이다. 아나모르포즈 anamorphose는 형태 속의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볼록렌즈나 오목렌즈에 의한 형태의 왜곡, 보는 각도에 따른 형태의 변형처럼 겉으로 드러난 형태를 깨고 숨겨진 형태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옮긴이주)]
사진 또한 그 단어의 이중적 의미—기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양탄자 속에 감춰진 이미지'를 드러내는 자로 기능하지 않을까? 그림의 소실점이다.
---
따라서 인간 고유의 이중성이 인간을 버리면 역할이 뒤집힌다. 즉, 기계가 탈선하고 불안정해지며 변태적, 악마적, 복화술적으로 된다. 이중성은 기꺼이 다른 편으로 넘어간다. 주관적 반어법이 사라지면—그리고 그것은 디지털의 유희 속에서 사라진다.—그러면 반어법은 객관적이 된다. 또는 침묵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침묵은 오직 그 후에 왔다.
종말 그 자체가 사라졌다 ⋯⋯.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순수재미는 보드리야르가 최고
<상징적 교환과 죽음>, 좀 더 관대하게는 <유혹에 대하여> 이후로 진지한 이론이란 거죽을 벗어던지고 에세이스트를 자임해서 더 그런듯
흔히 들뢰즈-가타리의 AO를 가속주의의 원류라고들 하지만,(자본이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달려, 지옥을 건널 때까지, 자멸할 때까지)
내가 보기에 후기 보드리야르야말로 이 [통속적] 가속주의의 원류임
기호를 도발하고, 담론을 과장하며, 이 모든 유희를 치명적인 지점까지 밀어붙이기
투쟁도 치료도 생존도 아닌, 암세포 전이의 가속
(들뢰즈-가타리는 생각보다 건실함 생각보다는...
특히 말년 들뢰즈는 욕망 좋아하는 아저씨가 아니라 후기 하이데거의 회색빛에 가까워짐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하이데거를 (헤겔과 묶어) 비판할 때조차 단순한 이론적 거리두기나 윤리적 심판 대신
사유의 토폴로지, 정초 불가능성, 탈영토화를 열어젖힌 선각자였음에도
본향, 민족, 서구에 대한 집착으로 되돌아갔다는 실망감과 배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냄
라이너 쉬르만의 하이데거 독해, 요컨대 아나키-하이데거를 노년 들뢰즈의 희미한 존재론과 겹쳐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듯
검은 숲 속 오두막으로 떠나는 구도자 대신 뱀의 원환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실패할 운명에 처한 병든 탐정)
보드리야르 후기 번역이 있던가? 해외에서 추천하는 텍스트들은 없거나 절판이던 것 같은데
도서관 쌀먹
내가 보기에 후기 보드리야르야말로 이 [통속적] 가속주의의 원류임 < 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