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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문열을 처음 접했던건 아마 중학교 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였을것이다. 어쩌면 얼마 되지도 않은 고등학교였을지도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그다지 좋은 만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때 감상문인지 뭔지를 적을 일이 있어 도서관에 방문했던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이 작품 사이에서 3초간 고민하다 더 많이 진열되있다는 이유로 일그러진 영웅을 골랐고, 다 읽고 난 다음엔 그 선택을 후회하며 국문학 파는 일을 접어두게 되었다. 


 인기 많고 유명한 데미안, 인간실격 등의 작품들은 도서관에 서너권 정도를 구비해놓기 마련이고, 이문열의 대표작으로 이름 날렸던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이 세 작품을 전부 다 싫어한다. 태생부터 이미 글러먹은 것이 아닐까.


 여튼 당시 우연찮게 도서관 한 켠에서 표지의 빨간 빛을 자랑하며 서 있었던 칼의 노래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채 비슷한 작품을 찾아다니던 내게, 이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졌던건 어쩌면 필연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단 그냥 순수히 매력을 느낄 수 없었던 점에서 그랬을 것이다. 김훈이 충무공의 심정을 찬란하고 비정하게 그려냈듯이, 그 건조함을 완벽하게 제 색채로 채워냈던 것과 달리, 일그러진 영웅엔 인상 깊은 작품으로 느낄만한 뚜렷한 매력점이 없었다. 참 잘쓴 글이지만 동시에 모난 글이라고,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 이후로 처음 읽는 이문열의 작품일 공산이 큰 이 단편집들, 홀린듯이 생각나 홀린듯이 사게된 그 단편집들은 책장 속에서 채워지고도 몇달 간 방치되어있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읽을 시간이 나 펼치게 되었다.


 2시간 동안 읽다 절반쯤 지났을까. 살포시 책을 덮게 되었다. 그리고 나지막히 인정했다. 직전까지 읽었던 작가가 박상륭, 이문구 같이 특출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문열은 그 사이에서도 제 광채를 밝힐 정도로 뛰어난 작가라고.


 서문에서 이문열은 그의 때늦은 등단을 겸허히 난산이라 표현하였지만, 자식 같은 결과물은 단순히 난산으로 표현된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리라. 그런 겸손에도 뜻 깊은 글자를 차마 속일 수 없어 읽기 좋았다.


 물론 내가 최고를 넘어 지고로, 어쩌면 박상륭 이상으로 치는건 김훈의 건조한 문체긴하지만, 이문열도 못지 않았다. 이쪽은 특출나게 문체가 기깔난다기보단,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이문열만의 장점을 모르겠다. 내가 구체화해서 서술하지 못하는 일일지도 모르니, 난 그냥 쉽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점을 꼽을 것 같다. 


 이문열이 다루고자 하는 구조적 폭력이 각 소설에 흩어져있다는 점과, 그걸 알아도 크게 질린다는 인상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제에 관한 능숙한 변주가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자가 복제적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만큼 같은 내용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지를 고민하는게 그 역량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선 이문열은 분명히 일류다. 


 아쉽게도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품이 그런 류의 주제를 깊게 다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관련한 요소가 없진 않지만, 동 단편집 내의 들소나 세하곡 같은 작품에 비하자면 한 줌이 섞여들어간 정도다. 그러한 이유로 필론과 돼지가 단편집의 타이틀을 장식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은데, 필론과 돼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맞닿은 점이 많은 작품이기에, 그래서 그런지 난 별로였지만, 두 작품에 비해 훨씬 더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절대 필론과 돼지가 모자란 작품인건 아닐테지만, 일그러진 영웅이나 이 작품이나 이젠 너무 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그보다 인상 깊었던 작품 하나를 꼽아 소개하고자 한다.


 위에서 말했듯 편히 읽을 수 있었던 작가였기에, 결국 단편집의 모든 문장에서 이문구가 공산토월에서 '나는 울었다' 라는 그 탁월한 감상을 발휘하듯 마무리하는 것처럼 지극한 특별함을 발견하긴 어려웠으나, 적어도 이 소설만은 내게 감상을 쓰라 부추기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단편집은 그 전체를 읽고 좋아하는 작품을 꼽아 적었지만, 심지어 이것마저 쓰다 귀찮아서 다시 지웠었지만, 어떤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전집의 서두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 우연은 아닌듯해 급하게 다시 적고 있는 실정이다. 이 또한 이문열이 그리고자 했던 젊은 날의 방황일 것이다.



<그 해 겨울>


 

 그 해 겨울 같은 작품은 적지 않다. 그 옛날부터 방황은 젊은이들의 고유한 권리였고, 그 권리를 다룬 법전은 국문학 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 속에 다양하게 포진되어있다. 


 국문학에서 이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건 이승우의 <생의 이면>이였다. 두 작품 모두 고독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갖지만, 생의 이면은 부끄러운 사랑을 노래했고, 이 작품은 내면으로의 침잠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갖는다. 


 작품이 시작될때 화자는 절제와 여과를 거쳐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의 부끄러움을 알게되었다는 말을 꺼내는데, 그 말처럼 작품 내에선 읽는 이에게 씁쓸한 인상을 남기는 미문이 자주 등장한다. 그 씁쓸함은 독자로 하여금 미진함에서 나오는 아쉬움보단 차를 먹는 듯한 말끔한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편이였기에, 이런 차분하고 수수한 글을 찾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그 해 겨울의 초반부는 좋게 말하면 점잖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다. 권태로 인해 도망나와 술집에서 시동 역할이나 하는 내용이 수십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어디 수도 나온 노인네마냥 점잖게 표현되는 구석이 있어 묘한 감상이 들었다. 


 그 해 겨울은 절반이 지나고서야 본격적으로 제 색채를 펼쳐내기 시작한다. 술집에서 다양한 인연을 만난후 시작되는 본격적인 방랑. 풍경에 대한 감상은 길고 길지만, 사람 군상에 관한 표현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건 짤막하기 그지없다. 후자에 주목해야하는건 그러한 이유에서다. 전자는 펼쳐주기에 알기 쉽지만, 후자는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표현되기에 알기 어렵다.


 자유에 한껏 들뜬 주인공은 이제 어딘지 모를 길을 걸으며 다양한 이들을 만나 때론 절망하고 때론 웃으며 천천히 인생을 향유한다. 언제는 기쁨을 느끼기도, 수치를 겪기도 하면서 그는 자신보다 빠르게 절망해본 사촌 누나를 만나게 된다.


 주인공보다 빠르게 절망을 겪게된 그녀는 진실하게 절망해볼 것을 권유한다. 다만 그녀의 애정 어린 조언이 스산한 일로 느껴지던 까닭에, 그는 진실하게 절망함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하려 노력하진 않는다. 그저 그녀에게 인생을 살아가라 담담히 되받아칠 뿐이다.


 주인공은 이제 거리를 나다니며 소주 한 병을 까기도 하고, 다음 날엔 지독한 외로움에 홀로 떨기도 하며 길을 걸어나가는데, 이는 일찍이 박상륭이 죽음의 한 연구에서 더 나은 방식으로, 더 깊은 형태로 묘사했던 서사를 연상시킨다. 


 그러다 그는 창수령에서 아름다움의 실체라 표현할 정도의 광경을 맛보게된다. 작가도 여기서 정돈해두었던 미문을 풀어헤치며 그 아름다움을 길게도 찬미한다. 광경에 감동받은 그는 이제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음을 느끼는데, 아마 여기서 우자의 개심으로 끝났다면 문장을 아무리 잘쓴다해도 그건 정말로 진솔하지 못한 일이였을 것이고, 이문열을 이류 작가로 떨어트리는 일이였으리라. 그렇지 않았기에 이 작품이 비로소 의미있는 것이다.


 그 모든 광경에도 주인공을 덮치던 권태는 사라지지 않는다. 애초부터 이 삶은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깊은 불안감에 휩싸일 뿐, 아름다움마저 다시 그를 사지로 내몬다. 그리할적에 만나 그를 구하는 이는 저와 같이 방랑하던 젊은이,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그때의 마음을 품고 있던 늙은이였고, 그는 자기보다 훨씬 열정적이게 제 흉악한 계획을 설명하고 떠나간다.


 온갖 혼란스러움에 휩싸인 그는 목적지와도 같은 바다를 만나 다시 한번 짧지만 깊은 절망을 겪는다. 이제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소진되었음을 깨닫고, 복수심에 불타던 그 노인네가 내뱉은 내 오랜 망집을 버렸다는 한 마디에 제 망집 역시 던져버리기로 결심한다. 우울하게 곪아버린 병환을 퀘퀘묵고 부끄러운 감상에 싸서 그렇게 저 먼 바다속으로 집어넣은 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기찻길에 오른다.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곳곳에서 미숙함이 가득 엿보이는, 그렇지만 성숙한 어투로 적힌 이 글은 단연 특이하다. 위에서 말했던 생의 이면은 그 어투마저 어리숙했던 반면, 이 작품은 기묘할 정도로 능숙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렇지만 젊은 글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날에 느끼는 인간상의 고독, 어느 날은 즐겁다가도 다음 날은 절망 속으로 빠져가는 사람의 권태와 변덕, 그런 것을 이 작품은 꽤 솔직하게 조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제 알량함과 미진함을 천천히 술 한 잔에 털어내리듯, 아름답게도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이런 글이야말로 젊은 어리숙함을 깊게 표현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다만 그 모든건 젊었을때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좀 더 성숙해지고 나서 과거를 돌아볼 적에 평할 수 없는 이야기, 그렇기에 이 작품은 아마 30대의 이문열만이 적을 수 있는. 젊으면서 성숙한 모순된 작품이 아니였을까.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절망이다. 작품의 등장인물도 절망해보길 권하고, 주인공 스스로도 절망하길 원하며 서사는 진행된다. 막바지 그는 바다에서 진실한 절망으로 보이는 일을 겪으며 어느 정도 반추한다.


 다만 진실한 절망은 그것이 끝나고나서야 왔음을 깨닫기 마련이라는걸 생각해보면, 특별한 무언가를 통해야 하는 진실된 것이 아니라 그냥 수 많은 절망 중 하나가 와닿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인 것을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진실로 절망하게 되는건 바다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앞서 겪은 일 중 하나 일수도 있고, 이 작품이 끝난 뒤의 일에서일지도 모른다. 경험을 통해 개심하여 미래를 꿈꾼다는 이야기는 너무 낙관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집을 버리기로 결정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 눈 덮인 겨울날이 아니라 복숭아 꽃 피는 봄날이였다는 점에서, 무채색 안에 곱디고운 벚꽃빛 자수 하나 흘러 들어갔다는 점에서, 이 방랑은 여기서 끝맺음 지어져도 제법 괜찮을 것이다. 방랑이란 온기 서린 단어는 무엇보다 다음번의 방황을 위하여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젊은 날의 초상 연작 중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작품이라는데, 초기 작품이라는 것과 젊은 날의 방황이라는 주제를 생각해보면 앞의 두 작품도 함께 읽고 나서 하루키의 양 3부작과 비교해봐도 괜찮을 성 싶다. 물론 이 작품이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무척추동물 하루키는 가볍게 접어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감상을 마무리하는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차라리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가 더 내 입맛에 알맞은 작품이 아니였나 싶다. 나는 이렇게 스러져가는 것들에 관한 장송곡이 마음에 든다.


 또 쓸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감상은 마무리를 적기가 참 힘들다. 앞에서 온갖 잡설을 적어갈땐 괜찮다가 마지막을 장식할때가 되서야 오글거리는 문장이라던지, 비문보다 못한 불완결된 문장이라던지 하는 것들의 후회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마무리지을 꽤 괜찮은 어구가 있으니, 동단편집에 수록되어있는 맹춘중하에서 나오는, 이 세상 사는 것(生於此世上),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樂乎).



ㄹㅇ 단편전집은 다 읽고 쓰는 편인데


그 해 겨울은 개재밌어서 써왔음


쓰잘데기없이 길지만 무려 세 번의 변천사가 있는 감상임


아 감상 하나 하나 다 써야지 > 귀찮음


아 그럼 두 작품만이라도 써야지 > 피천득 수필이 너무 재밌음


아 그럼 그 해 겨울만 쓰고 도망가야겠다 > 술마시면서 수정도 없이 문장 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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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감상은 술마시고 쓰는게 진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