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란 용기, 경건함처럼 굉장히 추상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영역에 다가가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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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좀 더 피상적이고 쉽게 와닿는 것을 물어보자. 눈앞에 있는 여자는 무엇인가? 지헌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대답할 지도 모른다. 제 예쁜 아내입니다. 그러면 이때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아야한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여자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아니며, 외양을 물어보는 것도 아니었는가? 질문받는 당사자와의 관계나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물음도 아니었던가? 그러면 눈앞의 여자가 무엇인지 묻고 답하는 과정은 근본적으로 무얼 위함이었나?


절제란 무엇이오?

(절제 또한) 무언가에 대한 앎입니다. 그러면 앎이란 무엇이길래 앎이라고 말합니까?



찰스 칸은 아포리아적인 대화편에서 세가지 주장을 정리한다.

1)모든 종류의 앎은 반드시 특정한 대상에 관계되어 정의되어야 하며, 자신에 관계되어 재귀적으로 정의되면 안 된다.


2)가장 유익한 종류의 앎은 좋음과 나쁨을 그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3)그런 앎이 도시를 지배할 수 있을 경우에만, 도시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어, 그들에게도 도시 전체에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3번 논의는 대화편이 모여 <국가>를 빌드업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므로 지금은 넘어가자.


<카르미데스>는 앎에 대한 앎이라는, 극도로 어려운 앎 자체에 대한 논의를 아주 잠깐이나마 하게된다.


168e~169a

-다시 들음과 봄 그리고 나아가 운동도 자체가 자체를 운동케 하며, 열도 열을 내게 하거니와, 다시 이와 같은 것들 모두가 어떤 사람들에겐 불신을 초래하겠지만, 반면에 어떤 사람들에겐 아마도 그러지 않을 것이오 친구여, 그야말로 큰 인물이 요구되오 누구든 이 문제를 모든 것과 관련해서 충분히 가려 줄 인물이 말이오. 사물들 중에서 그 어떤 것도 그것 자체가 자체에 대해서 자체의 힘을 천성으로 지니고 있지 못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만 그 힘을 지니도 있는지, 또는 일부는 그 힘을 지니고 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한지를 가려 줄 인물 말이오.-


-그리고 다시, 만약에 무엇들이건 그것들 자체가 그것들 자체에 대해 그런 힘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이것들 중에 앎이 포함될 것이니, 바로 이것을 우리가 절제(건전한 마음 상태)라 말하오.


-나로서는 이 문제들을 스스로가 능히 결정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오. 이 때문에 앎의 앎이 있을 수 있겠는지에 대해 나는 장담할 수 없으며, 설령 그게 응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게 절제인 걸로 받아들이지도 못하오. 이런 것인 어떤 것이 우리를 이롭게 할지 아니 할지를 우리가 검토하기 전에는 말이오. 그야 물론 절제야말로 유익하고 좋은 것이라 나는 예측하기 때문이오. 그러니 칼라이스크로스의 자제여, 그대는 절제를 이것이라, 곧 앎의 앎이며 더 나아가 알지 못함의 앎이라 간주했기에, 첫째로 지금 내가 말한 것이 가능함을, 그 다음으로 그 가능함에 더해 유익하기도 함을 증명해 보이시오. 그러면 절제와 관련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대가 옳게 말하는 것으로 나도 아마 만족시킬 것이오.-



누군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런 질문의 의도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무지한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었다.

좀 더 생각을 뻗어나가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앎의 유무를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전에 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테니,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난문은 결국 되물음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말한대로 철학하기 이전에 삶이 있다.




171d~172a

-크리티아스여! 절제가 이러한 종류의 것이라면,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처음에 가정했듯이, 만일 절제 있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알고 또 그 사실을 알며,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또 그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만일 그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절제 있음은 우리들에게 정말 큰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네. 절제를 지닌 우리들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서 삶을 영위할 것이고, 우리에 의해 지배받는 다른 이들도 그렇게 되겠지...

절제에 의해 지배될 때, 집안일은 잘 꾸려지고, 국가는 공적인 일들을 잘 수행할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일들도 그럴 것이네.

왜냐하면 잘못은 제거될 것이고, 올바름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지. 또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모든 행위를 훌륭하게 할 것인데, 그 때문에 또한 행복하게 될 것이네.-



이렇게 앎에 대한 대화편은 계속해서 <국가>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앎에 대한 길고 긴 논변은 <프로타고라스>로 이어진다.

다음 주는 <프로타고라스 1>입니다.

'328d - 프로타고라스는 이런 장광설로 뽐내고선 자신의 말을 멈추었네 (박종현 역)' 까지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