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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은 그가 살던 시기의 근대성modernity을 들뢰즈와 유사한 방식으로 포착했다. 바우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그 들뢰즈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하는 편이 나을테다. 전기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비롯해 수많은 고정된 개체가 사실은 분열 가득한 기계들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안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둘러싼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가 사실 우연적인 플레이스홀더에 불과할 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체가 그보다 더 다양한 욕망들로 분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애초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 해석될 수 없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욕망의 과정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지도에 맞춰 재영토화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 <천 개의 고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분열증적 주체가 인간 개인 뿐 아니라 사회와 자연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다양한 예시들을 들고 왔으며, 그 어떤 고정된 것도 굳건하지 않다는 강력한 주장을 개진했다. 그리고 이 분열의 힘은 들뢰즈에게 서서히 두려운 것으로 변했다. 후기 들뢰즈의 <통제사회에 대한 후기>는 이 분열증적 사회가 어떻게 단단한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대신 그 어떤 규율도 한정되지 않는, 일상적이고 안밖 경계가 없는 범-통제적 사회가 되었는지를 짧게 논한다. 그것은 얄궂게도, 자신의 자식을 두려워 하는 아버지의 모습과도 같았다.



사실 그런 반응이 이상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전기 들뢰즈가 분열증적 사회에 제시한 삶의 방식은 더 이상 68혁명의 맥락에 있지 않았으니까. 들뢰즈는 가타리와 있을 때조차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반-좌1파적이고 자본친화적이었다. 분열하는 주체에 대한 분석은 생물학적 개인보다는 법인격과 같은 사회적 개인에 더 적합했고, 기업가들은 들뢰즈의 유목민적 삶, 노마디즘을 낚아챘다. 늘 욕망을 쫓아 움직이며,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늘 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벼운 몸. 그 몸에서 어느 기관도 진정으로 핵심적이지는 않으며, 언제고 몸 안에서 서로 삐걱대는 기관들은 다른 하나를 떼어놓거나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 들뢰지언 정치철학과 기업 경영철학 사이의 친연성은 단순한 오용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분명하며, 사회정치적 함의와 민중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분열증적 자본-기계는 바로 주식회사가 된다. 모든 걸 녹여내는 들뢰즈의 분열증적 분석에서 욕망의 강도는 욕망의 돈으로 치환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 않은 논리를 보여준다. 돈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을 돈으로 교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욕망/의지의 절대적 근원성을 믿는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면 더더욱.



바우만의 <액체근대>는 이런 맥락에서 후기 들뢰즈의 통제사회 기획을 더 분명하게 이어나가는 듯한 책이다. 액체근대의 주역은 기존의 고체근대를 지배하던 정주민이 아닌, 유목민이니까. 유목민이 살아가는 액체근대는, 모든 것을 자본의 이름으로 탈영토화시켜 인적자본, 물적자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실제로 교환 가능한 사회적 가치를 책정하는 흐물흐물한 사회다. 국가, 사회, 가정, 그 어떤 단단한 것도 본질적으로 고정될 수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자본의 흐름을 진정으로 막아세울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고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이 자본만큼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파도 위에서 국가는 언제든 부도날 수 있고, 사회는 비용을 써서 억지로 자본의 흐름을 막아주고 있을 뿐이며, 가정은 빚 앞에서 늘 해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액체근대는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사실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그리고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를 사회에 가깝다. 굳건한 방벽을 세우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취급받으며, 세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주민들의 사회는 세계를 유영하는 유목민들에게 약탈당한다. 그것이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군사적 개입이든, 고정환율제를 향한 경제적 개입이든, 이 유목민들은 경계를 부숴버린 다음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 챙길 것을 챙긴 뒤 떠난다.



물론 유목민들은 그저 시대를 너무 잘 따를 뿐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딛고 있는 땅이 매우 불안정한 액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자기들이 조금만 더 무언가에 애착을 가지고, 몸을 무겁게 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다면 자신 역시 이 액체 속으로 가라앉으리라는 믿음. 그렇기에 이들은 스스로를 분열증적 개인으로서 분리하는 데에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는다. 옛 기업이 정해진 땅에서 핵심 공정을 위한 공장을 세우고 그 공장에 오는 노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했던 것과 달리, 새 기업은 다양한 지역에 제조 공정을 분산시키며 각 공정의 노동에 너무 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그저 비슷한 일을 더 싸고 효과적으로 잘해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매번 자신이 발 디딜 곳을 바꾼다. 언제든 자신의 사업 상품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유목민들의 자신감이다. 쿠팡이 '쿠1폰'이라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는 이름을 전혀 바꾸지 않았는데도 쿠팡에게서 티켓몬스터와 경합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이 회사라는 개인은 어떤 의미로는 입체적이고, 어떤 의미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마치 유령 같은 이들을 붙잡을 수단도, 책임을 물을 방법도 없다. 



그러나 바우만의 진단에는 사실 빠진 것이 있다. 이 자유로운 기업가들은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같은 액체 속에서 늘 자유롭게 유영하고 다녀야 하는 개개인에게 물어보더라도, 이 불안정함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늘 자신의 직종을 바꾸고 거주지를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이 행복한 삶으로 여겨지려면 세대가 지금보다도 더 바뀌어야 할 테다. 그리고 이 액체는 각각의 분자들이 서로와 너무나 밀접하게 엮여 있어, 그 모든 것에 하나하나 부딪혀야 하는 무한 경쟁의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다.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근세 유럽의 자본주의를 분석한 틀을 가져오자면, 자급자족의 물질세계 위에 좁은 공동체 내에서 서로 비슷한 정보와 권력을 갖고 물질을 거래하는 시장경제가 있다. 이 공정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가 서로를 속일 수 없고, 안 좋은 품질의 상품을 팔아치우는 게 힘든 만큼 가격을 후려치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 더 이상 판매자와 구매자는 동등한 처지에 있지 않을 때가 많아지는데, 서로 흩어진 지역의 사람들과 거래하는 한 명의 상인은 이들보다 더 많은 정보와 우월한 처지를 이용할 수 있고, 불공정한 거래가 시작된다. 그것은 대체로 특정 자원의 독점과 함께하며, 이렇게 독점시장, 곧 자본주의가 시작될 수 있다. 곧, 자본주의의 핵심은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있다.



이러한 시각은 꽤나 널리 퍼져 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은 이 '창조적' 독점에 바치는 송가에 가깝다. 틸은 액체근대의 무한 경쟁 상태를 혐오하며, 경쟁적 시장에서 이윤을 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끝까지 고수한다. 기업가 정신은 오직 자신만이 파악해낼 수 있었던 새로운 시장을 발견/발명하고 그 안에서 다른 누구도 경쟁할 수 없을 정도의 우위를 거두는, 독점 시장의 창출과 유지에 달려 있다. 곧, 성공한 기업가란 이 끔찍한 액체근대의 바다 위에,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높은 첨탑을 세우고 그 위에서 버티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바우만의 유목민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즐기지 않는 유목민이다. 그가 첨탑을 버리는 날은, 오직 그 첨탑이 허물어지기 시작해 언제든 독점 상황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뿐이니까. 그는 결코 이 불가능의 산을 오르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으며, 실제로 그것이 그리 쉽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제로>의 대부분은 이 독점 시장의 창출이 얼마나 드물고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할애되며, 그러나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가까운 주문을 거듭 읊는다. 실제로 그 드문 일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일어난다는 자연주의적 믿음 역시 <제로>에서 빠지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 정주민과 대비되는 유목민보다는, 문어가 액체근대의 바다에 더 적합한 설명틀이지 않나 싶다. 프랭크 노리스의 <문어>는 일종의 기차 분산망으로서의 자본-기계와 그 기계의 화신으로서의 기업가를 그리는 자연주의 문학인데, 자본의 자연법칙은 결코 한 개인을 막아세움으로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확히 같은 일을 하는 또 다른 기계-화신이 필히 그 자리에 다시 자라나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의 기업가-문어는 그 스스로를 자본-문어의 한 다리로 보는데, 그는 문어의 다리가 그렇듯 그 자체로 병렬적으로 행동하며 지능을 갖추고 있지만, 그 다리 하나만으로는 전체 시장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고, 자신의 책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전체 몸체로부터 분리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늘 자신이 오를 수 있는 첨탑을 찾아 자식을 비롯한 다른 문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바다를 유영하며, 충분히 굳건하다고 생각하는 첨탑을 찾을 때까지 그 어떤 곳에도 미련을 주지 않는다. 정주민이 되고 싶은 유목민. 그러나 진정으로 정주민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정주를 신뢰할 수 없는 유목민. 그런 문어들의 바닷속에 산을 세우는 일은, 문어들 스스로 믿듯 불가능한 산을 세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