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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살불살조 (殺佛殺祖)의 미학.
간단히 요약해서 이걸로 보였음.
불교 특유의 인식론적인 사고관을 문장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거임...
독자가 이걸 읽으면서 계속해서 금각사가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미시마의 실험과 야심은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임...
'금각사'라는 한 대상이 한 인식주관의 심리 상태와 처한 상황에 따라 어떻게까지 다르게 보이는가??
또 일관된 심리적 태도와 서술 태도를 유지한다면 그 천변만화하는 숱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한 대상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
대충 이것을 문장으로 증명하는 느낌이었고 사실 서사 자체는 크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음
미조구치라는 인물은 저 일종의 미학적 실험을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 애초에 이 인물의 서사로 무언가를 암시하거나 표현하거나 설득하겠다는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고 인물에게서 아무런 공감도 느껴지지 않음
그냥 미조구치는 금각사 발사대인 거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건강한 것, 치열이 가지런한 것, 피부가 맑은 것, 남자는 목소리가 남자답고 여자는 목소리가 여자다운 것, 푸른 것, 밝은 것, 힘찬 것
이런 것들을 인간은 직관적으로 '아름답다'라고 느끼지만, 사실 이 모든 가치는 성선택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달된 우연적이고 가치없는 직관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원생림의 벌레는 피부가 더럽고, 울음소리가 장송곡처럼 우울하고, 악취가 역겨우며 눈알이 수십 개의 곁눈인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지도 모름
그 벌레들에게 언어가 있다면 '아름답다'라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역겹고 더러운 대상을 지칭하는 데에 쓰일 것임
그렇다면 육체를 떠난 언어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이고 지고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영원불멸한 절대적인 미라는 것은 존재하는 걸까?
언어를 통해 존재는 그 절대성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순수철학이나 인식론의 영역에 닿게 되고, 이게 불교가 서양철학에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이며 또 미조구치는 중이라는 점이 흥미로움
'금각사'가 계속해서 탐구하고자 한 것은 이 문학적 지평이라고 나는 느꼈음
미조구치는 저주받은 사람임
금각사를 절대적인 미로 숭배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았음
그 아버지는 선량했으나 망해가는 절의 가난한 중이었고 어머니는 불륜(인지 매춘인지 정확하게 묘사가 되진 않지만)과 같은 성적 부정을 저지르는 역겨운 인간이었음
이 처량한 빈곤과 가난 때문에 미조구치가 혹시 불교와 절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증오하게 될까봐, 아버지는 계속해서 '금각사'의 환상을 들려줬음
세상 어딘가에는 이 쓰러져가는 절과 다르게 날마다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타오르고, 수많은 선승들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입에선 미음 냄새를 풍기며 곧은 글을 짓고 염주알은 얼음처럼 청렬한 절이 있노라고, 되풀이해서 전해줘야 했음
그것은 십자군에 나서는 농노들이나 지하드에 나서는 노예들이 천국의 존재를 강제로 주입받는 것과 거의 같은 구조였으나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천국이 약속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멸한 구1원도, 나팔 부는 천사도 없었으므로 아버지가 전해줄 수 있는 것은 '미' 뿐이었음
오직 금각사의 '아름다움'으로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을 견뎌내고 살아가라고 설득해야 했던 것임
그 유년 때문에 미조구치에게 있어서 금각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워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음
그렇기에 금각사는 끝없이 미조구치의 앞에 환영처럼 솟아남
학교에서 역사의 공부를 하던 날에 금각사는 그 숱한 위인들이 경애해마지않는 존재로, 그 해묵은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변함없이 세파를 견디고 선 꿋꿋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솟아남
실제로 금각을 보러 간 날, 망상과 다르게 금각사가 그저 바람에 삭아가는 흔한 목조물에 불과함을 꺠달았을 때에도, 이윽고 연못의 잔영과 별하늘의 조명 아래서 금각은 또다시 스러져가면서도 자애롭게 까까중들을 보살피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솟아남
공습이 쏟아져 세상이 불타는 날에는 금빛으로 환하게 만물을 밝히며 처마에 놓인 봉황이 드디어 풀려나 먼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으로 아름답고, 또 연못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전각이 어둠에 삼켜졌을 때에는 신비롭고 상서로운 모습으로 아름다움
미조구치는 친구의 죽음과 철학적 방황으로 인해 점점 더 파멸에 가까운 길을 걸어가지만, 그 모든 마음 속에서 금각사는 항상 '아름답다'고 인식의 결과가 고정되어 있는 것임...
최후에는 금각사라는 것이 그저 가련한 나뭇더미에 불과하고, 그 절의 주지가 된다는 것은 금각사의 미를 소유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저 금각사의 관람료로 떨어지는 연간 500만엔의 수입을 얻는 것에 불과하며, 그 돈으로 젊은 중에게는 식은 밥을 먹이면서 본인은 긴자의 고급 술집에 드나드는 주지스님은 금각에 어떠한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머니가 자신이 금각의 주지가 되길 바란다고 했던 것은 그저 그런 세속적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미조구치는 금각사의 대1웅전을 아름답게 느낄 수밖에 없었음...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불교에 살불살조라는 말이 있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무언가 진리를 찾아 궁구하던 길에 '이것이 부처의 본의인가' '이것이 조사께서 이른 길인가' 같은 생각이 들면 그 즉시 부정하고 죽이라는 거임
왜냐면 그것은 부처의 생각이 아니고 또 조사의 생각도 아니며, 사실 본인의 생각이기 때문임
본인이 본인 자신의 왜소함과 직면하기 싫어서, 또 스스로의 것이라고 말하기 두려워서 조사든, 부처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려 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임
미조구치에게는 그 부처와 조사가 금각사였음
그래서 금각사를 죽이려고 한 것임
왜냐면 자신의 모든 미적 탐구와 궁구의 끝에는 항상 금각사가 솟아올라서 그 모든 과정을 찬탈하고 결과로서 아름다워버렸기 때문임....
미조구치라는 인식 주관의 주관성을 찬탈해버린 금각사라는 독재자를 죽여야만 미조구치는 비로소 존재를 회복할수있음..
그래서 결말이 그렇게 난 것이라고 생각함...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아름다움은 인식 주관의 성향에 따라 결정됨
사형수가 전봇대가 늘어선 밤거리를 보고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그 형상이 교수대를 닮았기 때문임
여기서 작가는 이걸 비틀어서, '인식 주체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아름답다고 느끼는 어떤 존재'가 고정되어 있고, 그 인식 주체의 상황을 계속해서 변화시키면서 문장적 기교를 통해 그것을 독자에게 납득시켜보면 어떨까.
독자가 그 모든 묘사와 문장에 납득해서 계속해서 금각사를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나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인 '미'의 절대적 구현을 불완전하게나마 성공한 것이 아닐까?
대충 이런 생각을 했다고 나는 느꼈음...
암튼 그 과정에서...
문장가로서의 미시마 유키오에게서 배울게 많다고 느껴서 나는 만족하고 덮었음...
타르코프스키적 정서 표현이라고 해야 하나
미조구치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금각사라는 외부사물의 정경에 은밀히 상징군을 형성해가면서 분위기를 조성해서 심리를 표현하면서 또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도록 독자를 설득하는 그 기술이 대단하다고 느껴슴...
난 그냥 금각사라는 소설을 쓰가루 석별 사양 이런거 읽다가 '금각사 묘사를 잘하는 소설이있대' 해서 봤기때문에
그 양반이 그런 정치적 배경이나 개인사적 배경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읽엇삼...
근데 그런 외부적 선입관이 끼면 이런 식의 독해랑은 영 딴판의 독해가 됐을듯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읽은 덕분에 미시마를 만나면 미시마를 죽인다(진짜배갈라서죽음)마인드로 읽은것과비슷한 어떤 감상이되었다고생각함..
아는척 꾸역꾸역하려는게 역함
잘 읽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