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mine quo vadis?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는가? 베드로가 예수를 보며 물었던 질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은 무엇이며, 어떤 쪽이 올바른 방향인지, 어떤 것에 의존하며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아가기는 하는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베드로는 다행히 이 질문에 답을 받고서 따랐지만, 우리에게 답을 내려줄 존재란, 예수란 없다. 이 답 없는 질문에 바보처럼 굳고서 고민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이런 방황에 대해 다룬다. 오뒷세이아의 긴 항해기가 신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것은 인간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율리시스와 오뒷세이아는 테마를 공유하면서도 내막은 다르다. 아버지를 찾아 헤메는 텔레마코스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정작 친부는 있는 스티븐 데덜러스가 되고, 신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방황했던 오뒷세우스는 자발적으로 방황하는 리오폴드 블룸이, 가정에 충실한 아내 페넬로페는 불륜으로 문란한 몰리가 된다. 이 어긋난 오뒷세이아는 이야기의 골격부터가 바뀌어 진행된다.
스티븐 데덜러스는 작가의 전작 젊은 예술가의 초상 속 주인공이다. 그는 실패하고서 돌아온 패배자에 가깝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것에 낙담하며 동시에 자기합리화를 하는 인물이다. 그가 15장 키르케에서 어머니의 환영을 보고서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난동을 피우는 장면과 1장 텔레마코스에서 내보이는 의식의 흐름이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 장면일 것이다. 그는 인정이 고프다. 예술가로서 실패한 귀한과 주변의 무시에 그는 넌더리가 나 있다. 3장 프로테우스는 이에 기반한다. 그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는 고독이 엿보인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멸시하는 족속들과 어울리며 얕잡아 보여도 참고 넘기는 것이다. 그의 친구 벅 멀리건이 제 어머니한테 스티븐을 어머니를 죽인 놈으로 설명했음에도 그는 애써 우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는 내심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기도 한다.
리어폴드 블룸은 본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오뒷세우스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신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방황했던 오뒷세우스와 달리 자발적으로 방황한다. 몰리의 불륜에 일부러 집을 비우며 도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것은 유일한 아들 루디가 죽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14장 태양신의 황소들에서 자신의 친구 사이먼의 아들인 스티븐을 아끼는 것이라 묘사된다. 16장 에우마이오스와 17장 이타카에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몰리는 블룸의 아내로 페넬로페에 해당된다. 그러나 다른 것은 역시 정절이다. 몰리는 보일런과 불륜을 즐기고 있다. 또한 성교도 마찬가지다. 또한 그녀는 성교를 즐기는 문란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심지어 스티븐과 관련해서도 그런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추억은 블룸에 관한 것들이다. 불륜을 하나 가장 아끼는 것이 블룸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블룸과 관련되어서는 그녀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블룸이 젊을 적 행한 진심 어린 사랑은 그녀에게 있어 행복한 추억이며, 블룸이 다른 여자와 관련될 때는 질투를 내보인다. 그녀가 블룸에 관한 시선은 다름 아닌 불륜에서도 드러난다. 그녀가 임신에 관해 내보이는 상상 가운데 블룸의 아이를 갈망하기는 하여도 보일런의 아이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 그녀가 어째서 불륜을 저지리는가에 관한 의문이 든다. 그러나 17장 이타카에서 확인이 가능하듯 블룸과 몰리 사이의 아이 루디가 죽으면서 관계가 틀어진다. 루디가 죽은 후로 그녀와 블룸 사이엔 성관계가 없어진다. 몰리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 느껴 불륜을 하고, 이에 블룸도 보복성 불륜을 한다. 이에 대한 잘잘못은 가리지 않겠다. 그러나 블룸도 불륜을 하며 15장 키르케에서 내보이듯 내심 죄책감을 가지고 몰리도 불륜을 하며 18장 페넬로페에서 보이듯 블룸을 아끼고 그리워한다. 다만 그럼에도 이 파국적 관계에 서로 끔찍한 생각들을 떠올린다. 블룸은 17장 이타카에서 보이듯 이혼을, 몰리는 18장 페넬로페에서 보일런과의 도피 생활을 그리기도 한다. 이 복잡한 관계는 율리시스가 단순한 문학적 패러디만이 아닌 하나의 독립적 작품으로써의 역할도 한다.
이렇듯 주역 인물들이 내보이며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또 다른 풍조가 보여진다. 그것은 혐오다.
21세기에 들어 반유대주의에 관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이후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도덕적 가식을 부리며 반유대주의를 감추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드레퓌스가 억울하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받은 이 사건은 유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혐오를 감춘 채 그저 가식을 내다보이며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 명확해진 사건이라 볼 수 있겠다. 이 반유대주의는 놀랍게도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있었고 나치 독일에서 그것이 최악을 향한 것일 따름이다.
20세기의 전쟁은 가히 민족주의와 혐오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망할 파시스트와 나치 독일, 일본군 등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도 그것들은 죽지 않고 KKK 등의 혐오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21세기인 지금도 다른 형태로, 혹은 같은 형태로 남아 떠돌고 있다.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와 반유대주의는 작품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디지 교장, 시민 등, 사실상 모든 장에서 등장인물들을 통해 드러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혐오를 위해 한 장을 할애한다. 12장 키클롭스를. 오뒷세이아의 키클롭스가 굳이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나 사람을 먹는 것처럼, 우리 또한 혐오를 하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혐오를 한다. 20세기의 다른 걸작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언급됨에도 그것이,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것은 주목받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은 실컷 즐기고서 모르쇠를 할 뿐이다. 이처럼 키클롭스로 표현된, 시민이라는 인물 대표 뒤에 감춰진 혐오는 작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작품은 블룸의 말을 통해 해결책이 제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2장 키클롭스에서 유대인 블룸을 통해 사랑이라는 가치관이 조명된다. 그러나 블룸의 말은 무시되고 비웃음을 당한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서는 블룸을 옹호하고 그들을 비웃을 텐데 말이다. 책은 이 사랑과 혐오의 대립 관계를 통해 우리의 사회를 조명한다. 사랑은 폭력과 혐오에 비해 약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다. 다만 사랑이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죽는다. 흔히 3단 논법의 예시로 활용될 만큼 죽음이란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재앙이며 언제 올지 모르는 부조리다. 율리시스에선 아예 한 장을 통틀어 죽음에게 선사한다. 혐오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핵심 주제인 것이다. 6장 하데스는 디그넘의 죽음에 장례식으로 가는 블룸을 묘사한다. 다만 이 일그러진 오뒷세이아는 신화적 서사시가 아닌 평범한 현실일 뿐이다. 오뒷세이아에선 저승에 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이 있으나, 율리시스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저 남겨져 있을 뿐. 에피쿠로스나 프로디코스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나 이는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심장을 긁는 흉터일 뿐이다. 어느 장인지는 모르겠다만 디그넘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가 죽었다며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에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언데 이것이 어찌 비극적이지 않은 것인가? Domine quo vadis? 이 질문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가야 되옵나이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사랑을 하기에 이런 죽음에 고통을 받고 길을 잃는다. 이런 죽음은 블룸과 스티븐에게도 적용된다. 블룸은 루디를, 스티븐의 어머니를. 각각은 죄책감을 앉고 살아간다. 우리는 이들의 온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을 먹을 수밖에 없다. 로터스 먹는 종족이 있듯 인간은 아편처럼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13장 나우시카에서 블룸이 말했듯 인간은 사랑에 허덕이는 존재다.
Love, lie and be handsome for tomorrow we die.
내일이면 우린 죽을 테니, 사랑하고, 거짓말하며 잘생겨라.
—13장 나우시카 중
인간은 죽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늘 부족하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 한다. 우리에게 혐오는 필수적이지 않지만 사랑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뜻밖에도 블룸과 몰리, 스티븐의 회복과 화합을 찾을 수 있다. 스티븐은 현재 블룸의 말에 따르면 불한당들과 어울리고 있다. 스티븐의 이 위치는 텔레마코스와는 다른 또 다른 인물인 오뒷세우스의 전우들로 이어진다. 오뒷세우스의 전우들이 헬리오스의 황소들을 잡아먹고 욕보이는 것같이 스티븐의 친우들은 혼의 산부인과에서 아이들과 산모들을 욕보인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전우들이 이 때문에 파멸하는 것같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아니 소설의 인근에서도 그들은 파멸하리라. 그러나 스티븐은 앞서 말했듯 텔레마코스의 위치도 갖고 있다. 스티븐이 만일 그들과 계속 예술가로서 어울려 다닌다면 그는 오뒷세우스의 전우로서 파멸하겠지만, 블룸의 조언을 받아들여 연을 끊는다면 그는 텔레마코스로서, 블룸과 몰리의 관계를 이어줄 루디로서 남을 것이다. 말하자면 스티븐은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의 전우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소설의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기에 그 뒤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희망을 갖는다. 인생에 불운이 있더라도 행운이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의 혐오의 굴레 뒤에도 사랑과 회복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스티븐이 블룸과 몰리의 집에서 지내 루디의 빈자리가 메워지고 블룸과 몰리 사이에 아이 하나가 새로 태어나는 미래를, 과거를 극복하고 테너로 성공하는 스티븐을, 서로를 이끌어주고 사랑하는 스티븐과 블룸, 몰리를 조금이나마 꿈꾼다.
뭐 수정할 거나 별로인 점 있음?
원전인 오디세이아에 대한 서술을 좀 더 줄여도 될 듯?
오뒷세이아란 단어만?
@스터브 텔레마코스 오디세우스 페넬로페 이런 단어들 ㅇㅇ 율리시스라는 소설이 원전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듯이 느껴지는 문단들처럼 보여서...그런가 외에는 훌륭한 감상문콘
근데 율리시스 자체가 오뒷세이아 패러디라 조금 힘들 것 같음ㅈㅅㅈㅅ
진짜 ㅈㅅㅈㅅ 답변 다는 것도 시간이고 노력일 텐데 미안할 따름임...
제일 첫 문단에 20세기 관련 문장 하나 넌지시 넣어서 공통주제를 강화해도 좋을 듯
흠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지
근데 다시 읽어봐도 첫 문단 잘 짜여있어서 새로 넣기 힘드네... 쿠오 바디스 위ㅣ에 한 문장 넣는 구조도 생각해봤는데, 원본인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것 같음
그럼 이대로 유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