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다른 세기들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와 20세기 이전의 구시대적 유산이 충돌했던 시기라는 점일 것이다. 그 충돌은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세계를 얽어매었고, 누군가의 말처럼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란 말이 불가능이 아닐 정도로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피해를 낳았다. 이처럼 세계가 불명확한 구도로 변해간 20세기에서 전통적인 서사는 붕괴되었고, 문학은 더 이상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현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가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가상은 현실로의 도피가 아닌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장치로서, 현실이 가상을 만드는 게 아닌 가상이 현실을 구성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가장 급진적으로 형상화한 작가 중 하나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일것이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 세계는 더 이상 단일하고 자명한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끝없이 분열하는 미로이자, 서로를 반사하며 무한히 증식하는 텍스트들의 집합이 되어간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주는 도서관의 형태로 표현되며, 세계는 이미 쓰인 모든 책들의 총합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현실은 경험하는 대상이 아니라 해독하여야 할 텍스트가 된다. 인간은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문자들의 질서 속을 배회하는 독자에 가깝다.


보르헤스의 허구는 전통적 의미의 ‘가상’, 즉 현실을 모방하거나 대체하는 허상과는 결을 달리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상은 현실보다 열등한 층위에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은 가상에 의해 생성되고 규정되며, 때로는 가상에 의해 소멸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철저히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세계 틀뢴은 점차 현실 세계를 침식해 나간다. 이 과정은 현실이 허구에 의해 오염되는 사건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왔던 것 자체가 허구였음을 드러내는 폭로에 가깝다. 보르헤스에게 허구란 거짓이 아니라, 현실이 성립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정직한 사유 실험이다.


이 지점에서 20세기 문학의 가상은 단순한 탈주의 공간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전통적 리얼리즘이 전제했던 안정된 세계, 연속적인 시간, 일관된 주체는 전쟁과 이데올로기,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보르헤스의 미로, 거울, 위서와 가공의 인용들은 이러한 붕괴 이후에 남겨진 세계를 사유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의 문학은 “현실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포기하는 대신, “현실이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결국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20세기 문학이 도달한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과 허구, 원본과 복제, 사실과 해석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문학이 더 이상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세계를 생산하는 기계임을 선언한다. 이처럼 20세기 문학에서 가상은 현실의 반대편에 놓인 그림자가 아니라, 현실을 존재하게 하는 조건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그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어찌저찌 해서 쓰긴 썼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초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