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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기의 전통적인 소련 연구에서는 스탈린을 권력에 미친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로, 그가 내세운 이데올로기는 대중 동원용 명분에 불과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지금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러시아 혁명의 과정과 그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후 비밀 기록보관소가 개방되면서 이러한 가설은 산산조각 났다. 스탈린이 남긴 비공개 기록들, 측근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 휴가 중 아내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심지어 읽던 책의 여백에 남긴 낙서까지 분석해 보니 스탈린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철저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용어와 논리로 사고하고 있었다.
독재자의 냉혹한 결단으로 여겨졌던 농업 강제집단화와 대숙청 역시 중공업화와 효율적인 관료제, 심지어 스탈린 자신의 전제 권력 구축을 위해서도 완벽하게 불필요한 뇌절이었으며 볼셰비키 특유의 이원론과 갱신에 대한 집착이 폭주한 결과였다. 스탈린의 개인적인 권위는 대숙청 이전에도 너무나 확고해서, 1936년 8월 스탈린은 두 달 이상 수도를 비우고 소치로 휴가를 갈 수 있었다.
기록보관소 혁명은 스탈린 개인의 재평가에 그치지 않고 볼셰비키 전체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주체성 연구로 이어졌다. 요헨 헬벡은 소련 인민들의 일기를 분석해 그들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척한 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혁명적 주체로 주조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음을 밝혀냈다.
유리 슬레즈킨은 더 나아가 저작 <정부의 집>(The House of Government)에서 볼셰비키를 기독교 천년왕국주의 종파("부패한 세계에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버림받고 박해받는 자들에게 헌신하며 개인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강한 선민의식, 배타성, 윤리적 엄격함, 사회적 평등주의를 공유하는 자발적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신앙 기반 집단") 전통을 계승한 종파로 정의했다. 그들은 낡은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천년왕국의 도래를 믿으며 삶과 우정, 가족마저 혁명에 바친 광신도들이었다.
정치비평가로서 오웰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한번도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지 못한 외부인이자 상상력이 부족하고 성실한 모범생 같은 영국 지식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보론스키의 자전소설 <산 물과 죽은 물을 찾아서>(За живой и мёртвой водой)는 슬레즈킨의 <정부의 집>에서 자주 인용되는 텍스트다. 보론스키는 1904년부터 당원이었던 구 볼셰비키이자 레닌의 측근이었고, 소련 최고 문예지 <붉은 처녀지>(Красная новь)의 편집장으로서 세르게이 예세닌 같은 천재들을 발굴하며 1920년대 소련 문단을 주도했다. 그리고 덜 중요한 사항으로는 또 다른 인상적인 볼셰비키 회고록을 남긴 노동자 출신 혁명가 세묜 카나치코프의 친구였다.
이 회고록이 어디까지 픽션인지는 알 수 없다. 보론스키의 볼셰비키-NAME인 발렌틴이 화자인 '나'와 별개의 인물로 등장하는 장치도 있고, 2권의 시베리아 유형길의 일행 구성이 당시 러시아 사회 계층을 대변하는 전형들로 하나씩 채워져 있는 등 문학적으로 가공된 느낌이 없지는 않다.
게다가 1928년 좌익 반대파로서 체포된 전력이 있는 바를람 샬라모프(<콜리마 이야기>의 작가)는 이 책의 2권과 3권이 젊은 반대파들을 위한 교과서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회고하며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집필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사례라도 추가할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사소한 혁명가들조차 몇 명은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 예를 들어 화자를 지하혁명운동의 길로 처음 끌어들인 신비로운 혁명가이자 3권 중반부에 집을 수색당해 여권을 잃고 도망치던 화자에게 잠시 은신처를 제공해준 볼셰비키 페옥티스타 먀그코바와 그녀의 어린 딸 타냐 역시 실존 인물이다. (타냐와 그녀의 남편도 1937년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페옥티스타는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이후에도 스탈린 지지자로 남았으며 벽에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손녀에게 부모의 운명에 대해 "적이 너무 많아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게 불가능했다"고 설명하곤 했다.)
작품은 총 3권으로 구성돼 있다. 1권은 사회에서 일탈한 소년의 방황을 다루는 교양소설처럼 시작되었다가 1905년 10월 총파업과 모스크바 봉기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급변하여 바리케이드와 죽음, 망명과 대규모 체포로 끝난다.
2권은 감옥 생활의 비참함과 이송 과정의 우여곡절, 그리고 몸은 나름대로 편하지만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아름다운 자연 속 유형 생활을 다룬다.
3권에서 형기를 마치고 본토로 돌아온 화자는 혁명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목격한다. 두르노보와 스톨리핀의 반혁명이 지하 혁명 조직들을 휩쓸고 간 자리를 1908년의 경제호황으로 번성한 속물들과 소부르주아들이 곰팡이처럼 뒤덮고 있다. 저항의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혁명가들은 모두 절망에 빠져 목숨을 끊거나 망명하거나 현실에 안주하거나 변절했다. 화자는 끈질긴 노력 끝에 작은 조직을 재건하고 글쓰기 재능을 살려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결혼도 한다. 그러나 1912년 프라하 당 대회에 참석했다가 귀국한 직후 오흐라나 첩자 로만 말리노프스키의 밀고로 다시 체포된다.
작품의 스타일은 좋게 말하면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고골이나 체호프를 연상시키는 부조리한 블랙 유머, 그리고 그런 냉소적인 영혼과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섬세하고 애정 어린 묘사가 유려하게 연결돼 있다.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다성적 목소리 역할을 하는 몇몇 인물들의 진심어린 장광설은 도스토옙스키 느낌도 난다. 나쁘게 말하면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가끔 정말 태연하게 빨갬이 미친 소리를 해대는데 이건 정말 독특하다.
플라톤과 뉴턴과 마르크스를 알려고 하지 않는 표트르와 이반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파괴하겠다고 선언한 종말론 종파 신도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가. 보론스키의 회고록 마지막권은 앞서 말했듯 1912년까지를 다루는데, 아직 레나 금광 학살이나 1차 세계대전조차 일어나지 않았으며 진정한 모험이 시작되기도 전이라 할 수 있다.
보론스키에 대한 샬라모프의 짧은 전기는 그의 딸 갈리나가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볼셰비키 원로 옐레나 스타소바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복권을 신청하고 당원 경력 증명서를 발급받는 것으로 끝난다.
슬레즈킨의 <정부의 집>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1960년 모스크바로 이주한 갈리나는 스타소바의 조수가 되었다. 거의 눈이 먼 스타소바는 갈리나에게 신문을 '감정 없이 빠르게' 낭독하게 했고, 발음이 틀리면 꾸짖었다. 스타소바의 아파트는 낡은 가구들로 가득했고 세 점의 스탈린 초상화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침대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관대했고 많은 이를 도왔지만, 주변 사람들은 경멸적으로 대하며 몇 시간씩 카드 게임을 강요하고 모욕을 주었다. 스타소바의 도움으로 복권된 정치범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으나, 너무 많은 것을 본 갈리나 보론스카야는 그 견해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산 물과 죽은 물이래서 아나스타시아 운동이랑 연이 있나 했는데 훨씬 전 러시아 민담에서 서로 따온 거였네 실천과 이론의 대립...
만화가 느낌 좋습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