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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를 너무나 깐 것 같기에 그를 위해 조금이나마 변호한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를 위해 계속해서 수준을 낮춰주고 묻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냐고.


 그가 처음에 아름다운 처녀라 정의했을 때, 그는 조목히 지적해주며 다음의 논의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히피아스는 속성인 금을 얘기한다.


 비교적 상황이 나아졌기에 소크라테스는 다시금 반론하며 질문한다.


 그러나 방금 제가 말했던 것은, 그리 보이건 보이지 않건 간에, 아름답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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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재차 묻는다.


 이것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히피아스는 다시금 예시적 정의(장례 등)로 돌아와 소크라테스를 답답하게 만들고 결국 자문자답하게 된다.


 고르기아스의 칼리클레스 때처럼.


 그러나 칼리클레스는 비교적 똑똑한 청년이었다면 히피아스는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하나인 것은 하나인 것으로 설명해야 하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에 의해서만 입각해야 된다면 이것은 아무런 논의도 아닐 것이다.


 예로 맛있는 것이 왜 맛있냐면 맛있기 때문이에요라 한다면 원인과 전제와 결과가 모두 같아 사실상 의미 없는 논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원인에 대한 이데아론의 비판이기도 히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지적했듯 원인으로서의 이데아를 말한다면 이것은 자가당착이자 순환 논증이 될 수밖에 없다. 


 좋은 것과 아름다움을 분리하는 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좋음과 아름다움을 일치시키는 것도 순환 논증이다.


 좋음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건 좋다. 이런 식의 논증이 되기에.


 결국 아름다움, 좋음 등은 하나이면서 여럿이어야 되며, 이는 자기에 의해 입증이 되는 자가당착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좋음과 아름다움이 별개인 것으로 가정한다면 아름다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해야 되나, 좋은 것이란 결국 별개의 것, 즉 아름다움이 아니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게 아름다움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을 통한 쾌락도 둘이 좋으면 각각이 좋다, 각각이 좋으면 둘도 좋다는 것을 반론한다.


예로 베토벤의 음악은 좋다. 놀이공원의 장대한 풍경도 좋다. 그러나 그 둘이 잘 어울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숫자 중에서 합이 유리수라 해도 각각은 무리수인 경우도 있지 않은가(예: √2와 -√2)? 


그런 것처럼 결국 이데아론이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에우튀프론에서는 경건함과 불경을 서로 떼어놓았다면, 히피아스에선 둘이 동시에 있을 수 있음을 긍정한다.


결국 이는 이데아론에 대한 성찰이며 후에 파르메니데스로 이어질 도약이다.



참고 문헌:

https://m.youtube.com/watch?v=RcUyTskq3bQ&pp=ygUQ64yAIO2eiO2UvOyVhOyKpA%3D%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