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commedia랑 같이 읽기를 추천받아 마땅한 또 하나의 셰익스피어의 희곡


 comedy of errors (이하 에러곡) 


제목에서부터 디바인 코미디랑 대칭을 이루고 있는 느낌인데 


내용도 그러함



귀도 몬테펠트로는 신곡 27곡에 등장하고 


단테의 원수인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신학적 권위로 행위 이전에 결과에 대한 사면을 약속한 걸 믿고 죄를 짓고 지옥행한 인물인데


이후 단테를 지옥에서 만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는 자기연출을 주저하다가 결국 페르소나로부터 자유롭다는 확신을 얻은 후에야


발언을 시작해서 사면을 미끼로 죄를 사주하는 교황의 죄를 꼰지르는 아주 중요한 역을함



에러곡에서는 이지언이 성스러운 곳에서(초기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에페소스에서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함) 


이미 죄가 확정된 죄인이란 같은 포지션에서 역시 자기연출을 주저하다가 


자신이 사형을 받는 것은 by nature 지 by offense가 아니라서 말한다면서 기억을 소환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되어

태어날때부터 운명이 자연스럽게 정해진 페르소나들이 그 운명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면서까지도 스스로의 실존을 인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그런 재밌는 순간들의 이야기들이 이어짐



그 죄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행위에 대한 유명한 신곡의 대사가


"비참한 처지에서 행복한 기억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없다"인데


그 대사를 두고 2차창작이 많이 되어서 더 많이 유명해졌음 


신곡에서 감명받고 만들어진 음악들은 사실 원래 많지만 원작가가 따로 있는 오셀로로 2차창작된 오페라에서도 


"Nessun maggior dolore" 라는 제목으로 그 대사 그대로 인용이 될 정도로





그건 단지 오셀로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해서만은 아니고

그만큼 두 작가의 작품세계가 공유하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먼저 뱃사공이 노래가 데스데모나의 버드나무노래로 연결되고 



물론 그 연결의 공감은 처음 언급한 귀도와 이지언이 아니라 질투로 죽어간 연인들 이야기에 대한 감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근데 그 이상의 것들 말하자면 죽어가는 연인들만이 아니라 에러곡에서 또 오셀로로 연결이 확장이 되고 있음

죽을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해진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가 부르는 버드나무의 노래는

그녀가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직감하고 죽어가던 하녀가 부르던 노래를 기억해서 부르는 것으로 

원래 존재하는 민요를 데스데모나가 일부 개사를 해서 부르는 노래임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것이 바바리라는 이름과 바뀐 가사들인것임


이아고는 오셀로를 바바리의 말이라고 불렀고 결국 바바리의 말은 미쳐서 연인을 버리게 되는 운명을 바바리의 이름 모를 연인과 공유하고 그게 그대로 다시 재현이 됐다는 것임


그건 동시에 심판을 받는자들이 심판에 의해 죽어가는(결정된 운명) 것으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이고 이건 미리 규정당한 모든 이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 셈임


이제 다시 에러극으로 돌아가 그 시작의 순간을 본다면


이지언은 by nature와 by offense를 구분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바다라는 자연에 의해 가족이 해체되는 운명이 결정된게 우연이 아니고


상인들이 아이들을 돈을 주고 사서 그들이 결정한 운명도 포괄하며 그 nature와 offense의 구분은 자의적인 프레임이 되고


처음 이지언의 운명을 결정한 공작의 판단도 그 자의라는 혐의를 같이 받고 거기서도 끝나지 않는 것임


물론 그 공작은 사형을 포기하면서 nature를 거부했지만 그건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 보는 이들도 당연히 기대하게 만든 작가의 기대지


그런 안이한 기대는 어쩔 수 없이 미리 정해진 선택이고 결국 이야기는 그 곳을 향해서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하고 마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실존적 저항 아닐까?


단테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침묵하겠다고 한 건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음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말을 해야겠으니 한 거짓말인셈이지


그래서 나는 화자의 의도 결과 모두 신화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기에 표층을 봐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도피고 발화의 의지를 꺾는 신의 또다른 하수인이라고 생각함


그럴수 밖에 없는게 안이한 발상을 하는 자들은 말도 안이하게 처하고 스스로 창살이 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부끄러움도 모르더라고

 



모두의 과거가 아름다웠다면 모두의 현재는 왜 어려운 것일까


서로의 현재를 아름답게 보기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를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타자의 존재고 그것은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운 나(과거)를 훼손하는 무엇인가


너의 빛나는 허물과 너의 당연한 죄에서 내가 기어이 선택한 죄와 나의 어쩔수 없던 순수한 사랑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잊는 것 보단 그런 제약없는 더 넓은 그러나 빠져 죽지 않을 만큼 얕은 공감이야 말로 언발에 잠시라도 위안을 주는 배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