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나는 행복이 시를 쓰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의해 우리 자신이 시처럼 쓰이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울'에서 나는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 미세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 간극을 우리의 모습을 인지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다. 이 미세한 틈새에서 우리의 온갖 심리학적 상태가, 우리의 모든 신경증과 두려움, '나'의 승리와 추락이 유래한다. 우리가 자신을 즉각 알아 볼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이 포착 불가능한 틈새만 없다면 우리는 심리학이 전혀 필요 없는 천사와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심리학과 다를 바 없는 소설도 없을 것이다. 소설이란 등장인물들이 스스로를 알아보거나 오해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니까.
플라톤의 스타일에서 나는 철학이 신화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화가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신화가 진실이나 거짓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화는 오히려 절대적으로 진실한─혹은 거짓인─명제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말들의 해독제에 가깝다. 어떤 명제에서 관건이 일종의 생각일 때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그의 악의에 찬 제자가 요구했던 대로─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신화적인 보완 요소를 함축하기 때문에 "존재 전체의 진실과 거짓을" 함께 말할 수 있는 담론만이 철학적이다.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中
호모 싸써 대단원들(몸의 사용, 가장 높은 가난..)을 아직 읽지 않았고, 초기 아감벤에 대한 편애가 다소 있지만, 내 생각에 아감벤은 역시 푸코보단 하이데거에 훨씬 가까운 사람임
푸코는 조건들의 변환을 기술할 뿐 존재론적 심연으로 뛰어들지 않는(망설이는? 혹은 조소하는?) 반면,
아감벤은 문헌학/고고학을 도구로 삼는다지만 언제든 그 분석을 존재론적 결단의 장으로 밀어 넣으려는 강박에 시달림
개인적으로 푸코는 니체의 용어들을 빌리지만 카시러에 가까워진다고 느낌(사실 니체가 어둠의 칸티언임)
짤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