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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punk 포스트(2005. 01. 09.)를 바탕으로

조이 디11비전이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리 시대의 '우울한 정신적 지형’을 가장 정교하게 포착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그들의 음악을 듣는 행위는, 이들이 무기력한 몰입 속에서 자신들의 미래이자 곧 우리의 현재인 이 시대를 예언적으로 채널링하고 있었다는 피할 수 없는 확신을 안겨준다. 이들의 작업은 초기부터 짙은 불길함에 침식되어 있었다. 미래는 이미 폐쇄되었고, 모든 확신은 해체되었으며, 오직 증폭되는 어둠만이 예견된 상태. 그것이 조이 디11비전의 세계였다.



조이 디11비전이 활동했던 1979년과 1980년이 역사적 ‘임계점(Threshold)’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자명해 보인다. 사회 민주주의, 포드주의적 산업 사회라는 구세계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와 소비자 중심의 정보 사회라는 신세계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전환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절은 사후적인 해석에 가깝다. 시대의 균열은 당대에는 좀처럼 감각되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질 들뢰즈가 명명하고 조이 디12비전의 수식어가 된 ‘통제 사회(Society of Control)’에 완전히 유폐된 지금, 1970년대는 기이한 매혹으로 다가온다. 그 시절은 대전환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간으로, 현재보다 더 자애로우면서도 동시에 더 잔인했다. 당시 당연시되던 사회적 안전망은 이미 파괴되었으나, 거리낌 없이 배출되던 노골적인 편견들 또한 이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조이 디11비전을 탄생시켰던 토양은 증발했다. 그러나 배급제를 마지못해 끝낸 듯했던 영국 일상의 그 회색빛 절망, 그 특유의 질감 또한 함께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70년대는 드라마의 배경으로 전락할 만큼 충분히 박제되었고, 조이 디11비전은 그 박제된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002)에서 그들은 팩토리 레코드의 광대이자 천재인 토니 윌슨의 서사를 여는 도입부의 카메오로 소비될 뿐이었다.



안톤 코르빈의 <컨트롤>(2007)은 이들을 무대 전면에 세웠으나, 정작 본질과의 접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의 서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기시감 넘치는 재연이었고, 문외한들에게는 그들이 지닌 ‘주술적 힘(Sorcerous power)’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서사를 훑고 지나갔을 뿐, 관객을 그 소용돌이(Maelstrom) 속으로 밀어 넣지 못했다. 왜 이 그룹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실존적 감각을 일깨우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이는 필연적인 실패였을지도 모른다. 록(Rock)이란 장르는 특정한 신체와 목소리,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신비로운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컨트롤>은 이언 커티스의 육성과 육체의 상실을 메우지 못한 채, ‘아트하우스 가라오케 식의 자연주의’에 머물렀다. 배우들은 코드를 흉내 내고 커티스의 경련을 모사할 수는 있었지만, 그 소용돌이치는 카리스마(Vortical charisma)까지 직조해낼 수는 없었다. 단순한 음악적 구조를 강렬한 표현주의이자 외부로 향하는 포털로 변모시켰던, 그 무의식적인 ‘강령술적 예술(Necromantic art)’을 소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공연 영상과 실제 음반의 소리다. 그렇기에 세 편의 영화 중 그랜트 기의 다큐멘터리 <조이 디11비전>(2007)이 가장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8mm 필름 조각들과 인터뷰, 그리고 전후 맨체스터의 잔상들로 깁워진 이 영화는 마셜 버먼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현대적(modern)이라는 것은 모험, 권력, 기쁨, 성장을 약속하는 환경에 놓이는 동시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라는 존재 자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받는 환경에 놓이는 것이다."



<컨트롤>이 그룹의 현존을 흉내 내려다 윤곽선만 남겼다면, 다큐멘터리 <조이 디11비전>은 ‘선명한 상실감’을 동력으로 삼는다. 이는 이미 사라져버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다. 이 영화는 망자들의 명단과도 같다. 커티스뿐만 아니라 롭 그레튼, 마틴 해넷, 그리고 토니 윌슨까지, 조이 디11비전의 세계를 구축했던 주역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zuk은 자들의 땅을 부유하는 zuk은 자의 목소리, 즉 이언 커티스가 전생 퇴행 최면을 받는 낡은 카세트 테이프 녹음본이다. "나는 아주 멀리, 수많은 다른 시간 속을 여행했어요." 차갑고 먼 곳을 채널링하는 그 느릿하고 탁한 음성. "몇 살인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스물여덟"이라 답한다. 그가 스물세 살에 생을 마감할 것임을 아는 우리에게, 이 대답은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서늘한 전율을 선사한다.



활짝 열린 수용소의 문들

나는 1982년이 되어서야 조이 디11비전을 처음 들었다. 그래서 내게 커티스는 '언제나-이미' zuk은 존재였다. 열네 살의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은, 존 카펜터의 영화 <매드니스>에서 서터 케인이 주인공 존 트렌트에게 그가 이미 매몰되어 있는 하이퍼-픽션(초소설)을 강제로 읽게 만들던 그 순간과 같았다. 나의 미래 전체가 그 소리 이미지들 속에 강렬하게 압축되어 있었다. 밸러드와 버로스, 더브(dub)와 디스코, 고딕, 항우울제, 정신병동, 약물 과다복용, 그리고 그어진 손목들. 그것은 14세 소년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과도한 자극이었다. 멤버들조차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때의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뉴 오더는 그 누구보다도 조이 디11비전이라는 거대한 묘지로부터 도망치려 애썼고, 1990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 단절을 이뤄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주류 영국 남성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인 키스 앨런과 어울리며 부른 월드컵 응원가는 탈-숭고화(desublimation)의 완벽한 실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코드워 에슌이 말한 '영향력에 대한 불안(그들 스스로가 끼치는 영향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다. 앨범 Movement 시절만 해도 그들은 여전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상태였으며, 간신히 소통이 가능한 최면 상태에 얼어붙어 있었다. ("나를 에워싼 소음들 / 내 머릿속에서 너무나 크게 울리는...") 커티스 사후 15년 뒤 존 새비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커티스의 그 기괴하면서도 강렬한 무대 위의 경련과 최면, 그리고 그의 절망적인 가사들에 대해 그들은 침묵했다. 마법이 깨질까 두려워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마법사 없는 도제들이자, 목소리를 채널링하는 공식을 우연히 발견해버린 무의식적인 강령술사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커티스의 비전에 의해 움직이는 무지한 '골렘'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가 zuk었을 때, 멤버들은 자신들의 '눈'을 잃었다고 말한 것이다.)



분명한 점은 조이 디11비전이 단순한 팝 그룹이나 오락거리 이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의 가사를 마치 직접 쓴 것처럼 외웠고, 가사 속의 암시를 따라 더 어두운 방들로 향했다. 지금 그들의 앨범을 듣는 것은 익숙하고 편안한 옷을 입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은 아마도 '완전한 성인이 되지 못한' 한 세대 전체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우리'였을 것이다. 조이 디11비전의 숭배자들에게는 기묘한 보편성이 허용되었다(물론 당신이 남성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렇다, 당신이 남성인 경우에만. 조이 디11비전이라는 종교는 자의식적인 '소년들의 영역'이었다. 데보라 커티스는 그녀의 저서 Touching from a Distance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아내와 여자친구들은 공연장에서 점차 추방되었고 묘한 남성적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소년들은 서로를 통해서만 즐거움을 찾는 듯 보였다." 여자 금지. 이언 커티스의 아내로서 데보라는 록의 낙원에서 배제되었고, 쾌락 원칙 너머에 존재하는 'zuk음의 숭배'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남겨진 난장판을 치워야 했을 뿐이다.



조이 디11비전이 철저히 남성적인 그룹이었다면, 그들의 대표곡인 ‘She’s Lost Control’은 이언 커티스가 자신의 질병인 '성스러운 병', 즉 간질을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투사(abjecting)한 곡이다. 프로이트는 성적 열정에 사로잡힌 신체와 더불어 간질 발작을 '언캐니(Unheimlich)', 즉 기이하면서도 익숙한 것의 예시로 들었다. 여기서 유기체는 무기물의 기계적 리듬에 예속된다. 조이 디11비전의 음악이 늘 그렇듯, 무생물이 곡조를 결정하는 것이다. ‘She’s Lost Control’은 록 역사상 무기물에 대한 광물적 매혹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곡 중 하나다.



조이 디11비전의 그 서늘한 '불사(undeath)의 디스코'는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뇌의 손상된 시냅스 경로 내부에서 녹음된 것처럼 들린다. 커티스의 음울하고 무감각한 보컬은 마치 '타자'의 목소리인 양, 지독한 산성 안개처럼 머무는 표현주의적 메아리가 되어 그에게 되돌아온다. 이 곡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처럼 주체성 안의 가사(catalepsy) 상태라는 블랙홀을 횡단하며, '탈출구 없는 절벽'에 맞서기 위해 zuk은 자들의 땅으로 평탄한 항해를 떠났다가 돌아온다. 발작 속에서 그들은 '작은 zuk음(petits mals)'을 보았고, 그것은 그 어떤 오르가슴보다 강력하며 자아로부터의 공포스럽지만 짜릿한 해방을 선사했다.



장전된 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리니 — 그렇게 당신은 말하네

"장전된 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리니(A loaded gun won’t set you free)." 앨범 Unknown Pleasures의 수록곡 ‘New Dawn Fades’에서 이언 커티스는 이렇게 노래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데보라 커티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New Dawn Fades’의 가사를 곰곰이 씹어본 뒤, 나는 이언에게 말을 붙였다. 그 가사들이 그저 가사일 뿐이며 그의 실제 감정과는 무관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대화였다. 그는 내가 제기한 어떤 질문에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다시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의 두려움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20대 초반에 za살할 계획을 품고서도 나와 결혼한 것일까?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볼 마음도 없으면서 왜 아이를 가졌을까? 그가 자신의 불행을 글로 써야만 했을 정도로 내가 그의 고통에 무지했던 걸까?" (데보라 커티스, 『멀리서 본 접촉: 이언 커티스와 조이 디1비전』, 1995, 85쪽)



zuk음에 대한 남성적 열망은 록 음악에서 언제나 잠재된 복선이었다. 하지만 조이 디11비전 이전의 zuk음은 리비도적 구실 뒤에 숨어 밀반입된 것이었다. 그것은 늑대의 가죽을 쓴 검은 개, 즉 에로스(Eros)로 위장한 타나토스(Thanatos)이거나, 혹은 팬터마임식의 분장을 한 연극적 zuk음에 불과했다. za살은 '진정성(authenticity)'의 보증 수표였고, 당신이 진실하다(4 Real)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기호였다.



za살은 삶을—그 모든 일상의 난잡함, 갈등, 양가감정, 실망, 미결된 과제, 그리고 '낭비와 열병과 열기'를—차갑고 단단한 신화로 변모시킨다. 그것은 피터 사빌이 앨범 커버에서 모사했던, 그리고 커티스가 ‘In a Lonely Place’의 가사에서 어루만졌던 '대리석과 돌'처럼 견고하고 매끄러우며 영속적이다. (‘In a Lonely Place’는 본래 커티스의 곡이었으나, 그가 zuk은 뒤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좀비 상태의 뉴 오더에 의해 녹음되었다. 이 노래에서 커티스는 마치 자신의 장례식에 침입한 이방인처럼 자신의 zuk음을 애도하는 듯하다. "지금 당신이 나와 여기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이 디11비전을 둘러싼 거대한 논쟁들—그들은 타락 천사였나 평범한 녀석들이었나? 그들은 파시스트였나? 커티스의 za살은 필연이었나 방지 가능한 것이었나?—이 모든 질문은 결국 예술과 삶의 관계에 귀결된다. 우리는 유미주의적 낭만주의자들(말하자면 과거의 우리들)이나 우둔한 경험주의자들에게 현혹되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유미주의자들은 앨범 커버와 사운드가 약속하는 세계, 즉 지저분한 타협과 일상의 당혹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흑백의 영역을 원한다. 반면 경험주의자들은 그 반대를 고집한다. 그들은 노래를 가장 숭고하지 않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진지하지 않은 일상에 뿌리 내리게 하려 든다. "이언은 웃긴 녀석이었고, 밴드는 그저 술 마시기 좋아하는 어린 애들이었어. 다들 좀 심해진 장난이었을 뿐이지..."



하지만 이 두 가지 조이 디11비전—'순수 예술'로서의 조이 디11비전과 '그저 장난'이었던 조이 디1비전—을 동시에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조이 디11비전의 진실이 그저 평범한 청년들(Lads)이었다는 것이라면, 조이 디11비전이라는 현상 또한 그 청년 문화(Laddism)의 진실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이어져 온 그 술 취한 익살스러움의 이면에서, 청소년 정신질환은 약 70% 증가했다. za살은 여전히 젊은 남성들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나는 아무도 깨우지 않고 부모님 댁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갔고,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음에 들린 소리는 '이것이 끝이야, 나의 아름다운 친구여. 이것이 끝이야, 나의 유일한 친구인 끝... 다시는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겠지...'라는 가사였다. 도어즈(The Doors)의 'The End'가 들리는 것에 놀라 나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잠결에도 일요일 아침 라디오 원(Radio One)에서 나올 법한 노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라디오는 없었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다." (데보라 커티스,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