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사람들은 데자뷰가 어떤 것인지를 종종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데자뷰라는 표현은 과연 만족스러운 것인가? 오히려 흘러간 삶의 어둠 속에서 어느 땐가 울렸던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들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한순간이 이미 살아봤던 것처럼 의식될 때 받는 충격은 대부분 하나의 소리로 다가온다는 사실도 이와 일치한다. 그 소리는 예기치 않게 우리를 과거의 차가운 동굴로 불러들이는 힘을 가진 어떤 단어, 속삭임, 혹은 노크 소리일 수 있다. 우리에게 현재란 그 동굴의 둥근 천장에 부딪혀 울려 퍼지는 메아리에 불과한 첫처럼 보인다. 이러한 무아경과 짝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우리의 방에 잊고 있던 토시가 그렇듯이, 어떤 단어가 우리를 놀라게 할 때 받는 충격이 그것이다. 그 토시가 그 방에 왔다 간 어떤 낮선 존재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아직 보이지 않는 낮선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단어나 멈춘의 순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그러한 단어들을 놓고 간 미래이다. 내가 아마 다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저녁ㅡ나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다ㅡ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아마 내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해주러 오신 것 같다. 그가 나에게 어떤 먼 사촌의 죽음을 알린 것은 어느 정도는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 사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었고 나이 든 어른이었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아주 상세하게 전하셨고 나의 질문에 대해 심장마비가 어떤 것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날 저녁의 내 방과 내 침대를 마음에 잘 새겨두었다. 마치 언젠가 무언가 잊었던 것을 다시 찾으러 오기 위해 그곳을 자세히 머리에 담기라도 하듯이.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비로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방에서 아버지는 내게 어떤 사실을 숨기셨는데, 그 사촌의 죽음은 매독 때문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넘 좋은 것 같음
수필 중에서는 페소아 불안의 책이랑 이 책인 인생책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