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와 이성이라는 말에는 늘 오해가 붙어있다 


그것들은 세계를 꿰뚫는 도구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면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고


 그 도구가 세계를 통과한 뒤에서야 비로소 뒤늦게 붙여지는 표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먼저 움직이며 그 사실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다른 성질의 수요가 있다


거기서 하스미가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표면을 보라! 영화 화면 위에 놓인 것만을 보라! 문학 속 사건이 언어를 배반하는 그 짜증을 보라!


그리고는 그 표면을 보는 법으로서 던지기의 미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던져진 물체가 그리는 포물선은 무의미하고 그 목적 없는 운동성이 주는 이유 없는 아름다움 


그러나 던지는 순간 이미 이 운동에는 약속이 개입한다 중력은 선택이 아니라서 하강은 필연이며 종말이 예정된 시간의 경험이고 그 궤적은 자유가 아니라 완벽히 관리된 계획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순수한 표면"이라 부르는 순간 이 필연을 작동시키는 모든 작용은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숨는다 


마치 아무도 던지지 않았고 그저 물체가 스스로 움직였다는 듯이 보이는 것만 남기고 보이게 만든 것들은 당연한 순리로 영원한 신성함에 포괄된다 


이때 무의미는 비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하스미의 구체적인 예에서 무의미는 프로이트식 만물에 대한 발기의 프레임으로서의 "리비도"의 대척점이 아니라


좀 더 알기 쉬운 폭력을 미리 분리하는 정치행위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황야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잘린 나무둥걸에 손칼을 던져 박아대고 뽑고 또 박아대면서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관객이 알고 있는 여성을 포함한 마차대열이 그 옆을 지나가는 걸 발견하고 말을 타고 쫓기 시작하고


자욱한 흙모래먼지들 사이로 말머리가 뚫고 나오면서 마차 행렬과 침입이 조우한다"


"여성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맥락에서 두 대척점의 남성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는 대사를 나누고 그 끝에 무심히 어두운 계곡 밑으로 술병을 던진다"


분명하게 대조가능하고(일반적이고 흔한 '서부영화'의 던지기와 다르다는 맥락을 포함한) 다르게 작용되는 던지기에서


"프로이트식 만물에 대한 발기라는 납작한 프레임을 거부하는 던지기의 풍부한 무의미"라는 미학적인 선언이 가능해진 것이지만 이 무의미는 필연적으로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애초에 움직이는 표면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중립과 거리가 먼 것이나 


그것을 중립으로 이해하는 순간 표면은 방패요 방패는 사실 언제나 공격을 전제로 설계되었던 것이다


표면만 보라는 요구는 표면을 가장 두껍게 만드는 작업이고 그것은 그 표면이 두터워 지는 만큼 심연이 표면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하여 더 이상 언어로 호출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설계된 침묵이란 뜻이지






 무엇을 막기 위해 이렇게 두꺼워졌는지, 무엇을 가리기 위해 이렇게 매끄러워졌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것이 순수로 호출될 때


 사유는 멈춘다는 사실에 모든 비밀이 있는 것이다


이 방패는 낯설지 않다 특히나 일본이란 태그를 붙힌다면 말이다



일본의 신사문화엔 토리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솟대문화 (인류가 발기라는 수단을 어떻게 대해왔는가를 설명하는 징표로서 가치를 가지는)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나


대륙의 논리에 속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남근을 숭배함이란 단순 미개해 보이는 행위에도 인류가 살면서 겪은 세계를 반영하는 복잡함이 있다는 거임


정착하여 농경문화가 발전하면서 체제경쟁의 맥락에서 출산율 경쟁이라는 사회 정치 외교적인 맥락


완벽하게 예측하기 어렵고 완전히 모를 수 없는 자연의 규칙적인 변화를 이해하고 그 변화에서 기복을 비는 종교적인 맥락도 있고


(솟대문화는 비가 안오면 남근을 형상하는 물건을 '타자가 의도해도 자연히 물을 뿜는 기계'로서 대하고


그걸 쓸고 만지고 물을 뿌리고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와야되는 비가 오라고 비는 행위에서 시작된 거임)



그렇게 시작했어도 점점 크게 만들어 마을 입구에 두고 여기를 지키는 영역표시의 남근이 되었다가


여기서부터 차이나타운이라고 마이너리티가 자율의 경계를 표시하는 문이 되기도 한 것임


그 입구가 아니라 경계로서의 회문의 출처를 증언하는게 초기종교를 비판하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문의 개념이고 (불국토와 속세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나와 부처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회문) 


그런 프레임이 필요없던 일본에서 그 문은 그러니까 토리이는 돈내면 이름달아 심어주는 수십 수백개의 각자의 재력만큼의 크기로 열을 지어 존재하는 거지


그 문이 도달한 세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건(일본은 그런 세계가 필요없었다는 거지 이해의 수준과 능력의 근원이 다르다는 말이 아님 )


대륙의 문이라는 프레임을 표면으로만 받아들일때 천국의 유료 입장권이 되어 즐비하게 늘어서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말이지


그런식으로 일본의 섬이라는 특징이 반영하는 문화에는 가져온 것의 표면만을 이용하여 원래의 프레임을 깨는 창의성이 있지만 표면에 집착하여 멀리 가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밖에 없고





하스미의 언어가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지배적인 프레임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에 머무를 수 있을때 발생하는 것일 뿐이나


그러나 그럴 수 없고 중립적인 표면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프레임이란 것을 드러내는 순간이 오고야 마는 것임


'얄팍한 도금 같은 일본에 지배되어 스스로 선택하는 아름다움 죽음에 도달하는 일본인' 같은 심연앞에서 도금을 부정하는 표층이란 정신병에 걸려 버리면서까지 말이지